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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고 Nov 06. 2021

소박하고도 힘이 있는 전시

박인경 『내 방 창 너머』

   이응노 미술관에서 박인경의 『내 방 창 너머』 오프닝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그간 코로나-19로 홍보에 제약이 많았지만, 단계적 일상 회복에 맞추어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었다. 류철하 관장의 안내로 진행된 간담회는 작품에 대한 해설뿐 아니라, 작품을 소장하게 된 배경과 전시 의도까지 이번 기획전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박인경은 누구인가? 그녀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대한민국 1세대 작가이며, 화가로서 정점에 있는 96세의 현역 예술가이다. 동양화로 시작해 화풍을 초월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박 작가는 고 이응노 화백의 부인이자 이응노 미술관의 명예 관장이기도 하다. 과거 인터뷰에서 박인경은 신작이 없는 전시를 ‘회고전’이라고 하였다. 작품의 변천사를 알려주기 위해 이전 그림을 전시할 수는 있지만, 신작이 없으면 전시회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말이었다. 박인경은 작년과 올해로 이어지는 팬데믹에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였다. 『내 방 창 너머』에는 2020~2021년 작품이 여러 개 포함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문 두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대형작도 있다. 때로는 크고 힘찬 작품으로, 때로는 작고 온화한 작품으로 관객을 맞이하는 작가의 포용력에 경외감이 들었다.      


   이번 전시회 제목은 작업실 창문 너머 풍경을 담은 작품에서 이름을 따왔다. 연도미상으로 표기된 <내 방 창 너머>는 완성 시기를 알 수 없고, 그림 속 전경도 아리송하다. 수묵담채로 그린 노란 꽃을 보면 따뜻한 계절 같은데, 나뭇잎이 귀한 걸 보면 추운 계절 같다. 창문은 프레임에 담긴 만큼만 밖을 바라보라고 관람객의 시선을 제한한다.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 덤불은 땅을 밟고 사는 사람에게 익숙한 모습이다. 그러나 공동주택에 사는 이에게는 귀한 풍경이다. 고층 아파트에서 밖을 볼 때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것은  유리창에 반 이상 올라온 철제 발코니 난간이다. 화가 박인경이 담아낸 소박한 풍경이 애틋한 이유는 이런 흔한 장면이 이제는 카페나 여행지 같은 특별한 곳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서가 아닐까? 관람객은 얇았다 굵어지는 창틀을 마주하며 박인경 작가의 붓, 먹, 종이가 서로 맞닿은 찰나가 어느 만큼일지 상상해 본다.  

<내 방 창 너머>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64x61.5cm

   박인경의 대형 신작 중 오래토록 시선이 머문 곳은 작품 <바다 속>이다.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바다 생물의 뼈를 표현했다고 유추하면서도 한자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작품 같기도 했다. 시대적으로 한문은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문화적 배경 중 하나일 것이다. 작품에 나타난 가로획, 삐침, 점 등의 조형적 요소를 보며 한자의 기원이 상형문자였음을 기억해냈다. 이 글을 편집하며 사진을 문서 파일에서 열었는데, 어쩐 일인지 세로로 찍은 작품 사진이 가로로 삽입되었다. 종종 추상화는 그림을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상관없다고 농담하는데, 이번에는 정말 그랬다. 세로 그림 <바다 속>에서는 왼쪽 아래 살포시 잘린 획, 성기게 그은 붓칠과 흑백의 대비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비록 사진이지만 이를 가로로 놓고 보니, 대상의 동적인 느낌이 강조되었다. 류철하 관장은 화가 박인경의 작품세계가 구상에서 시작해서 추상으로 바뀌면서 이 둘을 넘나들며 감각의 크기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하였다. 삐뚜로 작품을 본 계기로 발견한 신선함은 나도 늘 같은 관점이 아니라 자유로운 생각으로 작품을 봐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다.    

<바다 속> 2020 종이에 먹, 210x150cm

   전시장 입구에서 자연과 정물을 담은 평화로운 그림을 보고 옆으로 이동해 큰 벽면을 채운 대형작을 감상하면, 미술관 정원을 품은 벽을 따라 자그마한 그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류철하 관장은 이런 그림을 쪽지화, 편화라고 하였다. 생경한 표현이었지만 그림과 함께 들으니 수긍이 갔다. 박인경은 사람 어깨만 한 화폭에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자연을 담았다. 작품 <나무>는 주인공을 비우고 바탕을 채우는 도치법을 사용했다. 그녀가 시각화 한 대상은 흑색 덕분에 선명해진 백색 나무이다. <나무>와 나란히 걸려있는 그림은 <정원>이다. 노랑, 주황, 분홍, 초록, 파랑의 다채로운 색이 사용되었지만, 이 작품은 차분한 단조 음악 같다. 강렬한 불투명으로 화면 속 무게 중심이 되어주는 먹을 보며, 정원의 근간이 되는 흙과 켜켜이 쌓인 낙엽, 이 둘이 합쳐져 퇴비가 되는 과정을 떠올렸다. 연도와 화풍이 다른 두 작품을 나란히 놓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관람객의 몰입을 돕는 미술관의 설정은 전시를 기획하고 가꾸는 전문가들의 역량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특별히 이번 기획전은 다양한 크기와 기법을 사용한 박인경의 작품을 조화롭게 끌어낸 큐레이터의 시선이 돋보이는 전시였다. 

좌 <나무> 2021 종이에 먹                         우 <정원>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다양한 쪽지화가 전시된 벽

   박인경의 작품은 나에게 ‘먹’을 새롭게 보라고 주문했다. 특히 <나무줄기 1>은 먹에 대한 이해도를 넓혀준 작품이다. 나무줄기를 단순화하여 농담 조절로 먹의 퍼짐과 울림을 표현한 작가의 의도가 나에게는 역설적으로 현미경 속 정교한 단색 이미지처럼 다가왔다. 흑백의 평면이 이토록 많은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거친 면이 느껴질 것 같은 입체감과 숲속의 원근감을 살린 <나무줄기1>은 박 작가의 나무줄기 연작이 어떤 모습일지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무줄기1> 2019 종이에 먹, 130x130cm

   이번 전시는 정신적 환기구로서 미술관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박인경 화백의 작품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위로를, 머리를 식히고 싶은 사람에게는 쉼을, 도전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용기를 준다. 해외 미술관에서 명화 앞에 자리를 잡고 스케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오늘은 나도 미술관에 머물면서 글을 쓰고 싶었다. ‘글쓰기=일’인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는 것이 예술의 힘이구나 생각하며 미술관을 나섰다. 


전시회 정보

2021 이응노미술관 기획전. 박인경의『내 방 창 너머』

전시 기간: 2021.10.26.~2021.12.19.

장소: 이응노미술관 전관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 157    042) 611-9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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