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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립국 Apr 23. 2021

오늘의 서술, #29 하산

#29 하산



 가끔 죽음을 생각해본다. 그것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지 모르겠지만 막연하게 내가 없어지는 상상을 하면 허망함이 물밀 듯 밀려온다. 몸이 갑자기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남겨진 사람에 대한 감정이나 후회 같은 것들은 한참 후에나 생각난다. 사고로 죽는 일은 실제로 그럴 것 같지만 노환으로 죽는 것도 비슷한 느낌일까?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20대 중반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노환이었고, 아버지는 사고였다. 할머니 때가 기억에 남는다. 학교를 다니기도 전이었어서 죽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어느 날 할머니가 방 안에 고이 누워 있는데, 눈 주위에 긴 침이 꽂혀 있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작은 마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장례식이 거하게 이뤄졌다. 오히려 아는 사람들끼리만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에서 마지막으로 꽃상여를 매는 큰 식이었다. 감정이 어떠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시청각적으로 굉장히 화려했다는 것만 남아있다. 아주 오래된 일이라 다들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일들이 집에서 이뤄졌다. 그때는 상조회사가 없을 때니까.

 

 그에 반해 아버지의 죽음은 나이를 많이 먹고 겪어서 모든 감정을 다 기억하고 있다. 노환이 아니었기에 전반적으로 침울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집이 아닌 병원이나 장례식장을 통해 진행됐다. 두 분 다 집에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마지막은 병원 영안실 안에서 누워있는 모습이었고, 할머니는 방 안에 누워 있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병원과 집. 여러 상황이 복잡하게 엮인 결과겠지만 하나의 죽음은 집에서, 또 하나의 죽음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경험하게 됐다.

 

 꽤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스탑드 온 트랙”이라는 북유럽 영화가 있다. 아이를 둔 아버지가 병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하면서 버틸지 아니면 치료를 받더라도 집에서 할지 고민하다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가족이 다 있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죽는 건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죽음이 외주화 되고 있는 건 아닐까. 편리함은 있겠지만, 너무 멀리 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 버리진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나에게 혹은 옆 사람에게 결국은 일어나게 될 일인 죽음이 천 길 낭떠러지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병원에 가야만 하고, 삶에선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초연해질 수는 없을 테다.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죽는다는 것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랐던 길을 내려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사자도 옆에서 지켜주는 이들도 마음을 달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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