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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고 Aug 24. 2020

노년을 그린 단편영화_오래된 시계

80대인 주인공은 산동네 언덕 위 어두운 집에 혼자 산다. 가구도 전자기기도 별로 없는 곳이다. 영화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화장실과 주방 사용도 녹녹치 않을 것 같다. 그녀가 오늘 시내에 가는 이유는 태엽을 감아도 점점 느려지는 괘종시계를 수리하기 위해서이다.  


화면 속 그녀의 스타일을 먼저 살펴본다. 머리모양은 염색을 하지 않은 곱슬거리는 단발이다. 파마를 한 것 같다. 흔히 볼 수 있는 까만 바글 머리도, 백발의 쇼트커트도 아니다. 민무늬 회색 티셔츠와 남색바지, 반짝이는 장식이 달린 무채색의 단화를 신고 걸어가는 모습에서 절제미가 느껴진다. 그녀는 한때 여유로운 시절을 보냈을 것 같다.      


영화 속 소품도 둘러본다. 할머니는 고장 난 시계를 운반하기 위해 접이식 카트를 사용하는데, 녹슨 카트 위에 오래된 괘종시계를 얹어 놓으니 이 둘을 함께 묶어 이삿짐 쓰레기라고  내놓아도 될 것 같다. 한편, 뭐든 반백년은 썼을 것 같은 그녀의 물품 중에 태엽 감을 때 올라서는 얕은 플라스틱 의자는 어딘가 낮설다. 다이소에서 왔을 것 같다. 줄곧 쓰던 게 망가져서 다시 샀을까? 할머니의 선택이라면 그녀는 세련된 취향을 가졌다고, 제작 스태프의 준비였다면 이 의자가 필요 이상으로 돋보인다고 하겠다.           


할머니는 팔을 뻗어 올려 시계의 태엽을 감고, 상을 놓고 한쪽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바닥에서 밥을 먹는다. 혼자 카트를 끌고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언덕을 오를 때는 허리를 달래주어야 하고, 조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기도 한다. 시계를 고치러 시내에 가야 할 때 누군가 같이 가줄 이가, 차로 데려다 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할머니의 집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있을까 떠올려보다가, 꼭 누군가가 이 집을 드나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라고 마음을 바꾼다. 그녀는 비교적 건강하고, 일상생활을 독립적으로 수행 할 수 있다. 스스로 문제해결이 가능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통신수단도 있다. 단, 그녀가 대화하고 싶은 이는 아들인데, 전화 연결이 닿지 않는다. 아마도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통화를 시도했다기보다는 출산하고서부터 써 온 괘종시계를 고치러 갈 생각에 생각이나서 손이 저절로 움직였을 것이다. 아들의 번호를 눌러봐도 오래된 메세지만 남아있을 뿐이다.


할머니는 억세지 않다. 처음 의뢰한 시계수리기사가 긴 시간을 쓰고도 고치지 못했을 때, 그녀는 이것도 하나 모르면서 여지껏 뭘 그렇게 뜯어봤냐고 타박하지 않았다. 짐을 두고 온 것을 알아채고 급하게 버스에서 내릴 때도, 빨리 내려야 한다고 버스기사를 채근하지 않고 빨간색 하차 버튼을 살포시 눌렀다. 과일가게 청년이 시계의 행방을 모른다고 하자 대낮에 두 눈 뜨고 그런 것도 못 보았냐고 성질 내지 않는다. 우기고, 따지고, 싸우는 할머니가 아니어서 신선하다. 

   

내가 보기에 그녀가 소유 한 것 중 가진 가장 값진 것은 유형재산이 아니다. 그녀의 재산 1호는 고장난 시계를 고치겠다는 삶의 의지이다. 나부터도 집에 있는 물건이 고장 났을 때 귀찮다고 내다버리거나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가 수리한 경험이 얼마나 많았던가? 반면 주인공은 자신에겐 소중한 괘종시계를 살리려고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결국 수리점 두 군데를 돌고도 고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는 주인공이 의자에 올라서서 시계를 벽에 거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할머니는 오늘 밤 푹 쉬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나무에 기름도 바르고 유리에 앉은 먼지를 털고 있을 것만 같다.   할머니의 하루를 동행하는 것 같은 잔잔한 단편영화를 감상해서 만족스러웠다.  





영화 보는 법: Purplay. co. kr   에서 '오래된 시계' 검색

비용: 1200원 + 부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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