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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2. 2021

오늘의 서술, #20 나의 해방

#20 나의 해방


 20대 중후반에 장애인 관련된 일을 했었다. 손발이 불편한 중증 장애인 분들의 식사, 이동 등 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돕는 활동보조 일이었다. 당시 최저임금이 4천원 초반대였는데, 활동보조는 8천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페이가 적지 않았을뿐더러 접해보고 싶어서 선택했던 것인데, 그쪽 분야에 대한 감수성도 길렀고 좋은 어른들도 만났다. 길게 하진 못했지만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보조했던 형이 대학로에 있는 노들야학에 다녔던 터라 나도 자연스레 자주 드나들게 됐다.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즈음에 알게 된 것이 있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내용이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멕시코 원주민이 정부를 대상으로 벌인 운동인데, 비폭력 혁명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유명세를 타서 세계 각지에서 돕고자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한 원주민 여성이 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원주민 입장에서는 지지와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돕는 것이 너의 희생이고, 나에게 베푸는 시혜라면 거절한다. 이 말은 그 이후로 나에게 나침반이 됐다. 당시 활동보조 일을 할 때도 느낀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활동보조인데, 뭘 할 때마다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을 했었다. 그쪽 활동가분들은 그냥 보조해주세요라고 하더라. 생각해보니 돕는 게 아니지 않나. 정부에서 설계한 서비스의 일환으로 임금을 받고 그에 합당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데 말이다. 사회복지사가 독거노인의 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돕는다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건 일이지 돕는 게 아니다. 행위주체가 돕는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지위의 위계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내가 기꺼이 도와준다는 생각. 이는 주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 같다.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기울어진 관계라 하겠다. 도와줬으니 무언가를 요구할 수도 있을 테고, 반대로 도움을 받았으니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고받더라도 매끄럽진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로도 나는 도와준다는 말을 썼겠지만 주의를 기울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일을 하더라도 나의 감정이나 욕망이 마이너스라면 안 하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혁명이라는 말도 그때 접하게 된 개념인데, 세상을 바꾸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때 왜 나는 계속해서 우울할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즐거움이 없진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우울했다. 사람들이 덜 불행했으면 좋겠어서 보고 듣고 공부하고 있는데 정작 내가 불행한 것이다. 목표 지점이 너무 높아서 이르지 못한 공허함 때문이기도 했고, 스스로를 잘 살펴보지 않았던 데에서 기인한 우울이었다. 어느 강의에서 혁명도 즐겁게 해야지 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내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그 후로 영화 쪽 일을 했다. 초반엔 괜찮았지만 그 일도 역시나 힘이 부쳐 결국은 중립국을 하게 된 것. 중립국은 내가 찾은 최적의 공간이고 어떤 지점이다. 영화를 같이 보고 이야기하면서 인간 그리고 공동체 더 나아가 우주의 좋은 지점을 상정해보고 다다르려고 노력해보는 것. 결코 다다르지 못한다 해도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있다. 이것이 나의 해방이다. 중립국에서 당신의 해방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미션 임파서블:폴아웃에서 이단 헌트는 세계를 지키려고 불철주야 뛰어다닌다. 그가 구하려는 사람은 불특정의 무고한 일반인 다수겠지만 결말은 결국 자신의 연인을 구하고 끝이 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다시 그를 향한다. 평화라는 보편적 정의를 수행하더라도 결핍을 해소되지 않거나 나의 해방이 없다면 임팩트가 덜 할 것이다. 원더우먼 1편이 좋았고, 2편이 별로였던 지점은 이것이다. 1편은 사랑을 위한 것이 결국 영웅의 길로 통했다면, 2편에서 영웅의 길은 나의 욕망이나 즐거움을 내려놓는 일로 바뀌어버렸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이런 이야기는 어렸을 때나 통하지 않을까. 조커가 영웅은 아닐지언정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이유는 나의 해방과 너(조커)의 해방이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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