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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고 Feb 28. 2022

흑과 백, 그 속의 빛과 생명  

김영진 작가의 <미완의 형태> 전시 리뷰 

   전시회 방문을 앞두고 SNS에서 작가의 작품 설치 영상을 보았다. 그녀는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나비>의 위치를 정하고 있었다. 화면 속 김영진 작가는 액자를 옮기고 멀리서 바라보며 여백 조정하기를 반복했다. <나비>는 엄지와 검지로 잡을 수 있는 작은 크기다. 수십여 개의 나비가 군집을 이루어 전시장 벽을 채운다. 비어있는 공간이 적절한 긴장을 준다.      


   무채색 의상을 입고 무채색의 작품을 설치하는 짤막한 영상은 흑백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대전시립미술관의 그룹 전시가 끝나고 모리스 갤러리에서 김영진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옮겼다. 모리스 갤러리가 주는 차분한 공간감은 김영진의 작품과 잘 어울렸다. 전시장 안에는 흑과 백 두 가지 색만 존재하는 것처럼 정갈했다.      


   김영진의 작품에는 다양한 사망 기사가 쓰였다. 작가는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한 후 이를 트레싱지에 인쇄해 나비로 제작했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살해, 사망, 가해, 학대 같은 단어가 등장한다. 작가는 관람객들이 단어를 한눈에 볼 수 없도록 나비를 거꾸로 얹었다. 사람들은 김 작가의 시간 설계에 맞추어 천천히 글자를 해독한다. 손바닥만 한 나비들은 조금씩 다르게 생겼다. 종이접기로 표현한 각 잡힌 나비들이 박제처럼 액자 안에 잠들어있다. 작가는 이름 없는 사람의 죽음에서 완전하지 않은 인생을 떠올리고 이를 포토그램으로 제작했다. 포토그램은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암실 속에서 빛, 인화지, 사물만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다. 어릴 때 했던 푸른 종이에 물체를 놓고 햇볕을 쬐면 빛을 받은 부분만 더 파랗게 변하던 실험과 비슷하다. 감광지에 빛을 더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포토그램 기법이 소개된 지도 100여 년이 넘었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고 유리나 빛처럼 투명한 성질에 관심을 가져온 김영진 작가는 빛이 사물에 닿았을 때를 표현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해왔다.      


   젤라틴 실버 프린트로 작업한 <나비>, <종이나비>, <미완의 형태 II>는 실물 크기대로 나오는 포토그램의 특성상 실제 사이즈로 접은 종이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부활, 영혼을 상징하는 나비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은 후, 곤충의 날개와 같은 얇은 성질이 담길 수 있게 트레싱지를 선택한 작가의 섬세한 해석이 느껴지는 듯하다. 한편 작품의 소재가 될 기사가 너무 많았다는 작가의 증언에서 세상에 떠도는 비극의 총량은 이미 감당할 수 있는 수위를 훌쩍 넘어섰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사망 기사의 주인공에서 나비로 변신한  영혼들은 어쩌면 종이에 인쇄하고, 손으로 접고, 인화하여 작품으로 재탄생되기까지 살아있을 때보다 작가의 품에서 더 존중받고 위로받았는지도 모른다. 피그먼트 프린트로 된 작품 <미완의 형태>는 중간중간 구름 같은 모양이 있다. 포토샵으로 뭉갬을 입힌 것이 아니라, 암실에서 자연스럽게 생성한 형태가 작품에 담긴 것이다. 포토그램이 암실에서 하는 작업이라 컨트롤 할 수 있는 지점이 없다는 한계가 있는데, 김 작가는 이 또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작품에 접목한다.      

  

  김 작가의 창작 과정은 기사를 스크랩, 프린트하고 종이를 접고 암실에서 작업 후 스캔 확대하여 디지털 프린터기에서 최종 제작하기까지 다양한 단계를 거친다. 신문을 고르는 개념적인 행위에서 출발해 손수 접어 형태를 잡는 아날로그적인 행위로 발전했다가 빛과 인화지의 합작을 기다리는 암실 작업을 거치고 디지털 프린팅으로 이어지는 이 모든 순간에 작가의 의도와 해석이 작품에 담긴다. 아트 프린팅에서 얼마나 무수한 조합과 실패를 할 수 있는지는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관객의 눈에 흑백으로 보이는 작품이라도 검은색, 흰색, 회색 사이의 미묘한 색을 표현하기 위해서 컬러로 세팅을 하고 인쇄를 한다. 우리 눈에 흑백으로 보일지라도 온전한 감상을 위해서 작가가 설정해 놓은 스펙트럼은 그보다 훨씬 크고 정교함을 새삼 깨달았다. 전시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김영진의 작품은 작업의 결과만 아니라 작품이 제작되는 전 과정, 그 과정을 담은 영상물도 감상의 대상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전시에서는 창작 활동 과정에서 나온 다양한 요소도 함께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전시 정보: 대전 유성구 @모리스 갤러리  2021. 11.25-12.1.

좌 <나비>, 우 <미완의 형태>
<미완의 형태> 포토그램, 종이접기, 72x9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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