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할머니인 마포 할머니는 운동파였다. 전성기에는 매일 효창공원으로 새벽 운동을 하러 갔다. 우리 집으로 온 후에는 아파트 앞 천변에서 식후 걷기를 실천했다. 처음에는 혼자 외출했지만, 낙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에는 보호자 없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오후 집 근처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아침에 집을 떠나 저녁에 들어오는 대학생이어서 밖에서 할머니를 마주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옆에 아무도 없었으니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을 것이다. 마포 할머니는 비슷한 연배의 이웃과 벤치에 앉아있었다. 나를 본 할머니는 친구에게 둘째 손녀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손녀는 공부를 잘해.” 할머니는 공부를 강조한 적이 없었는데, 나를 학업 성적이 우수한 손주로 소개한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이웃 할머니도 지지 않고, “우리 손자도 공부를 참 잘하는데. S대 학생이야” 하였다. 한국에서 제일 입학하기 어렵다는 대학 이름을 들은 마포 할머니는 손녀 자랑을 멈추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전신 스캐닝을 완료한 두 사람은 나를 두고 품평회를 시작했다. 귓불이 도톰하고 귀가 잘생겨서 부자 될 상이다, 눈썹이 짙어서 연필로 안 그려도 되겠다, 이마가 갈매기처럼 ന자로 되어있어 단아하다, 머리숱이 많아 보기 좋다… 내가 아는 외모 척도에 이런 기준은 없었으므로, 칭찬인지 아닌지 아리송했다. 얼마간 듣고 서 있었더니 대화의 맥락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들은 쌩얼 손녀를 꾸짖은 것도, 빈말 칭찬을 한 것도 아니었다. 요리조리 살펴보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를 실천한 것이다. 당시에는 할머니의 덕담을 흘려들은 척했지만, 그때 들은 말은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잘생긴 귀를 드러내야 복이 온다는 조언을 따라 나는 귀 뒤로 머리를 넘기고 다녔다.
할머니의 외출이 병원이나 산책으로 제한되기 전에 할머니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종종 외식을 했다. 하루는 가족들과 우래옥에 갔다. 그곳은 할머니와 아버지가 좋아하는 이북식 냉면을 파는 식당이었다. 불고기와 냉면을 주문했다. 비빔냉면을 시킨 나는 생각보다 매운맛에 당황하여 육수만 들이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기 싸 먹으라고 나온 상추를 잘라 넣으라고 하였다. 냉면과 상추라니 구미가 당기지 않았지만, 채소 접시를 앞으로 내미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한 장을 얼기설기 찢어 넣었다. 그 정도 양으로는 매콤함을 희석할 수 없다 싶었는지 할머니는 상추 몇 장을 집어, 내 그릇에 얹으려 했다. 이번엔 아버지가 말렸다. “그냥 애들 하는 대로 내버려 두세요, 쫌!” 할머니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 아버지를 한번 쳐다보고 상추를 내려놓았다. 큰살림을 지휘하며 발언권이 세던 할머니가 고분고분 아버지 말을 따른다는 게 낯설었다. 상추를 넣고 싶지 않았던 마음만큼이나, 나로 인해 언성이 높아진 상황이 불편해서 그냥 물냉면을 먹을 걸 후회했다. 그 뒤로는 할머니와 식당에 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기력이 급격히 쇠퇴하여 외식이 어려워졌던 것 같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눈에 눈썹이 들어갔는데,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거울 앞에서 낑낑대는 내게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라고 하였다. 두 손으로 내 머리를 잡고 혀를 내밀어 눈을 핥아주려고 하였다. 기겁하고 뒷걸음질하는 나와 혓바닥을 보여주며 이렇게 하면 해결된다고 다가오는 할머니가 팽팽히 맞섰다. 손사래를 치며 거절한 후 몇 번 더 눈을 비볐더니 다행히 눈썹이 빠져나왔다. 마포 할머니는 늘 바빴고 손주들과 일대일로 놀아주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할머니와 스킨십을 나누며 정을 쌓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할머니 치마폭이 그립다는 말은 책에서 나오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년 시절 할머니와의 추억은 희미하다. 반면 성인이 되어 경험한 할머니와의 일화는 나에겐 또렷하지만, 할머니에게는 흐릿하게 남았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기는 둘 중 한 사람만 온전히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할머니가 눈썹을 빼주겠다고 한 날을 회고하면, 어미 개가 강아지를 돌보는 모습이 떠오른다. 새끼를 핥아주는 어미 개처럼 할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 한 중에도 누군가를 보살피려 했다. 당신이 아는 방식으로 손녀를 도우려 한 할머니의 제안은 진심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였다. 할머니가 간병인 아주머니를 졸라 마포 집에 가자고 하였다. 집에 있는 사람은 할머니, 아주머니, 나 세 사람뿐이었다. 마포 집에 가야겠다는 말을 처음 꺼낸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이사 오기 직전에 거주한 동네는 경기도 안산이었는데, 마포 집만이 진정한 마음속의 집이었다. 당황한 아주머니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며, 할머니가 외출하자고 성화인데 엄두가 안 난다고 하였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 세계에는 흐린 날과 맑은 날이 교차했다. 흐린 날에는 어머니가 할머니의 돈을 가져갔다고 화를 내고, 식사를 마친 후에도 배가 고프다고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맑은 날에는 큰 소동 없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평범한 대화가 가능했다. 마포 이야기를 꺼낸 날 할머니의 날씨는 맑음이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무엇을 하고 싶지 않다는 어깃장을 놓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적극적인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마포에 왜 가려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저그 사니, 저그 사니, 글쎄 갈 일이 있다.”라고만 했다. 할머니의 일상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인 부모님은 이런 바람을 들어줄 여력이 없었다. 주도적인 돌봄을 하지 않았던 나는 간헐적으로 부수적인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포에 가기로 했다. 할머니가 어떤 주장에 꽂히면 무한 반복하는 기간이 있는데, 마포에 별것 없다는 걸 알면 한동안 잠잠해질 것 같았다. 우리는 아파트 정문까지 걸어가 택시를 잡았다. 뒷문을 열어 아주머니와 할머니를 태우고 택시 앞 좌석에 탔다. 순간 오늘만큼은 내가 할머니 보호자라는 생각이 스쳤다. “공덕동 00 은행 골목으로 가주세요.”
대로변 하차를 선호하는 기사의 구박을 들으며 더는 택시로 이동하기 비좁은 골목까지 가서 하차했다. 할머니의 옛집,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은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젠 다른 이의 집이었다. 마포 집은 큰 계단을 서너 개 딛고 올라가야 초인종을 누를 수 있었다. 나는 먼저 올라가 대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남의 집을 엿본다는 부담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벨을 눌러보는 것이 맞았다. 할머니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오른 후 문 앞에 섰다. 천천히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한동안 응답을 기다렸지만, 상대방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을 눌러도 소용없었다. 할머니의 볼일이 무엇이었든 이 동네에서 할머니와 반갑게 인사할 사람은 없었다.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포 집의 오른쪽에 있던 이층 집은 사층높이의 다세대 주택으로 변신해있었다.
골목을 빠져나와 상점이 있는 거리로 향했다. 할머니는 목욕탕에 가보자고 했다. 사람들은 떠나지만, 업소는 그보다 오래 자리를 지킨다고 생각했을까? 발걸음을 옮긴 지 얼마 못 가서 대중탕이 없어졌음을 알았다. 멀리서도 보이던 벽돌 굴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목욕탕이 있던 자리까지 걸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목욕탕이 있었는데, 여긴데…”
큰길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일만 남았다. 두 사람을 보도블록에 남겨두고 차를 잡으려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길을 건너자고 했다. 길 건너에는 정육점이 있었다. 할머니가 애용하던 가게였다. 할머니는 상점에 들어가 다짜고짜 물었다. “육곳간 사장님, 나를 모르겠소?” 사장님은 냉장 진열장 너머 작업대에서 고기를 썰다 말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사장님께 한두 마디 말을 건넸다. 우리는 정육점에 잠시 머물다 밖으로 나왔다. 이제 집에 가도 되는지 물었더니,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할머니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요즘은 도보로 옛 동네를 탐방하는 여행 프로그램도 있는데, 걸을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한 상황에 감사하며 추억 쌓기를 했더라면, 할머니와 마포에 가서 어디에 들릴지 무엇을 할지 미리 나들이 계획을 세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할머니는 이후에도 마포 집 이야기를 했지만 가보자고 채근하지 않았다. 마포 집이 못 가볼 데로 전락한 이유는 택시비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말하길 이날 왕복 교통비가 이만 원 넘었다며 내가 괜한 돈을 썼다며 아까워하였다고 한다.
마포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이십 년이 넘었다. 몇 해 전 겨울 나는 초등학생이던 아이를 데리고 천안에 있는 할머니 묘에 갔다. 아이는 끝없이 펼쳐지는 추모공원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곳곳에서 관리비 납부를 독촉하는 현수막을 보았다.
“엄마, 여기 증조할머니 돈은 누가 내는 거야?”
“외할아버지가 내시겠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럼 엄마랑 형제들이 내겠지.”
몇 년 후면 할머니 산소를 사용하기로 한 기간이 끝난다. 한 사람이 사망한 후 4세대가 지나면 그 무덤을 찾는 이가 없어진다는 글을 읽었는데, 이곳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내가 연구소에 근무할 때 꿈에 할머니를 보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아프면 아픈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할머니의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할머니 때문에 공부할 이유를 찾았고 끝까지 학위를 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마포 할머니가 꿈에 나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