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밥의 계절(feat. 겨울 무)

by 지언 방혜린

아이들의 방학은 엄마의 개학이라고 한다.

밥을 차려주고 치우기가 무섭게 돌아서면 또 밥을 차려야 하는, 이른바 ‘돌밥’의 시즌이 돌아왔다.

방학이면 나 역시 온 신경이 아이들 삼시 세 끼에 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이들이 성장기를 지나며 집 밖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외식에 의존하는 날이 늘어났다. 워낙 집밥을 좋아하는 아이들임을 알기에 처음에는 허전했고,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하루가 갑자기 너무 길어진 것 같아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서서히 적응이 되었다. 이제는 하루 세끼가 아니라, 한 끼의 밥에 혼신의 힘을 다해 정성을 갈아 넣는다.


그런데 올겨울은 조금 다르다.

보통은 학원에서 공부하다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던 아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꼬박꼬박 점심과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처음엔 몰랐다. 언젠가부터 '왜 이렇게 바쁘고 힘들지?' 생각해 보니, 집으로 밥을 먹으러 오는 아들 밥을 챙기느라 분주해진 탓이었다.


오늘도 밥을 먹으러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집으로 온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엄마 갑자기 밥하느라 왜 이렇게 바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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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이 꿈인 아들은 올겨울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을 계획을 세웠다. 학생 신분이라 제작비를 투자받을 곳은 없고, 오롯이 스스로 모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영화 한 편 찍는 데 드는 비용이 한두 푼이 아니다 보니, 밥값이라도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굳이 집으로 밥을 먹으러 오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때는 학원에 비치된 미니 에너지바나 꽈배기 같은 것으로 하루를 버틴 적도 있다고 했다. 아들의 이런 무모함이 어이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졸업한 줄 알았던 방학 시즌의 돌밥을 다시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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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끝난 나의 연극 연습과 겹쳐 밥을 차리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연극도 무사히 마쳤고 어쩌면 이것이 나의 마지막 돌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고 2만 되어도 이렇게 '집에 와서 밥 먹고 싶다'라고 쉽게 올 수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세상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아들이다. 내 품에서 돌밥을 먹을 시간은,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한 끼의 응원 밥상을 차려볼까, 냉장고를 연다.

이유가 무엇이든 엄마 밥이 좋다고 찾아오는 아들에게 대충 차린 밥상을 내주고 싶지는 않다.

아마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이 같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돌밥의 굴레는, 영양사인 나에게도 버겁다.


겨울 제주 무가 눈에 들어왔다.

이 계절의 무는 가을의 잘 익은 배만큼이나 싱싱하고 달다. 수분이 많아 맛이 좋다.

‘무를 먹고 트림이 안 나면 산삼보다 낫다’는 말이 있을 만큼 소화도 잘되고 영양도 풍부하다.

가성비 좋은 무 하나만 사두면 깍두기, 무생채, 무조림, 소고기 뭇국, 무나물로 식탁이 금세 풍성해진다.

우리 아이들도 무로 만든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한다. 실제로 딸아이는 수능 도시락을 2년 연속 소고기 뭇국으로 주문해 싸 보냈다.


어릴 적 우리 외할머니가, 또 그 외할머니의 딸이었던 우리 엄마가 해주던 전라도식 무나물.

오늘의 한 끼는 무나물 비빔밥으로 정했다.

들기름에 마늘을 넣고 무를 볶다가 뚜껑을 덮어 살짝 찌듯이 익힌다. 덜 익히면 딱딱하고, 너무 익히면 설겅해져 맛이 없다. 딱딱하지도 설겅하지도 않은, 설명하기 어려운 그 중간의 식감은 오로지 감으로 맞춘다. (다른 요리의 고수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이렇게 만든 무나물은 뜨거울 때 고추장에 비벼 먹어도 맛있고, 식은 뒤에 먹어도 달큰하고 짭짤하다.

아이들이 어릴 적 방학이면 갈아 놓은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소분해 냉동해 두고 여러 음식에 활용했다. 특히 고기 소보로는 비빔밥 고명으로 이만한 게 없다. 무나물과 고기 소보로를 듬뿍 올린 비빔밥에 참기름을 아끼지 않은 특제 양념장을 더하니, 아들은 오늘도 엄지 척이다.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아도, 시절에는 때가 있다.

남편과 가끔 아이들이 어릴 때가 정말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점점 해줄 수 있는 것들은 줄어들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란 것도 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쪽은 여전히 허전하다.


돌밥이 버겁기는 해도, 기꺼이 이 시간을 안고 간다.

아들의 영화 촬영이 무사히 잘 마무리되길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일의 밥상 메뉴를 또 떠올려 본다.

이 시절이 지나가면, 그때는 이 돌밥마저 그리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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