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굴'로 완성되는 어른의 입맛

굴을 곁들인 봉골레 파스타

by 지언 방혜린

어린 시절 나는 편식이 심했다.

비위도 약해서 흰 우유조차 비린 맛이 느껴져 잘 먹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가을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종종 밥상 위에 올라오는 ‘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난이도 최상의 음식이었다. 모양도, 색깔도, 냄새도, 맛도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도대체 이걸 왜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5학년쯤이었을까.

딱 이맘때쯤, 하교 후 조별 과제를 하려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

학교 앞에서 우유 대리점을 하던 친구네 집은 대리점 안쪽으로 작은 방이 이어지고,

그 뒤로 안채가 있는 구조였다.

난생처음 들어가 본 우유 대리점은 문을 여는 순간부터 예민한 내 코를 은근히 자극하는 비릿한 우유 냄새로 긴장하게 했다.


바쁜 어머니의 동선과 편리성을 고려해서 그 집은 대리점과 붙어 있는 방에서 주로 생활하고 식사를 하는 듯했다.

급식이 없던 시절, 친구 어머님은 모처럼 놀러 온 딸의 친구인 나를 위해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차려 주셨다. 메뉴는 생굴과 배추쌈, 그리고 굴전. 한상 가득 ‘굴 정식’이었다.


많이 난감했다.

등 뒤로 진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밥상 앞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정말 울고 싶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꾹 참고 젓가락만 깨작대며 식사 시간을 버텼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결국 하루 동안 먹은 것들을 게워 내며 ‘내가 도대체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갖어야만 했다.

언제부터 내가 굴을 먹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 되었으니, 어른이 되면서 어디서 용기가 난 걸까 싶어 스스로도 신기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분명 똑같은데...

물론 굴도 모양도 냄새도 맛도 여전한데, 도대체 나의 무엇이 달라진 걸까?

그때는 입에도 대지 못했던, 평생 먹지 못할 거라 선을 그었던 음식들이 지금은 오히려 ‘찾아서 먹는’ 음식이 되었으니. 고사리나물도, 도라지나물도, 멍게와 해삼도… 쓰면서도 침샘 파크가 폭발하는 저것들은 지금은 매일 먹어도 또 생각나는 최고 애정하는 반찬들이 되었다.


정말 어른의 입맛이란 것이 따로 있는 걸까?

아니면 살아오며 인생의 다양한 맛을 알게 되니, 못생긴 굴 쯤은 아무렇지 않게 삼킬 수 있게 된 것일까?

겹겹이 쌓인 세월 속에서 의도치 않게 맛본 인생의 매운맛, 쓴맛, 짠맛, 단맛을 경험해 보니

굴 쯤은 오히려 사랑스러운 맛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이게 바로 '어른의 맛'인가 보다.


이제 나는 웬만한 건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도가니나 내장류, 발 같은 물컹한 식감의 음식은 어려운데, 언젠가는 그것마저 맛있게 먹게 될 것 같은 막연한 확신이 있다.

날이 쌀쌀해지면서 수산 코너에 산처럼 쌓인 생굴이 강렬한 우윳빛깔로 나와 남편을 유혹한다.

“오늘은 너구나…”

싱싱한 봉지굴을 들고는, 옆에 있던 처음 보는 조개(문어바지락)도 몇 봉 더 담아왔다.

딱히 정한 메뉴는 없었지만, 마트에서 제철 식재료를 마주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 손이 먼저 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늘 편과 고추를 잘게 썰어 올린 생굴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고,

휘리릭 부쳐 뜨끈할 때 한 점씩 먹은 굴전은 사진 찍을 틈도 없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굴과 조개에 화이트 와인을 넣어 만든 봉골레 파스타.

버터와 마늘, 페퍼론치노, 청양고추를 향긋하게 볶아

화이트 와인을 더해 완성한 봉골레 파스타는

늦가을에 먹는 보양식 같은 위로가 있다. 거기에 굴까지 넣어 그 감칠맛이 배가 된다.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조개 특유의 짭조름한 감칠맛이 살아나

화이트 와인과 찰떡궁합을 이룬다.

찬바람 부는 계절, 다시 굴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만들기는 쉽고, 먹는 건 더 쉬운 봉골레 파스타에

싱싱한 굴을 더해 한 그릇 따끈하게 먹으면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몸과 마음이 함께 데워진다.

희안하게 그 계절에 먹어야만 그 맛의 진가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딱 지금 먹는 굴이 바로 그것이다.

더 늦기전에 굴 한 상 가득한 한끼 식사를 추천한다.

늦가을의 식탁 위에서, 우리는 다시 맛으로 이 계절을 따뜻하게 기억할 것이다.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