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채식주의자
집에서 요리할 때 쓰려고 대파, 청양고추, 표고버섯을 썰어 얼려놓는다. 특히 대파는 라면 끓여 먹을 때도 넣고, 여기저기 쓰임이 많아 유용하다. 그만큼 빨리 소진이 되는데, 지난 주말 리필해야 할 것 같아 대파 한 단을 샀더랬다. 마음을 다잡고, 씻고 다듬어서 잘게 썰었다. 반쯤 하니 매운 기운과 함께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매번 고통을 머금고 손질하게 된다. 찾아보니 눈물을 피할 방법이 딱히 없는 듯하다.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이 매움에 대해 평소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최근에 어떤 일 때문에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하다 채식에 대한 글을 보게 됐다. 1, 2부로 나누어 어떻게 비건을 지향하게 됐는지에 대해 쓴 꽤 긴 글이었다. 동물권을 강조한 글이었다. 다 읽고 그냥 지나가려고 하다 기어코 댓글을 달았다. 이번 경우도 그렇고, 실제로 채식을 하는 분들과 대화를 할 때 그 이유가 동물이 불쌍하다는 투의 논리를 들면 반박하고 싶어 진다. 동물만 불쌍하고 식물은 안 불쌍하냐고.
파를 썰 때 매운 기운이 올라온다. 미끈한 진물도 나온다. 동물이 도축될 때 비명과 함께 피가 흐르는 것과 비교하면 이것이 크게 다른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 동물, 식물은 다 같은 생명인데, 인간-동물의 관계와 인간-식물의 관계의 차이는 너무 크다. 비슷한 장기를 가지고, 비슷한 행동을 하는 동물에 더 감정이입을 한다면 이건 인간(동물) 중심적인 생명윤리이다. 완벽한 균형을 찾기란 쉽지 않겠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윤리라면 분명 배제되는(식물) 개체가 있게 마련이다. 노동자를 위한 노조가 아니라 정규직을 위한 노조라면 비정규직이 차별받는 것처럼.
식물도 똑같이 대량 재배된다. 질 좋은 고기를 위해 가축에게 각종 영양제, 항생제 등이 투여된다면, 식물은 화학비료와 해충 퇴치를 위한 농약이 뿌려진다. 축산업보다 농업의 면적이 더 넓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는데, 단위 면적당 환경오염이나 생태파괴 수치를 계산한다면 식물 쪽이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다. 경작지 증가로 인해 야생동물의 터전이 좁아져 농가를 습격하는 상황이 잦아졌고, 농약으로 인해 작은 동식물은 막론하고 사람까지도 위험하다. 환경오염과 생태파괴에 있어서 어느 것이 더하고 덜하고를 잘라 말할 수 있는 수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똥 치우는 것만 보고 오염이 더 심하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채식이 능사는 아니란 말이다.
난 채식과 육식이 그냥 취향 차이로만 여겨졌으면 좋겠다. 채식의 윤리적, 합리적 우월성은 따져야 할 점이 많다고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식물을 먹고, 식물은 동물로부터 비롯된 양분으로 자란다. 돌고 돈다. 외형은 빙산의 일각이고, 저 아래는 무한한 생명의 실타래로 엮여있다. 그저 나를 위해 스러진 생명에 대한 고마움이 있다면 채식이건 육식이건 비난의 여지가 없는 생존 방법일 테다. 채식이든 육식이든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필요치 않은 생산(이윤을 위해 기계적으로 생산)과 생산 과정에서 빗어지는 생명윤리 경시와 환경오염이다. 목표를 제대로 찍어야 도착한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도 필요하고.
동물과 식물은 다르다는 말은 말자. 나는 지금 팔다리가 잘리면 죽겠지만, 대파는 밑동만 남겨두고 화분에 심으면 다시 자라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진화론은 수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평(평등)에 대한 이야기라고. 단세포 생물이라도 각자 진화의 끝에 와 있다. 사람이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 스러진다. 다 같은 존귀한 생명이다. 그러니 차별 말고 감사히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