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gitarius Mar 05. 2019

 25년간 매일밤 가계부 써보니..

-버킷리스트를 지워가며

'깡통주택으로 노후자금 홀라당'

'국민 57%, 노후자금 부족'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중독이라는 월급이 사라지고 나니, '노후파산' '노후자금 바닥' '100세 시대 재앙' 이런 단어들이 콕콕 가슴에 박혔다.


월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달 300만원의 소득은 20억원 이상의 예금을 갖고 있는 이자생활자와 비슷하다는 말은 월급생활자를 안도하게 만든다. 월급이 없다는 가정도 여러 번 해봤고, 내가 그것에 적응하거나  감당할 수 있을 지도 시뮬레이션해봤다.


막상 부딪히는 현실은 냉혹하긴 하다.  매달 25일 전후가 되면 갑자기 우울해진다. 월급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요즘은 주 52시간제가 시행되며 근무시간도 많이 줄었다는데 월급쟁이가 최고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지 출처 USA Today

 그러나 월급이 없는 멘붕의 현실을 조금 지나고, 중간에 일을 몇 개월간 하면서 다시 한번 '월급 vs 시간' , '돈 vs 인생계획'을 저울질했다.


월급에 대한 강한 미련과 집착을 정리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미 선택한 길에 들어서 계속 뒤를 돌아보는 것은 미래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퇴사를 계획하면서 했던 숱한 생각들을 다시 끄집어냈다. 내 인생의 다음 스텝, 휴식 때 하고 싶은 것들, 돈 문제...


 '잘리기 전에 절대 제 발로 나가지 마라'가 40~50대 사이 철칙처럼 간주되는 때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이 아니다. 지루함? 자존심? 도태? 그 모든 게 돈 앞에서 버티지 못한다고들 한다.


이게 현실이라고 인정한다. 그럼 모두가 책상을 부여잡는 선택을 해야만 할까. 개인적인 상황은 각양각색인데 다른 삶의 방식도 있지 않을까.


먼저 감사하게도 나는 맞벌이다. 그러나 두 아이들 교육문제 등 지출이 많은 시기다. 수십 년간 맞벌이 구조에 맞게 설계된 지출 규모를 변화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퇴사하려고 회사 경영진과 상담할 때 대놓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맞벌이에서 외벌이 쉽지 않을걸? 무슨 자신감으로?"


내 계산은 이랬다. 50세쯤이면 첫째가 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둘째가 대학에 입학하니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첫째가 취직을 하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학부 때와 달리 아르바이트나 인턴 등 경제활동을 더 넓힐 수 있다. 내 계획에 조금 착오가 있었다면, 우리 세대의 경우 나와 주변 친구들은 대학 입학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했다. 학비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쌌고, 취업이 잘됐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조건이 과거와 달라 20대의 독립시기는 점점 늦어지고 있다.


아무튼 지출의 규모가 조금이나마 줄어든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교육비를 제외하면 크게 지출할 일이 많지 않았다. 집도 줄여나갈 셈이었다.


회사 상사는 나를 호기 부리는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진 않았다. 나름 데이터를 갖고 행동한 것인데, 그 배경에는 바로 25년간 매일 써온 가계부가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1976년 여성중앙 1월호의 별책부록 가계부


어릴 때 엄마는 늘 새해 1월에만 여성잡지를 사서 부록으로 받은 가계부를 쓰곤 하셨다. 화려한 금박이 장식된 가계부에 새 펜을 꺼내서 매일 일기도 몇 줄 쓰고 그날 시장 봐온 것들을 하나씩 기록했다. 나는 옆에서 새 가계부 냄새를 킁킁 맡고 토정비결도 찾아보고 엄마가 쓴 지출내역을 곁눈질했다.


그럴 때는 그저 가계부라는 형식과 가계부를 쓰는 시간이 좋아 보였다. (엄마는 가끔 한숨도 쉬셨지만..)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금전출납부라는 이름의 공책도 써보고, 대학 와서는 독립해 살면서 아르바이트비를 받으면 지출한 것들을 쓰곤 했다.


본격적인 가계부 작성은 결혼과 함께 시작됐다.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데다 살림살이 구입하는 게 많아지면서 매일 밤  TV 드라마를 보며 가계부를 펼쳤다. 나는 은행, 특히 농협에서 주는 가계부를 유독 좋아했다. 군더더기가 없고 재테크 팁까지 있어서 연말이 되면 늘 농협에서 한 권씩 구했다.


시간이 지나고 인터넷 가계부, 엑셀 가계부, 스마트폰 가계부 어플도 시도해봤다. 특히 요즘은 현금을 거의 안 쓰니 통장 입출금 내역이나 카드 이용명세서만 제대로 저장해도 충분히 가계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일기나 가계부는 손으로 쓰는 것을 좋아한다. 대신 얇고 작은 수첩을 가방에 들고 다니며 그때그때 기록한다. 자산관리해주는 어플과 달리 수입이나 다른 항목은 배제하고, 지출만 기록한다. 한 달간의 지출 규모를 파악하고 싶어서다. 그걸 보면서 내가 직장을 다니지 않을 경우, 부부 모두 은퇴할 경우 최소 생활비용은 어떨지 가늠했다.

  

  

가벼운 수첩에 기록하는 내  가계부


아마 전문가가 내 가계부를 검사한다면 낙제점을 받을 것 같은데 모든 게 내 멋대로이기 때문이다.  한 달의 단위도 1일부터 30일까지가 아니다. 22일부터 다음 달 21일까지다. 21일이 아파트 관리비 내는 날이라 그렇게 정했다. (이유는 없는데 왠지 관리비를 내면 한 달이 정리되는 기분이다)


부조나 축의금 같은 것은 별도 항목으로 기록만 해놓고 생활비 계산에는 넣지 않는다.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특별지출(해외여행, 가전제품 구입 등)도 따로 기록해서 연말에 연간 계산할 때 '특별비' 항목을 만든다.


매달 21일 월 지출을 정리할 때는 식비, 의료비 같은 분류는 하지 않고 금액이 큰 지출이나 일회성 지출만 옆에 체크 표시를 한다. 매월 나가는 지출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말이 돼서 체크 표시한 항목들, 즉 사치성 구입비나 정례적이지 않은 특별한 지출을 쭉 살펴보면 얼마나 생활비를 줄일 수 있을지, 또 나중에 여행이나 레저비는 어느 정도 될지 계산이 된다. 한 달에 필수 생활비 ****, 여기에 여가활동을 추가로 얼마 늘릴 수 있다는 감이 잡힌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가계부를 느슨하게 기록했기에 오래 써올 수 있었던 것 같다.


가계부와 함께 필요한 것이 집안의 각종 재고 기록과 자산관리장이다. 냉장고 비우기 등이 유행인데 어느 집이나 절실한 습관일 것이다. 냉장고 안에 식재료는 썩어나가고 그것도 모르고 계속 사들이고..


가계부를 기록하면 습관적으로 마트를 가는 일도 절제하게 된다. 품목이 적힌 마트 영수증을 붙여 놓으면 더 좋다. 지난주 시금치를 사놓고도 잊어먹기 일쑤다.  치약 칫솔 두루마리 휴지 생수 등 재고를 가계부 한편에 기록해두면 좋다.


자산관리 기록은 아예 다른 영역이다. 가계부가 지출만 기록하는 가벼운 수첩이라면 자산관리는 책이나 마찬가지다. 적금 만기부터 펀드 수익률 , 목표 수익률 등을 일일이 기록한다. 이런 것들을 다 통합해서 관리하는 게 바람직한 방법일 텐데 아직까지는 내식대로 쓰고 있다.


25년간 써온 가계부는 무엇보다 나와 내 가정의 씀씀이를 측정할 수 있다. 무조건 아끼는 게 능사가 아니고 내 지출의 영역을 파악해서 내게 필요한 노후자금은 어느 정도 일지 계산할 수 있다.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비용, 과감히 자를 수 있는 비용도 파악해야 한다.


이런 점검은 수시로 해야 한다. 상황은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금융기관과 언론의 공포 마케팅 뉴스에 휘둘리기만 해선 안된다.  오늘도 포털사이트에는 '**억 원은 있어야 한다는데.. 노후자금 깡통'의 기사가 깜박인다. 이제는 이런 자극적 문구를 보고도 가슴이 덜 쿵쾅거린다. 공포마켓팅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내겐 어려운 10km 1시간에 달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