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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 컷 일지

편집장의 재봉질

by 반고

농사짓듯 책을 짓는다.

월간 토마토 사무실에서는 정기적으로 재봉틀 돌리는 소리가 난다. 월말이 다가오면 편집장은 재봉틀 앞에 앉아 실과 바늘로 책을 만든다. 정기간행물인 월간 토마토는 2020년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인쇄소에 원고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에서 직접 책을 내기로 한 것이다. 책을 짓기 위해 기계를 구입하고 적합한 종이와 잉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내가 토마토에 합류하기 전에 일어난 일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전해 듣기만 했다.

잡지가 나올 즈음이면 출판사는 종이 자투리와 소음에 둘러싸여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간다. 기계를 다루는 정교한 일은 숙련된 사람이 하는 일이니 도울 수 없지만, 접기, 붙이기, 나르기 같은 단순한 업무에는 손을 보탤 수 있어서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사무실에 들른다.

무수한 책이 쏟아져 나오고 공산품처럼 소비되는 현실에 반기를 들고 농사짓는 마음으로 책을 짓겠다는 편집장의 생각은 참신했다. 책을 직접 만들려면 인쇄, 정합, 접지, 재봉, 재단, 포장해야 해서 최소 60번 이상 사람 손이 간다. 이를 실천하는 방법은 힘들게 하거나, 즐거운 척하며 힘들게 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월간 토마토 출판사 직원들은 가능한 한 직접 책을 짓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인쇄소에 맡긴다. 규칙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계산해 보면 석 달에 한 번 정도 외주를 준다.


한 달에 한번 바빠지는 재봉틀과 연습용 종이

농사일에도 농번기와 농한기가 있듯이 책을 직접 짓지 않는 달에는 일상적인 글쓰기 업무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할 수 있다. 하지만 월말 책 만들기 노동이 없는 달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외주를 맡기는 이유는 다른 프로젝트의 마감과 겹쳐서 일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쇄소를 이용하면 좋은 점이 있다. 첫째는 컬러판을 만들 수 있어서 사진의 품질을 높일 수 있다. 흑백 1도 인쇄물을 보다가 색채가 있는 월간 토마토를 받아들면 감동이 있다. 둘째는 인쇄소와의 거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잘 모르긴 해도 그동안 출판사와 거래하던 인쇄소 입장에서는 월간 토마토가 자체 제작을 선택했을 때 내심 섭섭했을 것이다. 출판 업무라는 게 잡지 발행 말고도 다양한 인쇄업무가 있는 만큼, 주거래 인쇄소와 지속적인 관계를 쌓으려면 발주를 넣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외주를 맡긴다고 해서 출판사 직원의 손길이 필요 없는 것도 아니다. 인쇄소에서 잡지가 도착하면 잡지를 넣을 상자를 접고 동봉할 꾸러미를 챙겨 넣은 후, 주소 스티커가 붙은 각대 봉투에 넣어 풀칠하는 일이 남는다. 이것도 손이 가는 일이긴 하지만, 토마토 식구들은 이 정도는 어느 사무실에서나 있을 법한 대량 우편물 발송업무라고 여기며 노동요를 틀어놓고 하루 이틀이면 해치운다.


책 만들기 봉사활동

처음 책 짓는 봉사활동을 하러 간 날은 두 덩어리로 나온 종이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했다. 한 번에 정합기에 넣을 수 있는 분량이 4쪽짜리 지면 15장인데, 대개 월간 토마토 지면은 이보다 많다. 이럴 때는 정합기를 두 번 사용한 후 수작업으로 종이 덩어리를 합친다.

이번 호는 어쩐 일인지 두 번째 덩어리가 딱 한 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열다섯 장에 한 장만 더 얹으면 책 본문을 한 묶음으로 만드는 작업이 끝나는 것이었다. 나는 종이 합체 작업을 하다가 의문이 들었다. 편집해서 글자 수와 공간을 줄이면 전체 분량이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정합기계가 한번 돌아갈 분량 내에서 이번 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잡지 한 권에 얼마만큼 지면을 사용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내 앞에서 작업하던 디자이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양쪽 다 두둑한 덩어리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라면 몰라도 이 한 장이 남아서 덧대는 것은 좀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기사마다 글자 수를 줄여서 아예 한 장 분량을 날렸으면 일하기가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물정 모르는 왕초보라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찌 보면 제 탓이네요. 글마다 사진을 한 장씩 줄였으면 그리되었을 수도 있었겠는데…”

그녀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디자이너의 업무를 생각해보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의미는 의사결정권이 내부에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 결정에 따른 일을 해치우는 것도 고스란히 내부자의 몫이 된다. 농사짓듯 잡지를 만드는 월간 토마토의 색다른 시도가 관계자들의 과로와 번아웃을 거름 삼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책의 가치와 로컬산업의 소중함을 살리는 활동이 될 수 있도록 균형과 효율을 중시하며 작업하기를 소망한다.


낮술 걸치고 상자 접기

두 번째 봉사활동부터는 두툼한 목장갑과 돈 셀 때 끼는 골무를 가져갔다. 지난번 경험으로 책 짓는 일은 손으로 종이를 만지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보호장비를 챙긴 것이다. 이날 나에게 주어진 일은 상자 접기였다. 편집장은 시범을 보이며 아주 세게 접지 않고, 상자가 다시 열리는 힘이 남아있을 정도로만 텐션을 주는 것이 핵심이라고 했다. 상자가 너무 납작해져서 책이 들어간 후에도 푹 꺼져있으면 안 되고, 선을 따라 접은 후에 다시 전개도 모양으로 되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동료와 함께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노동요를 들으며 손으로는 상자를 접고 입으로는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나는 그녀가 취재차 방문했던 아로니아 농장에 관해서 물어보았는데, 그녀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며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은 냉장고에서 꺼낸 와인이었다. 농장에서 선물로 주신 와인이 조금 남았다며 한번 마셔보라고 했다. 이날은 마침 지하철을 타고 왔고, 아로니아 와인 맛이 궁금하기도 하여 시음을 해 보았다.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떫은맛이 아니라 달콤하고 매력적인 맛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낮술을 걸치고 박스 접는 일꾼이 되어있었다. 적당히 어렵고 적당히 재미있으며 적당히 빈번한 책 짓기 봉사활동. 내가 힘을 싣는다고 출판사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동료들 얼굴도 보고 소식도 들을 겸 월례 행사로 참여하고 있다.


아로니아 와인과 아로니아 포도즙


스티커는 줄 맞춰서

지난달에는 인쇄소에 의뢰해서 컬러 잡지를 만들었다. 다 지어온 책을 가져와 포장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나는 스티커를 붙이는 일을 했다. 월간 토마토는 포장 상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잡지를 다 본 후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도록 설계되어있다. 잡지를 책꽂이에 꽂았을 때 상자 등의 스티커가 가지런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원래 의도이다. 그동안 받아본 잡지는 책마다 조금씩 편차가 있었는데, 이번 호부터는 그럴 일이 없었다. 나보다 먼저 봉사활동을 하고 간 사람이 좋은 기술을 전수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이는 스티커 부착이 완성된 상자 스무 개를 쌓은 다음 그 위에 새 상자를 올리고 아래 스티커를 기준점으로 삼아 일정한 위치에 붙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작업자의 어깨에도 무리가 가지 않고 스티커도 한자리에 붙일 수 있어서 일석이조였다. 스티커 붙이는 위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잡지의 미관에 영향을 주는 일이기에 비뚤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월간 토마토를 읽었다. 아직 배포되기 전이지만 담당자가 봉사활동 품삯이라며 미리 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스티커 붙이기처럼 작은 일에도 정성을 쏟는 출판사 관계자 한명 한명의 노고를 떠올려 보았다. 남과 다르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쉽게 가려고 했으면 애초에 지역출판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힘들어도 자신이 하는 일에 소신과 책임감을 느끼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런 게 내공인지 아우라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역의 문화 예술 콘텐츠를 알리고 기록하는 일을 하는 이 매체가 우리 곁에 오래도록 있었으면 좋겠다. 책을 짓다가 힘들면 인쇄소에 맡기기도 하고, 재충전하면 다시 짓기도 하는 되풀이 작업 속에서 월간 토마토가 긴 호흡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간직한 채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줄맞추어 스티커 붙이는 법을 터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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