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미진 Mijin Baek Feb 22. 2018

녹을 것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드는 그 마음에 대하여

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회사에 아끼는 후배가 있다. 신입사원 시절부터 봐온 친구인데, 좋아하는 장르는 달라도 우리 둘 다 책 읽는 것을 즐겨서 서로 읽는 책이 뭔지 공유하거나 빌려주기도 하고, 선물하기도 한다.


지난달엔 갑자기 시집 두 권을 내밀었다.

"제가 요새 읽는 건데... 매일 아침 시 한 편씩 읽는 데 좋더라고요."하며 건넨 시집을 회사에 두고 한 편씩 꺼내 읽곤 했다. "흠.. 시는 잘 모르겠네." 하며-


그 친구가 며칠 전 인스타에 쌓아놓은 책 사진을 올렸다. 그중 저 책은 어떻냐고 물었던 것이 <우리가 녹는 온도>였다. 제목과 책 표지 색깔이 맘에 들었다.

지난 주말, 밖에서 만난 그녀가 '이 책들이 좋았어요' 하며 책 세 권을 건넸다.

제일 먼저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몇 장 넘기지 않아 맘에 쏙 드는 문장이 나왔다.

지는 해를 따라서 돌아가던 중에는 그대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대도 나를 떠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
- 박준 시 <용산 가는 길-청파동 1> 중에서


'박준 시'라고 적힌 것을 보고는 문득, 이 친구가 지난달에 내게 선물했던 시집에 있던 시였다는 게 기억났다. '아, 이 책을 읽다가 그 시집들을 샀나보구나' 했다.




난 에세이나 소설은 잘 읽지 않는다. 아, 대학 때까지는 소설도 정말 많이 읽었다. 그런데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가면서 내 부족함에 대한 간절함 탓이었는지 전공 책이 아닌 것을 보고 있으면 왠지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기 시작한 건 몇 달도 채 되지 않는다.

'이렇게 재밌는걸. 그동안 난 왜 그렇게 팍팍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회고도 반성도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에 빠지고, 이윽고 흐르는 물처럼 서로에게 스며든다. 아끼고 쓰다듬고 조금씩 서로의 일상과 꿈을 나누어 가진다. 손목을 하나의 투명한 끈으로 묶는다.
  처음에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다. 팽팽히 조여진 하나의 끈이 서로 다른 두 피부를 조금씩 파고 들어가는 것은 모르는 척한다.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함 뼘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어릴 때 만나 오래도록 한 사람 곁을 지켜온 연인 사이에는 종종 그 사실이 망각되는 것도 같다. 한쪽 손목에 상처가 생긴 것을, 상처가 깊어지는 것을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상처를 들여다보려면 끈을 풀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려워서 그 정도는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금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견딜 수 있다고,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어느 날, 한 사람이 문득 벌겋게 부푼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 보는 때가 온다. 내 살갗이 아닌 것 같아서, 낯설어서 놀란다.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이야기다.
  스무 살 때 알았던 그와는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게 되었다. 물론 '내 쪽에서 볼 때 갑자기'였다. 무슨 일인가로 의견 충돌이 있고 난 뒤였다. 웬일로 그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패턴이 깨졌다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다. 어떤 끝은 그토록 간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화를 쌓아왔는지 말하지 않았다. 사실은 지금껏 괜찮지 않은 때가 종종 있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괜찮다'는 형용사에 집착하는 인간이 되어갔다.
...
  모든 이별은 크고 작은 후유증을 남긴다. 그뒤로 나는 어떤 관계든 매사에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곁에는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다. 그 곁에서 마음을 푹 놓아버릴까봐. 마음을 푹 놔버리곤 부지불식간에 상대가 괜찮지 않은 일을 하게 될까봐 먼저 몸을 사리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더 있다. 나 역시 '괜찮아'를 발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것. 상처를 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괜찮다고 말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해 미묘한 위로가 되었다.
...
  실행에 옮긴 적도 있다. 방법은 쉽다. 상대방이 잘못했을 때, 관대하게 말하면 된다.
  괜찮아.

- p.40-44 괜찮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


  상대방이 싫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 옆의 내가 싫어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옆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할 때, 혹은 그 모습이 스스로도 생각지 못하던 방향으로 변해갈 때 우리는 이별을 결심한다.
  일상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일 년 후의 삶이 까마득한 암흑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게 모두 '그 사람과의 관계' 탓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내 탓' 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과는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과 이별한다. 가장 가까운 옆 사람과 헤어지면 내가 조금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너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어'라는 말과 '미안해'라는 말 사이에 생략된 문장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나는 나를 더 사랑해' 혹은 '나는 나를 더 사랑하고 싶어'.

- p.93-96 지상의 유일한 방


  2015년 만들어진 미국의 애니메이션 <릴리와 눈사람>(Lily & the Snowman)은 이 분 남짓의 아주 짧은 단편이다. 거기엔 겨울이 지날 때마다 냉장고에 눈사람을 넣어두는 아이가 나온다. 눈사람과의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녀 릴리는 소중한 존재를 녹게 놔두는 대신 가두는 쪽을 택한다.
...
  자라는 동안 릴리는 창고의 냉장고 안에 눈사람을 보관해두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잊어간다. 바쁘게 사는, 보통의 어른이 되어버린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릴리는 문득 어릴 적의 눈사람이 아직 그 안에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 마지막은 오래 갇혀 있던 눈사람을 마당에 꺼내놓고 함께 노는 장면이다. 옆에는 릴리와 꼭 닮은 어린 딸도 있다.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이제 릴리는 '되찾은'걸까, 오래전 잃어버린 그 조그맣고 반짝이는 것을.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끝나지만 이 서사의 마지막이 해피엔드도 새드엔드도 아님을 우리는 안다.
  어른 릴리는 저 눈사람을 다시 냉장고 속에 넣지 않을 것이다. 그냥 밖에 놓아둘 것이다. 동심을 잃어서가 아니다. 녹는 것은 녹게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녹아내리다가 마침내 소멸하는 과정을 이제 마음으로 지켜볼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도 눈사람이 분명 여기에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사는 것처럼.
  곧 녹아버릴 눈덩이에 기어코 모자와 목도리를 씌워주는 그 마음에 대하여, 연민에 대하여.

- p. 166-170 눈+사람




방금 책에 '똑같은 책을 100명이 사서 읽으면 100가지 다른 텍스트가 나온다'는 문장이 있었다.

오늘 낮에 그와 같은 말을 그 후배에게 했다. 며칠 전 읽으라고 준 <인생 학교:돈>이 너무 와닿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라며 읊었는데, 난 그런 문장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다고 허허 웃었다.

"사람마다 지나온 길은 모두 다르니까, 그래서 같은 책을 읽어도 깊게 남는 부분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 읽고 있는 책에서 얻고자 하는 부분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이렇게 2018년 2월 세 번째 책 끝 -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은 단편적인 것이 모여 이루어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