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저녁이 시작되는 밤
집밥을 좋아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밖에서 밥을 먹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예전만큼 집에서 음식을 할 일이 줄어들었다. 가끔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날이면, 마음이 손보다 먼저 분주해진다.
오랜만에 모였으니 더 맛있게, 더 잘 먹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솜씨를 잔뜩 부려보지만, 그런 날은 꼭 눈 감고도 척척 하던 음식이 유독 맛이 없게 되는 머피의 법칙이 따라온다. 스무 두 해 넘게 주부로 살아왔건만, 아직도 내공이 부족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혼밥 하는 날도 많아졌다. 아침과 점심은 대충 때우기도 하고, 지인들과 브런치를 즐기거나 동네 맛집을 찾아가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녁만큼은 다르다. 나 혼자 먹자고 밥과 국, 메인 반찬에 곁들일 찬까지 차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효율도 떨어지고, 움직임도 귀찮다. 대충 저녁을 먹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렇게 저녁을 대충 때우다 보면 어쩐지 허전함이 남아, 잠들기 직전까지 군것질을 하게 된다.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한 번 편한 맛을 알아버린 몸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런 나를 보며, 예전에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하던 잔소리를 이제는 아이들이 나에게 한다.
“엄마, 차라리 일찍 밥을 먹고 과자를 먹지 마!”
불어난 체중에 전과 다른 모습과 무너진 건강을 걱정하는 진심 어린 타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말들은 하이패스를 통과하듯 귀에 잠깐 스치고 만다.
올해는 유난히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2025년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머리로 계산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이 끝없이 들이닥쳤다. 나는 계산하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으면 하고, 닥치면 하고, 할 수 없을 것 같아도 하고, 할 수 있는 건 기본값으로 해냈다. 마치 끝없이 날아오는 탁구공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떼지 않고 쫓아가듯, 손과 발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시작들이 순차적으로 끝맺음을 하더니 지난 금요일, 남아있던 작업들이 동시에 마침표를 찍었다. 도서관에서 진행한 그림책 만들기 프로젝트가 끝났고, 아홉 달 동안 새벽 독서로 인문학을 공부하며 써 내려간 『엄마의 유산』 공저 원고의 최종 퇴고도 마무리되었다.
내 능력치보다 큰 작업이었다. 숨이 가쁘지 않았다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공부하며 쓰는 글은 버거웠고, 여러 번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밤을 지새운 날들도 많았다.
글은 쓰는 일이지만, 책은 고치는 과정이었다. 부족한 건 키우고, 없는 건 채우고, 넘치는 건 덜어내고, 때로는 내가 쓴 글에서 나 자신을 완전히 지워야 하기도 했다. 『엄마의 유산』에 합류해 두 통의 편지를 쓰는 작업은, 어쩌면 내 삶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끝내고 나니 아쉬움은 남지만, 돌이켜 다시 쓰라 한다면 이보다 더 잘 쓸 자신은 없다. 이제 모든 것은 내 손을 떠났다.
최종 퇴고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밤 9시가 넘었다. 초저녁부터 이어진 작업 때문에 저녁을 먹지 못했더니 허기가 밀려왔다. 배도 고팠지만 마음도 알지못하는 허기가 느껴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나를 위해 밥을 짓고 싶어졌다.
새 밥을 안치고, 미역을 불려 투 뿔 한우를 듬뿍 넣어 미역국을 끓였다. 꼭 미역국이 먹고 싶었다. 또 올리브유에 굵은 대파를 깔고 고등어를 구웠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나 혼자 먹자고 나만을 위해 생선을 구운 건 처음이었다.
가족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많이 해왔지만 정작 나를 위해 생선을 처음 구웠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를 뒤로 미루며 살아왔구나 싶었다. 많은 시작을 했고, 많은 끝을 맺었다. 그런 나를 칭찬해 주는 나를 떠올리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작은 대접 하나인데도 마음이 괜히 든든해졌다. 어쩌면 앞으로의 삶은 이렇게, 아주 작은 것부터 나를 챙기는 일에서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닐까.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날 밤의 나만을 위해 정성껏 지은 따뜻한 밥 한 끼가 오래도록 내 안을 데워줄 것 같다. 누군가의 엄마이기 전에, 나는 온전히 ‘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배운 듯했다. 앞으로는 나를 위한 생선을 더 자주 굽고 싶다. 작은 대접이 쌓여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