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ng Juha Nov 09. 2020

서른이 넘어도 익숙해지지 않던 (6)

서른이 넘어도 지워지지 않던

첫 소설을 쓰며 내 삶의 이야기를 오토 픽션 형태로 재구성할 때 내 안의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은 분명하다. 상상으로 써 내려간 글 속에서 꿈에 그리던 엄마를 만났고 그게 어떤 카타르시스와 치유의 힘을 발휘한 건 사실이지만, 고난을 승화시킬 수 있을 만큼 지속적인 효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상 속에서 가능한 일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문득 탐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바닐라 스카이'를 보며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재력과 수려한 외모를 비롯해 모든 것을 갖춘 한 남자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며 모든 것을 잃고 얼굴 또한 화상으로 괴물처럼 변하고 만다. 삶을 송두리째 잃은 그가 이후 LE라는 생명 연장 회사와의 계약을 통해 냉동인간 상태에서 다시금 완벽한 꿈속의 삶을 살게 되는데, 결국 꿈 안에서 '자각몽' 상태에 이르며 꿈에서 깨어나는 동시에 죽게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현실이 아닌 꿈속을 산다는 것.

인생을 기나긴 '일장춘몽'에 비유하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꿈은 꿈이며, 아무리 내 인생에 대해 다시 쓴다고 해도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열다섯에 부모님이 갑자기 헤어지기 전까지의 내 삶은 아주 평탄하고 평범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성적도 좋았고 반장도 여러 번 했고, 중학교 1학년 첫 학기에 전교 1등을 했다. 얼핏 보면 장래가 참 유망해 보이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는데, 엄마가 사라지고 나자 모든 게 바뀌었다. 그간 내 삶을 가능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엄마였던 것이다.

원래 어려움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건가 싶게, 당시가 IMF가 터진 직후라 아빠는 정규직에서 외주업체로 밀려나면서 연봉이 반으로 삭감되는 상황에 내몰려 경제적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연스레 나와 동생은 다니던 종합학원을 더 이상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시키는 대로만 살았지 아무것도 스스로 해본 적이 없는 삶이었기에, 집안일부터 옷과 속옷 등을 사는 일들까지 하나부터 열까지가 전부다 난감했다. 특히 집안일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너무 힘들고 귀찮아서 그 모든 산더미 같은 집안일을 그간 엄마 혼자 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새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하루가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는 그 모든 일들은 순전히 비자발적으로 이뤄졌는데, 하지 않으면 아빠가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도 갑자기 변한 이 모든 상황에 적응이 안 되는 데다, 자식들도 뜻대로 안 되니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기복을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생각이 되긴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모든 게 서툴고 미숙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 당시의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당시의 아빠를 보면 어제와 오늘이 너무나도 다른, 도무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불안정했고 잘못 건드리면 터져버릴 폭탄 같았다.

엄마의 부재보다 견디기 힘든 건 날마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는데, 주변에 그 어떤 어른에게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 나는 방과 후에 집 근처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교회는 늘 열려있었기에, 아빠에게 이유 없이 화를 당하거나 크게 맞불을 놓으며 싸우고는 집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올 때 도피하기 좋은 장소였다. 도피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올라가서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엉엉 울었다.

한 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는지 대학생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집 문에는 디지털 도어록이 달려있지 않았고 열쇠를 늘 챙겨 다녀야 했는데 나는 학교에 갈 때 열쇠를 챙기는 일을 종종 깜빡하곤 했다. 그나마 집에서 회사가 지근거리에 있는 아빠가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서 전화를 걸었는데, 아빠는 또다시 왜 그렇게 덤벙대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때 나는 추위에 떨며 문 앞에 서있었는데 단지 언제 오냐고, 열쇠를 챙기지 못했다고 말할 뿐인 딸에게 그렇게 심하게 화를 내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고 너무나도 서러울 뿐만 아니라 화가 났다. 나는 통화를 마친 뒤 곧장 열쇠집에 전화를 걸어 집의 잠금장치를 뜯어냈고, 열쇠를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디지털 도어록을 설치하고는 집에 들어갔다. 그 후 퇴근해서 돌아온 아빠와 크게 싸웠던 기억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희미하다.

지금은 아빠와 함께 살고 있지 않지만, 함께 사는 동안에는 이렇게 작고 큰 서러운 일들이 케케묵은 먼지처럼 내 안에 쌓여,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불쑥불쑥 일어나 내 삶을 어지럽히곤 했다. 눈물 많은 십 대 중반과 이십 대를 보내고 지금은 아빠도 나도 안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정말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지워지지 않는 아픈 기억들이 있었다.

지금은 꿈결에 어렴풋이 기억날 뿐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일들도 많다. 2016년에 좋은 계기로 집을 나오게 된 뒤로 나는 온갖 나쁜 기억을 상기시키는 요소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기 시작했고, 2019년 10월, 마침내 이십 년 만에 엄마를 만났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한 졸업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