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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고 Oct 12. 2020

헌책방 나들이

대전 중앙시장 헌책방 골목에 가다 

  월간토마토 157호에서 헌책방 기사를 읽었다. 대전 중앙시장에서 오랫동안 헌책방을 운영한 할아버지에 대한 소개였다. 도로까지 점령한 책더미 사진을 보니 불현 듯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아들 둘이 같이 등교하는 9월의 어느 날, 헌책방 나들이에 나섰다. 책에서 본 상점 이름이 가물가물했지만 일단 떠났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헤매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주차빌딩 근처의 헌책방 거리를 떠올리며 내비게이션에 도착지 주소를 비워두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벌써 열시다. 최근에 무인주차요금정산기가 생겼는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설명하는 이가 보초를 서고 있다. 물건을 사고 상점에서 주차할인권을 챙겨오라고 한다.  


   힐끗 보았을 때는 헌책방이 네다섯 군데로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영업하고 있는 곳은 두 집 뿐이다. 첫 번째로 간 A 헌책방은 여자 사장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누구를 꼭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글 속의 주인공은 할아버지가 아니던가? 일단 계속 찾아보기로 한다. B 헌책방 앞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사진 속 인물보다는 젊은, 안경을 쓴 남자 사장님이 있다. “미술교과서를 찾아요.”하니 잘 없을 거라고 한다. 교과서가 많지도 않거니와 그나마 있는 것은 국영수가 대부분이란다. 사장님이 묻는다.

   “미술 교과서는 왜?” 

   “그냥요.” 하고 얼버무리려다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한다. 말하지 않으면 책이 안 나온다고 했으니까. “제가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는데요. 애들 미술교과서를 보니까 기본기는 거기 다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출판사의 헌 책이나 옛날 책이 있으면 구해보려고요.”

   설명을 들은 사장님은 부지런히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미술관 도록, 명화집, 데생 입문서를 내주었다. 하나같이 멋진 책들인데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다.  

   다시 A 헌책방으로 간다. 미술교과서를 구한다고 했더니 “몇 학년?” 하고 되묻는다. 예감이 좋다. 학년은 상관없다고 하자 사장님은 책더미 속에서 초등학교 3~4학년 미술을 꺼낸다. 책 뒷면에는 대전갈마초등학교 3학년 2반 44번 준서라고 쓰여 있다. 이름을 쓰는 난에 성은 빼고 ‘준서’라고만 적은 열 살 책주인을 떠올리고 있는데, 사장님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창고에 책이 더 있다며, 상점 옆 지하주차장을 가로질러 안쪽 끝까지 간다. 칸막이가 따로 없어 습도나 온도 조절은 안 될 것 같은, 플라스틱 팔레트 위에 철제 선반과 상자를 얹은 헌책 저장소다. 누워있는 책속에 체육, 도덕, 사회 교과서도 보인다. 사장님은 살펴보라는 말을 남기고 책방으로 올라간다. 나는 초등용 한 권, 고등용 한 권을 챙겨 햇빛 속으로 나온다. 그 사이 그녀는 나를 위한 책을 몇 권 골라두었다. 그 중에서 따라 그리기 좋겠다 싶은 장식 도안집이 눈에 들어온다. 사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이런 종류는 인테리어업자들이 보는 책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간파한 고수의 웃음이다.  

   책 네 권을 종이봉투에 담아들고 B 헌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번엔 도안집이라는 키워드로 물어볼 참이다. 사장님은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색깔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배색 대사전을 보여준다. 한눈에 봐도 값이 나갈 것 같다. 책 뒷면에 적힌 정가 60,000원을 확인하고 10,000원을 부른다. 책값을 내고 나오면서 사장님께 묻는다. 

   “사장님, 혹시 지난번에 잡지 인터뷰 하셨어요?”

   “어? 아닌데… 무슨 잡지?” 

   사장님도 내게 묻는다. 

   “저기서 교과서 좀 찾았나?”

   내가 세 권 샀다고 하자 옆집 시세를 떠본다. 

   “한 2,000원씩 하나?” 

   그 정도 할 것 같은데, 정확한 가격을 몰라서 이번엔 정말 얼버무린다. A 헌책방에서 14,000원을 썼는데 그중 교과서는 얼마고, 도안집은 얼마인지 말해주지도, 묻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눈 마지막 대화는 주차 쿠폰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주차할인권이 있는지 문의하니, 길 건너에 동사무소가 있었을 때는 할인권을 받아왔었는데 다른 데로 옮겨간 후로는 가지러 가기 어려워서 받아놓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냥 없다는 말보다 옹색하게 들려 영수증 챙기는 것도, 카드 결제가 되는지 확인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다가, B 헌책방 건너편 2층에 자리한 C 헌책방도 발견한다. 반짝반짝한 간판을 보니 새로 개업한 곳 같다. 헌 책을 파는 신규점포.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올라가본다. 이곳은 헌책방이라기보다는 중고서점 분위기로, 사장님은 컴퓨터 앞에서 서지 정보를 입력중이다. 실내가 넓어서 걸어 다니면서 책을 고를 수도 있다. 한번 둘러보고 빈손으로 나오려는데, 계산대 앞에 <시장에 가면 문화가 있다: 대전 원도심 시장 사람들 이야기>가 놓여있다. 시장 이용법도 책으로 배우려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전통시장 가이드 집이다. 사장님은 명함을 주면서 처분하고 싶은 책 있으면 전화하라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 시장 사용 설명서를 펼쳤다. 이 책에서 25년 넘은 D 헌책방 소개 글을 찾았다. 옛 시집과 교과서가 제일 많이 팔린다고 한다. 이 글을 통해 대전 헌책방은 중앙상가 쪽과 원동네거리 쪽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과, 나는 오늘 그 중 한 구역만 다녀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월간토마토 157호를 다시 펼쳐본다. 헌책방은 필요한 것을 찾으러 오는 곳이지 구경하는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내 생각엔 구경하기 딱 좋은 곳이 헌책방이다. 마음속에 대략적인 생각을 담고 가면 이곳저곳 둘러보며 대상을 구체화시켜 필요한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보물창고, 헌책방은 그런 곳이다. 내 서재에 미술교과서, 실내장식 도안집, 배색 대사전이 이사 왔다. 책을 잘 봤다 싶을 때쯤 헌책방에 다시 나가볼 것이다. 그날은 헌책 시장의 신을 안다는 할아버지를 만나고, 교과서를 많이 판다는 D 서점으로 나들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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