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ng Juha Oct 29. 2020

서른이 넘어도 익숙해지지 않던(2)

기나긴 이별증후군의 시작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은 언제나 아프고 도무지 적응이 안되지만, 보통은 그 후유증이 몇 년 이상 지속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엄마와의 이별은 그 후유증을 무려 십오 년이나 안겨주었다. 이전 연애는 새로운 연애로 잊히기도 하지만, 새엄마와의 만남을 통해 친엄마와의 기억을 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들이지 않았다.

후유증이 컸던 이유를 추측해보면 이랬다. 엄마와 헤어진 후 엄마를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문채원, 고수 주연의 <민우 씨 오는 날> (강제규 감독, 2014)이라는 단편영화가 있다. 2014년 11월 아시아나 국제 단편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40년 전 납북된 남편 민우 씨를 기다리는, 지금은 치매노인이 되어버린 연희 씨의 이야기를 그린다. 적십자를 통해 북에 남편이 살아있다는 통보를 받고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으로 행하는 차량에 탑승한 연희 씨. 안타깝게도 휴전선 통과 직전 상봉이 무기한 연기되었단 소식이 들려오고, 연희 씨는 자신이 싸온 도시락만이라도 남편에게 전해달라며 버스에서 내려 막무가내로 애원한다.

분단으로 인한 생이별.
십오 년 이상 엄마와 만날 수 없었던 내게 연희의 절절하고도 애달픈 마음은 다름 아닌 내 마음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이혼 직후 얼마 안 되어 밖에서 엄마를 만난 적이 있다. 엄마는 내게 밥도 사주고 옷도 사주었다. 엄마가 사준 옷이 긴팔이었던 걸로 보면 가을이 막 시작되려던 때였던 듯하다. 엄마를 만나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왔던 그날, 아빠는 만남을 허락해준 적이 없다는 듯 불같이 화를 냈고 급기야 엄마가 사준 후드 점퍼를 내다 버렸다. 나는 그런 아빠가 무서워서 벌벌 떨었고 서러움이 북받쳐 엉엉 울었다.

지금의 아빠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테고 나 또한 이제는 희미하게 기억을 더듬을 뿐이지만, 당시의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아버지가 무서웠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같이 살 부모를 선택할 권리가 없었기에, 그러니깐 어쩔 수 없이 아빠와 살아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가 원치 않으면 엄마를 계속 만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엄마와의 생이별이 시작되었고, 이혼의 원인이 엄마에게 있다고 생각한 아빠는 매일 같이 이유 없이 화를 내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져버릴지 모를 아빠를 위한 감정 받이가 되어버렸는데, 감정 받이로 살기엔 너무나도 연약했고, 이유 없이 극단으로 치닫는 아빠의 감정과 말에 끝도 없이 상처 받았고다. 그 결과, 매일 같이 나를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부모를 원망했다. (지금은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잘 살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매일 살아야 할 이유보다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당장은 엄마가 갑자기 부재하여 하나부터 열 가지 엄마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이뤄지지 않던 모든 일상을 스스로 처리하느냐고 정신없었고,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도 납득이 안 되는 데다, 아빠는 그냥 넘어가는 날 없이 매일 화를 내며 나를 죽일 듯한 기세로 몰아붙여 이래저래 죽을 맛이었다. 나는 하기 싫은 집안인들을 억지로 해가며 학교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 밝은 척하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우울한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아침 여섯 시에 억지로 일어나 쌀을 안치고 도시락 반찬거리로 무얼 하면 좋을지 몰라 (다행히 곧 급식이 도입되어 도시락 쌀 일이 사라졌지만) 치킨 너겟 같은 냉동식품을 튀기거나 스팸을 구워 대충 도시락을 싸들고는 학교에 갔다. 교복도 대충 다려 입었고 뭔가 어리바리하고 어벙벙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그전까지는 전교 일등도 했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수업시간에 자거나 딴청을 부리는 데다 어딘지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을 테니, 선생님들은 말은 안 했지만 엄마 없는 아이라는 걸 대번에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친구들이 있었고 학교에 가면 그나마 이별의 슬픔이 잊히곤 했다. 하교 후 친구들과 단골 노래방에 가서 좋아하는 크라잉넛이나  자우림, 허니패밀리의 노래를 실컷 부르고 나면 그렇게 불행하단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여중이었는데 치마 안에 체육복 바지를 받쳐 입고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편에서 말뚝박기를 하거나 운동장에 나가 고무줄을 넘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뭐 그런 잔인한 가사의 노래를 아무 생각 없이 재미나게 부르며 고무줄을 넘었던 기억이 난다. 왈가닥이라기보다는 내성적이긴 했지만, 친구들이랑 노는 걸 좋아하는 여느 여중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집이었고, 집에만 가면 온통 이혼의 상처로 괴로운 아빠에게 갖은 폭언을 들어야 했으므로 나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는 자연스레 밖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1장.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은,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