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언제부턴가 내 방에 이 책이 놓여 있었다. 서재가 있어서 최근에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방에 책을 거의 두지 않는다. 읽으려고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했던 기억은 있는데, 도대체 언제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찾아보니 구매일은 2016년 10월 22일이었다.
가끔 책을 한 번에 왕창 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대체로 어떤 목적에서 사는 것이라 함께 구매한 목록을 보면 내가 저 때 상태가 어땠는지, 뭘 원했는지 같은 큰 맥락을 유추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개인주의자 선언과 김영사에서 출판한 지식인 마을 시리즈 여러 권을 구매했더라.
'난 이 책을 왜 샀던 거지.. 저 책들이랑 무슨 관련이 있길래...' 한참을 생각하다 문득 떠올랐다.
아, 휴직했던 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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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삼 일 만에 다 읽었다. 전체적으로 잔잔한 느낌이었는데, 어느 날은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날도 있었다. 이전의 어떤 기억이나 경험과 연결하려는 노력의 끝에 그런 감정이 생겨났겠거니- 했다.
2018년 2월 두 번째 책은 이렇게 끝-
2024년 독서모임 시즌 2의 첫 번째 책은 이걸로 정했다.
내가 이 책을 좋아했던, 그리고 독서 모임의 첫 번째 책으로 정했던 이유는 6년 전과 여전히 같다.
인간의 인생을 길게 펼쳐내어 보면 하일라이트 쳐지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그럼 그런 날은 쓸모 없는건가? 난 오히려 그런 매우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날, 시간을 잘 보내고 스스로 의미있게 보내는 일이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과연 돈을 많이 벌었거나, 높은 지위에 오른 것만이 성공한 삶이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 상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뉴스에 오르내리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소소하고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간다. 그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삶, 행복한 삶.
그건 어디까지나 각자가 정의내리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기 나름 아닐까.
이러한 단편적인 만남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단편적인 인생의 기록이 그대로 그 사람의 인생이라고 한다거나 그대로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운명이라고 일반화하고 전체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 p.19 인생은 단편적인 것이 모여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이든 다양한 '서사'를 내면에 담고 있다. 그 평범함, 보통다움, '아무것도 아님'과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마구 쥐어뜯기는 것 같다. ...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숨어 있는 인생의 이야기가 구술 채록의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조차 뜻하지 않게 이야기가 늘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이런 이야기가 딱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니지 싶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있고, 우리는 언제나 그것과 접촉할 수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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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지만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남겨진다. 낭만적인 이야기, 또는 향수에 잠긴 이야기에 깃든 하나의 패턴은 아마도 이것이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이른바 유품이다. 두 사람이 평범하게 살고 있을 때 그것은 타자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다. 특별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전적으로 평범한 일상이지만, 화자가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일상적이고 별 뜻 없는 대화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 가장 소중한 유물로 변한다.
누군가 끼고 있던 아무런 특징도 없는 반지가 누군가 죽은 다음에 가장 소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바뀌는 것처럼, 이 두 사람의 무심한 일상적인 대화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두 사람이 이제는 이 세상에 없고, 그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혀 의미가 없는 범용한 존재가 어느 비극이나 상싱을 계기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이것이 이 드라마의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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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이야기는 내가 꾸며 낸 이야기다. 전부 거짓이다.
그러나 더욱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실은 그것이 돌아왔다고 해서, 그 대화에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낭만적인 것, 노스탤지어인 것을 철저하게 추구해 가면, 가장 낭만적이지 않은 것, 가장 노스탤지어가 아닌 것에 다다른다. 철저하게 무가치한 것이 어떤 비극에 의해 철저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변용되는 것이 낭만이라면, 가장 낭만적인 것은 그러한 비극조차 일으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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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단편적인 인생에는 이모티콘을 많이 쓴 단편적인 서사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 p.28-42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그 때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도리어 이야기에 떠밀려 움직이며, 이야기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야기가 자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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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참으로 가슴 쓰라린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 자체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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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 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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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도 강렬한 서사와 우리가 평소에 나누는 이야기 사이에 그토록 대단한 격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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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자신을 만들어 내고 자신의 기반을 이루는 서사는 단 하나가 아니다. 애초에 자기라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의 집합이다. 세계에는 가벼운 것이나 무거운 것, 단순한 것이나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사가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자기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자기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모아 세계 자체를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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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이나 세계는 서사를 이야기할 뿐 아니라 서사에 의해 만들어진다.
서사는 '절대로 벗을 수 없는 안경'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서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할 수 없다. 그러나 서사가 중단되어 찢겨 나가 모순을 일으킬 때, 서사의 바깥쪽에 있는 '무언가'가 어렴풋이 이쪽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 p.56-63 이야기의 바깥에서
있을 곳이 문제로 떠오르는 때는 반드시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든지, 아니면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때든지, 둘 중 하나다. 따라서 있을 곳은 늘 반드시, 부정적인 형식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라면, 있을 곳이라는 문제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조차 없다. 있을 곳이 문제가 되는 때는 반드시 그것이 '없을' 때에 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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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어딘가로 이동하지 않더라도 '출구'를 찾아내는 일은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 '바깥을 향해 열려있는 '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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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있는 곳을 떠나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강렬한 해방감과 자유의 감각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동시에 고독이나 불안도 동반할 때가 많다. 따라서 우리는 때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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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는 없는 어딘가를 꿈꾸며 창이나 문을 열고 나간다.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돌아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여행 도중에는, 더 이상 나아가면 두 번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점이 있다. 그런 경험이 때로 찾아온다.
p.80-91 나가는 것과 돌아오는 것
나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심한 무정자증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가 흐느껴울면서 병원의 검사 결과를 갖고 왔다. 그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안전한 사내였잖나. 그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더 실컷 놀 수 있었는데'하고 딴 정신을 팔았다.
아니, 그게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난 안전한 사내였잖아. 그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기 전에 더 실컷 놀 수 있었는데 하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무의식적으로, 순간적으로, 난 그 사실을 이야깃거리로 삼음으로써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물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마음속에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꼭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해도 자기 안에서 스스로를 향해 웃음으로써 어찌 해 볼 도리 없는 자기 자신과 어떻게든 대면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만 통하는, 부질없는, 한순간의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 한순간을 이어 붙임으로써 어떻게든 인생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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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갖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무언가로 상처를 입었을 때, 무언가에 상처를 입혔을 때, 사람은 우선 입을 다문다. 꾹 참으면서 견딘다.
그러나 한편 웃을 수도 있다.
마음이 아플 때의 반사적인 웃음도, 당사자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는 자학적인 웃음도, 나는 둘 다 인간의 자유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는 무한한 가능성이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실현 같은, 말만 그럴듯한 것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렇게 거대하고 용장한 서사 속에 없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가장 괴로울 때 웃을 자유가 있다. 가장 힘든 상황 한복판에서조차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버티고 있는 꽉 막힌 현실의 끝자락에서, 딱 한 가지뿐인 무언가가 남겨져 그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이다.
p.94-103 웃음과 자유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이를테면 행복을 믿은 탓에 행복에서 길을 벗어나 버렸을 때는 이미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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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런 까닭에 행복의 이미지란 우리를 옭아매는 사실과 같아지는 때가 있다. 동성애자, 독신, 아이가 없는 사람 등 가족이나 결혼에 관해서만 보더라도 이렇게 다양한 삶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직업이나 취미 등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취하는 온갖 것에는 무언가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이 정해져 있고 구별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몇몇 사고방식으로 나뉜다. 아마 그중에서도 가장 올바른 것은,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좋다'고 생각하기를 그만두어 버리는 것이다. 또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폭력으로 작용하고 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 생각을 말할 때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는 어법이 아니라 '그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하는 어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개인적으로 나만의 '좋은 것'이라면 누구를 상처 입힐 일도 없다. 거기에는 원래부터 나 이외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를 배제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은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들과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구별을 자동적으로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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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도 술자리에서 졸업생 여성이 남자친구의 수입이 너무 적어서 결혼할 수 없다고 울기 시작했다. 난 그때 단순하게 '꼭 결혼식을 해야만 할까'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순수하게 그런 것을 동경하고, 그런 행복을 원하는 여성이 눈앞에서 울고 있는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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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여성은 젊고 예쁘고 귀여워야 한다는, 흔하디 흔한 규범이 있다. 그것은 우리는 옭아매는 족쇄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폭력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예쁘게 치장하는 것 자체를 폭력과 등치시켜 부정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여기에 한 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멋을 내거나 화장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자가 또는 사회 전체가 강요하는 것을 부정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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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 이르러 난 정말이지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개성적일까? 우리는 진정으로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규범의 폭력을 일제히 떨쳐 버릴 수 있을 만큼 탄탄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갖고 있을까?
도리어 우리는 그렇게까지 개성적인 옷을 입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예쁘장하고 귀여운 옷을 입고, 일반적으로 예쁘장하고 귀엽다는 말을 모든 사람에게 듣고 싶은 것은 아닐까? 개성적이라는 것은 고독하다. 우리는 그 고독을 견딜 수 있을까?
- p.106-116 손바닥의 스위치
내 안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의 감각을 계속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안에서 10년이란 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내가 10년 동안 줄곧 무언가의 감각을 계속 느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 감각을 계속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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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다름 아닌 '이 사람' 안에서 자기 것과는 다른 기나긴 시간이 흘러왔다는 사실이다. 특히 '홍콩'의 경우에는 정말 절실하게 사람이란 것 안에 흐르는 시간에 대해, 그리고 그 시간의 1초 1초를 '계속 느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 눈앞에서 어눌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남성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10년이라는 세월의 길이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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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10년이라는 세월은 내 안에서도 흘렀다. ... 우리는 물론 10년이라는 시간을 전혀 '공유'하지 못한다. .. 그러나 나는 그의 10년이 나의 10년이기도 했다는 단지 그 점이 나와 그 사이에 무언가 '대화'를, 언어에도 감정에도 의하지 않는 무음의 대화를 성립시켜 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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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것이 고통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름 아닌 바로 나에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이라는 '구조'를, 우리는 일체의 감동이나 감정도 빼고,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 안에서 각자가 고독하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각자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야말로 우리라는 것을 조용하게 나눌 수 있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이 있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시간'이란 것도 있다는 단적인 사실을, 서로 알고 있다.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 p.130-141 실유카 나무에 흐르는 시간
벽을 넘는다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벽을 넘지 않는다면, 그 여학생을 비롯해 우리는 우리를 비켜 주는 벽 바깥쪽에 사는 사람들과 영원히 만나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도 진정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우리 다수자들은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방벽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그 때문에 벽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벽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벽에 의해 비호를 받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국가에 의해 가정이나 동료로부터 찢겨 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을 국가와 떼어 내어 생각하는 일이 허용된다. 다양한 '특권'에 의해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활에도 개인적인 고민이나 고통은 한없이 존재하지만, 다수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로서 그것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렇게 벽에 의해 보호받으며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우리의 마음은 벽 바깥의 타자에 대한 까닭 없는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리고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은 지극히 쉽사리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변한다.
- p.172-182 축제와 망설임
우리가 양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올바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본 올바름이다. 이것이 타자에게도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속임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사이비 의학에 빠져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우리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도저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이라도, 그 상황은 그 사람에게 '진정한' 자기 자리일지도 모른다.
이러할 때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올바름을 휘두르는 것은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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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 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에밀 뒤르템은 우리가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은 '사회'라고 말했다. 기도가 가 닿을지 아닐지는 '사회'가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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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언어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올바름이나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제발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원한다. 사회가 그것을 들어줄지 어떻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를 향해 언어를 계속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또는 적어도 그것만큼은 할 수 있다.
- p.196-207 바다의 저편에서
얼마 전부터 엄마가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신다. 저녁 먹으면서 오늘 본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주로 이런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요'
'남편이 술을 너무 마셔서 애가 집을 나갔어요'
'결혼은 어떤 사람이랑 해야 하나요'
듣다 보면 대부분 비슷한 주제의, 소소하고, 별거 아닌, 그저 그런 것들이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싶으면서 또 '이런 게 사람 사는 거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사람들 걱정하며 사는 건 다 별거 아닌 거고, 그런 게 사람 사는 건데 난 뭐 그리 대단한 걸 하겠다고 그런 게 대수롭지 않다고 하면서 살았던 걸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