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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2. 2021

오늘의 서술, #2 소설

#2 소설

 소설을 좋아한다. 읽는 것도 좋지만 소설(小說)이라는 단어의 어감이나 한자풀이도 맘에 든다. 역사 속에나 등장하는 큰 사람이나 한 시대를 지배했던 왕의 굵직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대의 귀퉁이에 존재는 하지만 있어도 모를, 그래서 꾸며내도 상관없는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 이것이 내가 정의하는 소설의 의미이며 주로 읽는 소설들도 이러한 조건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왕이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쥐락펴락하는 이야기와 한 사람이 자신의 가정 혹은 소중한 사람의 안위를 보듬는 이야기가 스케일의 차이 말고 뭐가 다를 게 있느냐는 질문이 있을 순 있다. 같은 사람의 일이지만 왕의 이야기에서는 묵음 처리되는 무수한 개인들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큰 이야기에서는 생략될 수밖에 없는 작은(사람들) 이야기가 있고, 이 차이는 작지 않다고 생각하는 바이며, 실존주의적인 측면에서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좋아한다. 작은 사람/이야기라 표현한다고 해서 그들의 선택이나 행동 그리고 고민이 오늘 뭐 먹을까와 같은 소소하고 일상적인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소설은 눈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겨울이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폭폭한 느낌이 든다. 24절기 중 소설이 있어서 그런지 모를 일이지만. 중립국을 열기 전 이름으로 생각해두었던 몇몇 후보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이야기가 아닌 나라를 세우고 한 나라의 수장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소설이라는 단어는 좋다.


 첫 소설은 기억나지 않는다. 허나 정말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렸지만 읽다 만 소설은 기억난다. 존 그리샴의 법정소설 ‘레인메이커’인데, 지금도 라디오에서 소설 홍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 FM을 듣고 있으면 양귀자의 모순이나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등 광고가 장난이 아니었다. 멘트 중 정의에 꽂혀 빌렸는데 책이 굉장히 두꺼웠다. 얼마 읽지도 못하고 반납은 했지만, 그 이후로 변호사를 꿈꾸게 되었다. 건축가로 금세 바뀌었지만… 그렇게 한참을 잊고 있다가 작년이었나 올해였나 중립국에서 영화화된 레인메이커를 보게 됐다. 배우도 맷 데이먼에 감독은 무려 대부의 코폴라! 풋내기 변호사가 대형 보험사를 상대로 이기는 내용인데, 재미있었다. 소설이 아닌 영화지만 20여 년 전에 읽다 만 소설을 개운하게 끝낸 느낌이었다.


 나는 잘 살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다. 단순한 논리일지 모르겠지만, 경제활동을 포함한 인간의 많은 행동은 잘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조건보다 정신적 조건(감정이나 관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인데, 소설을 읽으면 나의 상황을 디테일하게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비슷한 상황이 아니라면 미리 시뮬레이션해볼 수도 있고. 어려움이나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잘 되어 있다면 잘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멀리 더 많이 보기 위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지만, 그만큼 사람들과는 멀어질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낮은 곳에서 한 명 한 명을 만날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일이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 ‘레인메이커’의 첫 부분 내레이션

아버지는 변호사를 싫어했다

평생 그랬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술을 마시면 어머니를 팼다

나도 두드려 맞았다

아버지를 열 받게 하려고

변호사가 됐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건 아니다

50-60년대 인권 변호사에 대해 읽고

그들의 활약에 매료돼

그 후로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들을 해냈고

변호사의 평판을 끌어올렸다

그래서 난 법대에 갔다

아버지는 열 받았지만

어딜 갔든 열 받았을 거다

1학년 때 아버진 술에 취해

다니던 회사에서 만든

사다리에서 떨어졌는데

누구를 먼저 고소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몇 달 후에 죽었다

내 동창 중 몇 명은 졸업 후

최고의 법률 회사로 간다

대부분 집안 연줄로 가는 거다

내 연줄은 학비를 벌려고

3년간 일한 술집 사장이 전부다

난 아직도 어두운 세상에

정의의 빛을 밝히는 게 꿈이다

그래서 직장이 필요하다

아주 절실하게


영화 ‘레인메이커’의 뒷부분 내레이션

모든 변호사는 매 사건마다 적어도 한 번쯤은

뜻하지 않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다

자주 넘게 되면 선은 영영 사라지고

또 하나의 변호사 농담거리가 될 뿐이다

구정물 속 상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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