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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고 Sep 14. 2023

샘이 먹게는 해주거든

내 얘기  쓰려다 아이들 이야기로 맺음하는 현실 엄마  


호링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일요일에 기숙사로 떠났다가 금요일에 집에 온다. 주말이면 한 주간 소식을 몰아서 들려주는데, 오늘은 라면 이야기였다. 수요일 새벽에 동급생 둘이 편의점에 갔다가 걸렸다는 거다.     


「걔네가 배가 아프다고 사감실에 가서 약을 받은 다음에 밖으로 튄 거지. 출입문은 잠겨있으니까, 1층 휴게실 창문을 넘어서 간 거야. 근데 사감 샘 촉이 장난 아니잖아. 어떻게 눈치를 챘냐면, 다시 기숙사로 올라갈 때 문에서 띠띠 소리가 나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없었대. 그래서 혹시나 하고 CCTV를 돌려봤더니, 사람이 순식간에 증발했더래. 올라가는 모습도 없고, 1층에도 없고. 그래서 손전등을 들고 학교 주변을 수색하다가 **대학교 편의점까지 갔대. 얘네가 라면을 후루룩하려는 순간 선생님이 나타났대」

「선생님은 무슨 셜록 홈즈야?」

「학교에서 걸어갈 만한 데가 거기밖에 없잖아. 샘이 기숙사에 9년 있었으니까 애들 동선은 빠삭하지. 돌아와서 벌점 10점 받고 사감실에서 라면 먹었대」

「뭐, 라면을 먹었다고?」

「샘이 먹게는 해주거든. 기숙사에서 걸려도 일단 다 먹으라고 해. 그리고 벌점 주지. 끓인 걸 어떻게 해. 음식물 쓰레기 처리도 그렇고」

「혼날 각오를 하고 먹을 수는 있구나」

「안 혼나고 먹는 방법도 있어. 방에서 라면 냄새난다, 누가 봐도 라면 먹었다 싶어도 선생님이 직접 본 게 아니면 벌점 없어. 증거 부족이잖아. 그래서 라면땅 먹었다고 뻥 치는 사람도 많아. 타이밍이 중요해. 샘이 잘 활동하지 않는 시간을 골라야지. 점호 끝나고 바로는 샘이 오지 않고, 사감 샘이 교대하는 시간에도 공백이 생기거든. 그럴 때 먹는 거야」

「뜨거운 물은 어디서 구해?」

「1층 정수기. 목이 아파서 뜨거운 물 마실거라고 기침을 콜록콜록하면서 큰 텀블러에 담아와야지」

「물 길어 오느라 연기까지? 기숙사 생활에 도가 텄구나」

「걔네는 그 밤에 라면이 미치도록 먹고 싶었나…. 달이 너무 예뻐서 나갔다고는 하더라」  

    

모험을 감행하고 간 데가 편의점이라는 게, 라면 한 젓가락 집어 올리다 발각되었다는 게 코미디 같았다면, 벌점을 주고 라면을 허용한 사감 선생님의 융통성과 현실성 있는 지도력에는 감탄했다. 수십 년 전 나는 기숙사 탈출을 대형 사건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제는 벌점을 받거나 감성에 젖어 즉흥적인 행동을 했다고 인생이 크게 어긋나지 않음을 안다. 계획 수정과 타협의 연속인 양육 경험은 빳빳했던 삶의 기준을 물렁물렁하게 바꾸었다.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어쩌다 지키지 못해도 할 수 없지, 그때는 그 상황에 맞게 대처하면 되지라는 능청스러운 유연함을 갖추게 되었달까. 나는 라면 먹다 걸리면 벌점이니 삼가라고 하기보다, 벌점 받았다는 연락이 와도 놀라지 않는 쪽을 택했다. 물어보지 않았지만 생생한 설명으로 비추어볼 때, 호링이는 기숙사에서 라면 좀 먹어본 사람 같았다.      


Photo by Markus Winkler

https://www.pexels.com/ko-kr/photo/13796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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