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길 듣다 보니 다 해야 할 것 같은데 반드시 필요한 것만 하기,
퇴사하고 다음 회사로 가기 전까지 쉬는 시간이 조금 생겼다. 올 초 퇴직을 준비하는 동안엔 계획에 없던 일을 하게 됐는데 무려 결혼 준비!! 뚜둥-
생각지도 못하게 시작한 결혼 준비는 무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엄마가 플래너보다 더 꼼꼼하고 보는 눈이 좋으셔서 플래너 없이 준비하고 있는데, 네이버의 결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인 카페에 가입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던 중 정말 다양한 사람이, 경우가 많다는 걸 알았다. 그 와중에 내가 하는 일을 일반인에게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가 떠올라서 무릎을 탁 치며 강의에 써먹겠다며 적어봄. (아무래도 직업병인 듯)
이름하여 <해야 할 것 같은 건 많은데 그 와중에 필요 없는 건 쳐내고 꼭 필요한 것만 하기>
결혼 준비하기
기혼자가 아닌 사람도 잘 알겠지만, 결혼이라는 이벤트는 전문가가 아니어도 아무나 자기 경험을 쏟아내며 말을 얹기 좋은 스마트폰의 UX나 UI만큼이나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벤트다. 본인이 결혼을 했거나(혹은 두 번 했거나) 결혼을 준비하고 있거나, 내 언니오빠누나동생친구엄친딸엄친아가 결혼했다거나, 친구딸아들조카가 했다거나....
암튼 진짜 준비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디테일은 모르더라도 주워들은 썰만 살짝 풀어도 누구나 이야기할 거리가 있는 이벤트가 바로 결혼이다.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는 이벤트의 핵심 사용자는 <너>와 <나> 두 사람이다.
물론 결혼을 혼자서 할 수 있다면야 <너>라는 존재를 크게 생각 안 해도 됐겠지만, 결혼은 반드시 <너>와 <나> 둘이 있어야 이루어진다는 특성을 보인다. 따라서 <너>와 <나> 두 사람이 핵심 사용자로서 서로의 가치를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 결과에 따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의 목록이 약간 달라진다.
이때 만약 핵심 사용자인 <너>와 <나>의 취향이 극과 극이면 ‘꼭 필요한 것’ 목록에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것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면 조율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에너지 소모가 커지는 문제가 발생하지만 어쨌든 조율이 끝나야지만 결혼이라는 이벤트가 진행되므로 이 시간은 제품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법률검토 기간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너>와 <나>가 첫 번째 난관을 무사히 넘기면 만들어지는 ‘꼭 필요한 것’은 MVP(Minimum Viable Product)에 해당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핵심 사용자인 <너>와 <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결혼에는 핵심 사용자인 <너>와 <나> 외에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핵심 사용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객도 아닌 일종의 주요 사용자에 해당하는 <양가 부모님>이 존재한다. 이들은 제품에 실질적인 돈을 대는 클라이언트에 해당하는 역할을 맡을 때가 많기 때문에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런 이유로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이 나질 않는다. (우리가 회사에서 제품을 만들 때를 떠올려보자. 위에서 내리꽂는 요구사항이 끝이 난 적이 있던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핵심 사용자를 누구로/어디까지 둘 건지 명확히 해야 하는 부분이다. <양가 부모님>을 결혼의 핵심 사용자인 <너>와 <나> 만큼 우선순위를 높여줄 것인지 아닌지 선택해야 한다. (만약 핵심 사용자의 범위가 넓어진다면 맨 처음 <너>와 <나>가 거쳤던 그 난관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아, 그리고 <너>, <나>, <양가 부모님> 뒤에는 친구나 친척, 가족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런저런 말을 얹는 <관객>이 있는데, 그들의 말이 궁극적으로 <너>와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오게 되면 ‘딱히 필요를 느끼진 않지만, 남들 다 하니까 하면 좋겠다는 것’ 목록으로 추가된다. 그러면 처음에 <너>와 <나> 둘이 합의하여 만들었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목록과 섞여버리면서 도대체 누구에게 필요하고 누굴 위해 하는 건지, <너>와 <나>가 즐거운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애초에 이 과정의 핵심 사용자인 <너>와 <나>는 힘들기만 한 결혼 준비 과정이 진행된다. 이는 마치 '도대체 이건 누가 쓰길래!!' 같은 맥락 없는 기능이 혼재하는 스마트폰 같은 모양새와 같다.
자, 이제 그렇게 늘어난 ‘딱히 필요를 느끼진 않지만, 남들 다 하니까 하면 좋겠다는 것’ 목록을 다시 핵심 사용자인 <너>와 <나>에서 만들어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목록과 함께 놓고 살펴보자. 분명 처음에 만들었던 목록보다 훨씬 늘어났을 텐데, 늘어난 것 중엔 '<너>와 <나>가 결혼 준비를 처음 해본 거라 잘 몰라서 못 넣었지만 분명 필요했던 것'도 있을 게다. 바로 이 부분이 스프린트를 돌릴 때 '회고'를 통해 '아, 이거 우리가 해야 했는데 미처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 이다음 스프린트에 해야지!' 항목 같은 것이다.
그럼 나머지는?
다시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돌아가서,
이벤트를 준비하는 과정이든 서비스나 제품을 만드는 과정이든 가장 중요한 건 핵심 사용자를 분명히 하고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잊지 않는 일인 것 같다. 그 핵심 사용자에게서 비롯된 '꼭 필요한 것' 목록은 우리가 일이 끝날 때까지 중심이 되는,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그 기준이 <너>와 <나>에서 비롯되었고, <너>와 <나>가 맨 처음 '꼭 필요한 것' 목록을 작성할 때 어떤 맥락에서 만들었는지를 서로가, 그리고 주요 사용자인 <양가 부모님>에게까지 잘 공유하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놀고 있는 와중에 이런 거나 생각하다니 직업병이지만 나 좀 짱인 듯-
#사용자스토리맵만들기 #customerjour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