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익어 가는 밤

때를 안다는 건...

by 지언 방혜린

친정 아빠의 고향은 전남 순천이다. 순천에서도 깊은 산골.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 댁 방문은 새벽 별을 보며 떠나도 저녁달이 떠오른 한밤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로 사정도 지금처럼 좋지 못해 가뜩이나 멀미가 심했던 나에게는 늘 고역의 길이었다.


왜 때문인지 모르지만 몇 번 안 가본 시골 방문은 언제나 한 겨울이었다.

달 빛에 의지해야만 겨우 윤곽이 보이는 깊은 산속의 겨울밤은 숨이 멎을 만큼 추웠다.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군불이 때워진 방으로 뛰어 들어가 몸을 녹이다 잠이 들기 바빴다.

설경 속 단풍과 한옥.png

시골의 아침은 도시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

문을 열고 마루에 나서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냉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던 것이 있었다.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곶감이었다.

사실 친할아버지 댁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 곶감은 유난히도 맛있었다.

그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단감이든, 연시든, 홍시든, 대봉이든 가리지 않고 감을 좋아한다.


아빠는 어릴 적 감을 많이 드시며 자랐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오면 감을 유독 반가워하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덜 익은 감을 하나하나 정성껏 닦아 하얀 항아리에 담아 두고, 익기를 기다리며 단감을 깎아 드셨다.


아빠가 꺼내 주시던 대봉은 늘 정확했다.

주황빛이 충분히 올라, 손으로 살짝 건드리면 터질 듯 말랑한 그 시점.

가장 맛있을 때를 아빠는 늘 알고 계셨다.

그 감은 언제나 기분 좋은 단맛을 품고 있었다.


이제는 시골에 연고가 없는 나에게, 직접 따서 보내온 대봉은 더욱 귀하다.

물론 마트에 가면 쉽게 살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맛과 마음은 같지 않다. 설명할 수 없는 다름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봉감이 사서 먹어지진 않는다.


신기하게도 해마다 시골에서 직접 딴 대봉이 내 손에 닿는다.

올해도 친정집 김장을 도와주러 전주에 다녀온 친구가 대봉을 건네주었다.

집 안에서 가을 과일이 천천히 후숙 해 가는 모습을 보는 일은 그 자체로 흐뭇하고 마음이 풍요롭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이런데, 농사꾼들의 기분을 만 분의 일 정도는 알 것도 같다.

날이 갈수록 감은 주황빛에서 다홍빛으로, 다시 깊은 붉음으로 익어 갔다.

너무 예뻐서, 너무 귀해서 차마 먹지 못하고 아껴두었다.

하루만 더, 딱 하루 더...


그러다 어느 날, 바닥에 주황빛 물이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뒤쪽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감은 이미 썩어가고 있었다.


예뻐서 아끼다 결국 먹지도 못하고 버려진 대봉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아깝고, 속상했다.

그제야 알았다.

기다림이 언제나 미덕은 아니라는 것을.

익을 만큼 익었을 때, 먹어야 할 때, 언제나 적기,

그 때를 아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도, 마음도, 사람 사이의 온기도

모두 제때를 놓치면 돌아오지 않는다.


아빠가 감을 꺼내던 그 정확한 순간처럼,

지금 내 앞에 있는 것들을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겠다고

감 익어 가는 밤, 조용히 다짐해 본다.


이제 하나 남은 감은 잘 익혀 제 때에 먹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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