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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gitarius Feb 25. 2019

내겐 어려운 10km 1시간에 달리기

-버킷리스트를 지워가며

'조금만 더... 속도 높인다고 심장이 멈추지는 않을 거야'

'내가 지금 왜 이걸 하고 있을까. 나만의 목표? 그걸 왜 해야 하는데'


10km 달리기 대회에서 골인지점을 몇 미터 앞에 두고 혼잣말을 계속 내뱉었다. 10km를 1시간 이내 완주하겠다는 목표는 불가능해졌지만 그래도 몇 분이라도 당겨보고 싶었다.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끌며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들어왔다. 기록은 1시간 6분.


페이스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잔뜩 저장해간 달리기 노래들도 그다지 쓸모없었던 것일까.  러닝머신에서 달릴 때는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과 '인피니트'의 '내거 하자'만 들으면 속도가 배가되곤 했다. 그러나 실전의 경쟁 속에서는 그 음악도 그다지 흥겹지는 않았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1년 전에는 10km도 너무 먼 거리였지만, 이젠 10km을 얼마나 빨리 달리는가로 관심이 바뀌었다. 발전했지만 내심 답답하기도 했다.


몇일 지나 대회 기록을 복기해보니 몇가지 아쉬운 점들을 발견했다. 평소에 나는 숨이 차서 힘들 정도의 높은 속도로 달리는 연습을 하지 않았다. 평균 시속 10km로 달리는 연습을 했어야 했는데 8~8.5km 선으로만 연습했다. 러닝머신 위에서 하다보니, 막연하게 대회 나가면 더 빠르게 달리겠지 하는 기대감만 있었을 뿐이다.


또 실전 대회 나가서도 속도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초반에 좀 세게 달리다가 중후반 이후 완전히 퍼져버렸다. 한마디로 주먹구구식 달리기였다.

 

10km 기록.. 후반에 속도가 확 떨어졌다



이전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된 것은 큰 성과지만 나의 달리기는 조깅 수준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걷기 보다 조금 윗단계의 '느린 ' 달리기라고나 할까.


곰곰이 생각하니 달리기, 빨리 달리기에 대한 거부감이 맘 속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걷는 것은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볕이 좋은 날 여기저기 무작정 걷는 걸 매우 좋아한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멈출 줄을 모른다. 여행 가서도 웬만한 거리는 무작정 걸어서 발이 퉁퉁 부었다. 걸으면서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고,  생각이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내게 걷기는 운동 보다는 명상에 가까운 행위다.  



세상을 탐험하는 것은 마음을 탐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걷기는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이자 마음을 여행하는 방법이다(걷기의 인문학 by 레베카 솔닛)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원제는 걷기의 역사)


이처럼 매일 만보, 2만 보 걷다가 어느 날 문득 나는 늘 적당한 범위 내에서만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 닿는 데까지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만 살아간다는 느낌이랄까.  경계를 넘어가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것 같았다. 경계 가까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 그때부터 머릿속 계산기는 숫자를 두들긴다.  이익은 @#$, 손해는  $^&  , 십중팔구 손해니 하지 말자. 또는 이익이 좀 날 수는 있지만 그에 들인 시간 에너지 생각하면 안 하는 게 낫다. 그래서 결론은 늘 안 하는 것이 남는 것이었다.


직장을 그만둔 것도 오랜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었듯이 세상에 내가 유일하고 온전하게 소유한 육체에 대한 경계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달리기였다. 걷기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달려보면 어떨까. 실제로 내 몸을 어느 정도까지 더 단련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달릴 수 있는지, 빨리 달릴 수는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니 남들과 달리 내게 달리기는 처음부터 '조금 더 높은 강도의' 걷기였다고 할까.


달리자고 마음먹었던 처음부터 덜컥 5km 달리기 대회에 신청했다. 5km면 한강 공원 적당히 뛰면 되는 거리지만 참가비 2만 원을 내고 뚝섬을 향했다. 9월 초 아직은 햇볕이 뜨거운 날에 긴장감을 가득 안고 출발했다. 첫 기록은 37분 10초. 비록 5km지만 메달도 받자 감개무량했다. 지하철 타고 돌아오는데 다리도 후들거리는 게 훈장 같았다.


단순한 시작이었지만 대회에서 만난 수많은 러닝 마니아들에게 자극받았다. 지금 가장 힙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레저, 스포츠계가 서핑과 러닝이라고들 한다.  그게 맞는 말인지 내가 생각하던 풍경이 아니었다. 대충 트레이닝복 입고 죽기 살기로 달린 다기보다는 폼나는(?) 러닝복에 즐기면서 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물론 내가 5,10km만 달려봐서 그런지 모르겠다.


특히 탄탄한 근육의 여성들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었다. 오 저 팔근육, 허벅지 갈라지는 것.. 얼마나 뛰면 저렇게 될까.


나는 50 평생 내 몸을 너무나 아껴왔다. 중고등 시절 체육시간엔 서너 번에 한번 꼴로 아프다며 그늘에 앉아 구경만 했다. 피구 시간에는 거의 끝까지 남았다. 아무도 나를 공으로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포의 운동회 때는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상에서 너무 긴장해 넘어진 적도 있다. 출발 총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대학에 가서는 체육시간에 탁구가 하기 싫어 수업 빼먹다가 D학점을 받았다.


왜 그렇게 운동을 싫어했는지 모를 일이다.


녹이 슬어가려고 하는 몸뚱이를 이제 와서 하나씩 써보는 건 재미있다.


난 천성적으로 두붓살인줄 알았으나 조금씩 두부 속에 단단함도 잡혀가고 있다. 건강 검진해보나 배 둘레가 2년 전에 비해 5센티미터 이상 줄어들었다.


풀코스 마라톤 근처에도 못 간 주제지만, 자신감이 좀 생겼다. 원래 겁이 많아 낯선 곳에 혼자 가면 일단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특히 초면인 남성들이 여럿 있으면 그 옆을 지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달리기를 시작하고 나서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성큼 지나가게 됐다. 만약 불상사가 생기면 도망치는 게 최선이겠지만, 뭔가 배에 힘이 팍 들어가게 됐다. 싸움은 못하지만 말로라도 대적은 할 수 있다?는 당당함 같은 것.


자신감, 배짱, 요즘 유행하는 그릿(Grit).  

이런 게 어떻게 생성되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몸을 훈련시켜 근력이 쌓이면 나 자신에 대한 방어능력이 생기고 그게 정신적으로도 탄탄해지는 듯하다.

머리로 자신감을 고양시킬 게 아니라 두발로 거리에 나가 힘을 얻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간 여성들에게 달리기 붐을 일으킨 나이키의 'She runs the night' 이벤트는 이런 여성의 심리를 정확히 들여다봤다. 여성에게 공포의 대상인 밤거리를 달리기 대회로 극복해보는 것이다. 밤을 확보하는 것,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제 자신감이 내 몸 한구석에 쌓이기 시작했으니 달리기도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걷기 - 조깅 - 달리기 - 더 빠르게 달리기로 나아가보고 싶다.





밤의 두려움과 긴장, 해방감을 생생하게 표현한 광고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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