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경박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는 경향성을 뜻하는데, 쉽게 말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좀 덜했던 것 같다. 그때는 미디어, 정보의 생산자가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전달에 있어서 발달이 덜 되어 뭘 보고 들으려면 기다려야 했다. 내 또래 사람들과 이야기하면 많이 공감하는데, 일요일 아침에 디즈니 만화를 보려고 7시에 일어나 TV 앞에 앉아있던 기억이 대표적일 것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라디오에 나온다고 하면 1~2시간 프로그램을 통으로 들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다른 가수의 노래도 듣게 된다.
요즘은 매체가 너무 많기도 하고 사용자의 편의에 더 치중하다 보니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없어진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기다림이란 까닭 없이 마냥 참아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앞서 말한 라디오의 상황처럼 기다리는 시간에 만날 수도 있을 새로운 것 즉, 미지의 것이 담겨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상 매체를 다루는 유튜브도 인공지능이 내가 좋아할 것들을 추천해주고, 넷플릭스나 왓챠 등 많은 서비스들이 사용자 기반의 추천 리스트를 제공한다. 이러면 좋아하는 것만 보게 된다. 확증편향이다.
세상살이 피곤해 죽겠는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게 뭐 어때라고 하겠지만, 계속 그러다 보면 외골수가 되는 것 같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람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경박해진다는 표현을 쓰더라. 예를 들어 나의 정치적 성향이 진보인데, 어떤 사안이나 선택에 있어서 너무 그쪽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선택이 빨라진다는 것이다. 빠른 건 나쁠 게 없겠지만 옳지 않은 선택도 자기편이라고 손을 들어준다는 것. 저쪽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그쪽이 더 괜찮다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건강한 삶을 살 텐데 경박해지면 너도 나도 썩어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꽤 오래 그리 살아왔던 것 같다.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나오지 않는 이상 플레이리스트는 10여 년이 넘게 바뀌지 않았고, 페이스북의 친구들은 다 같은 편이었다. 좋아하는 것들만 보다 보니 비판적 사고를 할 겨를 도 없고, 인내는 저 뒤춤으로 넣어두게 되었다. 다른 것은 보기도 싫어졌고, 더 역한 것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변화를 주고 있는데 쉽지는 않다.
일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건축가가 나와 광장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거기서 시위를 하고 운동을 하고 뭔가 정치적인 것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광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것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했다. 거기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타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 분위기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더라. 확증편향의 뉘앙스는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나와 만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가증식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든, 생각이나 신념 혹은 취향 모두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나와 고만고만한 나끼리 사람 하나 들어가기 벅찬 밀실에 갇혀 사는 것 같다. 굳게 닫혀버린 밀실이 모인다고 해서 광장이 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활짝 열어젖히진 못하더라도 문틈을 조금 열어두자. 귀한 손님이 찾아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