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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2. 2021

오늘의 서술, #17 돌려드리다

#17 돌려드리다


 여든이 넘은 외할머니가 계신다. 친할머니는 학교를 다니기도 전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별로 없다. 한 때 가까이 살았고 친가보다 왕래가 잦아서 그냥 할머니라고 부른다. 엄마도 대단한 분이지만 할머니를 닮아서 그런 건지 할머니도 보통이 아니시다. 지금은 팔도 아프시고 이모, 삼촌들이 하도 뭐라 그래서 집에 계시지만 예전에 시골에 계실 땐 봄엔 봄나물, 가을엔 버섯 따러 산에 다니셨다. 시내로 이사하고 나서도 나물을 손질해서 장에 내다 파셨다. 장터의 할머니를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가끔 장이나 길가에 보면 그런 할머니들 있지 않나. 아무튼 8남매를 길러내신 분이다.

 

 한 7~8년 전인가 서울에서 생활하다 잠시 시골로 쉬러 간 적이 있었다. 엄마랑 같이 봄에는 봄나물 하고 가을엔 버섯 따러 산엘 자주 갔다. 언제 한 번은 할머니가 나물 하러 같이 가자고 시골에 오랜만에 오셨었다. 1시간 거리지만 자주 오시진 않는다. 엄마랑은 험해도 좋은 나물 있는 곳에 가는데, 그 날은 할머니 때문에 가깝고 낮은 곳으로 갔다. 산 아래쪽이라 계곡 물이 흐르는데, 나에겐 사뿐히 건널 수 있을 정도였지만 할머니에겐 그렇지 못했다. 업고 건너겠다고 하니 괜찮다고 중간에 돌 하나 던져 놓으시란다. 장화를 신고 있었어서 넓적한 돌 하나를 계곡 물 중간에 놓고 서서 건너시게 할머니 손을 잡아드렸다. 손도 아니었다. 손을 내밀었는데 내 팔을 잡으셨다. 중간에 돌을 밟는 동시에 내 팔에도 힘이 전해졌다.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악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생각해보니 할머니랑 신체 접촉할 일이 별로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나 가끔 할머니 집에 가서 목욕도 하고 못 볼 꼴 다 보여주고 그랬었지만 커서는 손을 잡는 일 조차도 없었던 듯하다. 설령 그랬다고 해도 맞지 않는 이상 할머니의 힘을 느낄만한 접촉은 없었을 테다. 그 힘이 전해질 때 아주 잠깐이지만 할머니에게 의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살면서 할머니한테 도움만 받았던 듯하다. 시내에 집이 없을 때 할머니 집이 숙소였고 밥은 물론이고 용돈도 많이 주셨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딱히 해드리는 건 없다. 할머니뿐만 아니라 엄마, 형, 동생 모두에게 의지가 된 적이 있나 생각해보면 없었던 듯하다. 막내처럼 받기만 하고 살아왔는데 딱히 돌려준 건 없는 것 같다. 물론 선물을 주거나 안부 전화를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육체를 타고 흐르는 이 느낌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처음 걸음마를 할 때 내 손을 잡아주거나 아플 때 업어 준 사람들. 살과 살이 닿아서 만들어내는 이 감정은 돈이나 말 한마디로는 표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더 바스라지기 전에 가진 게 없으니 몸으로 때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성태 작가의 단편 소설 “이야기를 돌려드리다”라는 작품이 있다. 어렸을 때 귀신 불에 홀려 죽을 고비를 넘기는 비몽사몽의 와중에 어머니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버텼고, 나중에 커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면서 역으로 이야기를 되돌려 준다는 내용이다. 내리사랑을 치사랑으로 돌려준다는 내용인데, 굳이 부모-자식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되돌려주는 일은 꼭 필요하지 않나 싶다. “베를린 천사의 시” 영화 마지막 부분에 전직 천사들에게 감사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천사는 위대한 예술가들(오즈 야스지로, 트뤼포 등 감독이 언급)이고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에게 헌사를 바친다. 이 영화의 감독 빔 밴더스는 되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없어진 사람들이지만 뭐 어떠랴. 기분 좋은 연쇄.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끝인사를 해야 하는데 서로 계속 감사하다 보니 끝이 안나는 코믹한 상황이 벌어진다. 쿨하지 못해 보이고 웃기지만 그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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