오십에 새 길을 나섰다

-버킷리스트를 지워가며

by sagitarius

마흔쯤 됐을 땐가 '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란 책을 읽고 흠뻑 빠졌다. 이후 1년에 한 번은 이 책을 꺼내 읽고 또 읽었다. 원제목은 'A year by the sea'. 원제에는 전혀 없는 '오십', '길'이란 단어를 넣은 한글번역판은 나를 새 길로 인도했다.

(조안 앤더슨의 '오십에 길을 나선 여자' 개정판 표지)

우리 나이로 오십이 되던 해 25년간의 직장생활을 일단 끝냈다. 회사가 내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불만이 점점 커졌다.

거기에 아이들도 다 자랐고, 뭔가 변곡점에서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싶었다. 은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여러 가지 복합적 이유는 있었지만 결국 나는 책의 주술에 이끌리지 않았나 싶다.


많은 사람은 오십이란 나이를 두려워하지만, 나는 오십이 되길 기다리기도 했다. 그때 되면 진정한 나로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엄마, 아내, 딸, 직장인의 이름표를 벗어던지고 'sagitarius'(내 아이디) ,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조금은 지루하지만 따뜻했던 실내를 벗어나 길을 나선 지 1년이 넘었다. 지난 1년간의 모든 경험은 너무나 생생해서 이전의 3,4년을 다 합친 것보다 기억할게 많다.




실제로 복잡한 길을 혼자 걸어가는 꿈도 꾸곤 했다. 여러 사람이 분주히 걸어가는 틈에 나 혼자 어리둥절해하며 걸어가는 꿈이었다. 꿈에서 느낀 기분도 아직 또렷하다. 두렵진 않았고, 호기심이 컸으나 낯설었다.


내 등불같은 책의 주인공은 고향인 작은 어촌에 내려가 1년을 산다. 매일 해변을 산책하고 식당에서 일도 한다. 특히 아침마다 항구 앞 어부들이 즐겨 이용하는 식당에서 모닝커피 하는 장면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고향이 바닷가라 늘 그 꿈을 꾸어왔다. 아침에 창을 열어 바다 내음을 마시고, 모래사장에서 조깅하는 것을 일생의 워너비로 꼽았다. 그러나 아직 혼자 내려가기에는 여러 제약이 있어 일단 이 꿈은 미래로 넘겼다.


당장 뭐부터 시작할까. 케케묵은 내 버킷리스트를 꺼냈다. '왜 매번 리스트만 작성했을까. 이 중에 당장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하나씩 지워나가기로 했다.


먼저 수영 배우기.

이제와 생각하면 어이없다. 수영장 등록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과거의 나는 여러 핑계가 있었지. 근처에 수영장이 없다, 수영하면 전후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스무 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수영을 오십에 시작했다. 개인강습을 4회 받고, 단체 강습으로 들어갔다. 죽어도 뜨지 않던 몸도 뜨고, 물속 호흡도 하고, 내 팔다리로 저어 레인 끝까지 가게 됐다.


수영은 내게 있어 혁명과 같았다. 달리기나 다른 운동과 다르게 물을 자유자재로 건널 수 있다는 것은 세계가 바뀌는 기분이다.


그때부터 수영 인간으로 살았다. 하루에 유튜브로 수영 동영상 20개 정도를 보고, 혼자 침대에 누워 연습한 뒤 수영장에 갔다. (러블리스위머, 김예슬, 양정양오, 미친물개 등 알찬 수영영상은 다음 기회 소개를..) 손끝, 머리, 발, 팔꿈치 동작을 머릿속에 되뇌며 물속에서 시험했다. 가족들은 수영 선수할 거냐며 이상하게 보기도 했지만, 내 머릿속의 80%는 수영이 지배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펑키타 수영복)

마침 그때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를 다시 봤는데 수영장 장면만 몇 번이고 돌려봤다. '아 저렇게 아무도 없는 한밤의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히 올라왔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한국영화 '4등', 일본 영화 '수영장' '바다의 뚜껑', 프랑스 영화 '그랑블루'까지 섭렵했다.


수영을 사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평영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나는 내 운동신경을 저주했다. 강사가 "오늘 안에 돌아오는 거냐"라고 말할 정도로 평영 굼벵이였다. 평영이 어려운지 인터넷엔 평포자(평영포기자) 글이 많았고 그게 조금 위안이 됐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되니 할 수없다. 매일 수영장에서 혼자 연습하고 느리면 느린 대로 버텼다. 지금도 평영을 잘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시간을 들인 연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은 강습은 받지 않고 혼자 자유형 돌기를 주로 한다. 저녁 9시쯤 되면 수영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나는 내가 제일 잘났다는 마음으로 수영을 한다. 온몸에 힘을 빼고 물에 털썩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평온하기 그지없다. 왜 진작 시작하지 않았을까, 후회는 이제 그만. 지금부터 하면 30년이상은 수영인생을 즐길 수 있다.


올해 내 계획은 바다 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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