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고 Oct 26. 2023

초록 물병에서 소주 맛이 난다

술알못 엄마가 자녀에게 건네는 말

여름 방학을 맞아 돌돌이가 집에 왔다. 짐에서 초록색 플라스틱 물병이 나왔다. 작년에 구매한 1.3ℓ 용기로, 돌돌이와 호링이가 색깔만 다르게 쓰고 있다. 한 학기 만에 본 물병은 사용감이 없었다. 돌돌이는 물병을 식탁에 올려놓더니 동생을 불렀다.

「호링, 너 회색 물병 아직 있지?」

「어. 왜?」

「나랑 바꾸자」

「어. 근데 왜?」

「이거 한번 쳐다봐봐. 생각나는 거 없어?」

이쯤 되니 나도 호기심이 생겨 퀴즈에 합류했다. 열심히 들여다봐도 연상되는 게 없었다. 호링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했다.

「딱히 없는데」

「진짜? 보자마자 앗 이건 소주병이다 그런 느낌 없어?」

「별로. 그럼 이제부터 형이 회색 써」

호링이는 방으로 가고 돌돌이와 내가 주방에 남았다. 이번에는 내가 물어볼 차례였다.

「돌돌, 이렇게 큰 소주병이 있어? 게다가 이건 유리도 아닌데」

「엄마가 몰라서 그래. 초록색 펫트 병에 든 대용량 소주가 있어. 완전 이 물병 색이야. 엠티 갈 때 맨날 사거든. 제일 싸서」

「근데 소주병이랑 물병이랑 비슷하면 무슨 문제가 생겨?」

「이 병에 있는 물을 마시면 뇌가 혀로 소주 맛을 전달하는 기분이 들어. 쓴맛이 느껴진달까? 그동안 편의점 생수 사다 먹었는데 호링이랑 바꿨으니까 다시 물병 쓸게」     


초록색 병을 보면 자동으로 소주 맛이 떠오른다는 대학교 일 학년 아들의 술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돌돌이는 술과 친하지 않은 집에서 자라 선행학습을 못 했지만, 또래의 음주 문화를 따라가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언젠가 돌돌이와 길을 가다 차도와 보도를 구분하는 블록에 앉아 큰 소리로 대화하는 취객 두 명을 보았다.

「저 사람들 위험하게 저기 앉아있냐」

「그래도 시끄럽게 떠드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이 있는 거야. 홍대 앞에 가면 조용한 길거리 투숙객이 많아」

「조용한 투숙객?」

「술 취해서 야외에서 자는 사람들 말이야」

「몇 시에? 밤새도록 그러고 있어?」

「아마도? 난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만 있었으니까 그 이후엔 어떤 분위기인지 모르지」

「그렇구나. 막차는 몇 시인데?」

「12시 8분」

자정 넘어서니 꽤 늦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아꼈다. 나한테 막차 시간을 앞당기는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돌돌이의 귀가 시간에 영향을 줄 수 없을 터였다.     


나는 매일 술 마시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 어릴 때부터 술이 싫었고, 술 못 하는 배우자를 만나 더 멀어졌다. 아들은 술에 대한 편견이 없으니 술과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삶을 꾸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돌돌이가 본인의 주량을 알고 취향을 찾으면 좋겠다. 어떤 때 술이 생각나고 어떤 때 피하고 싶은지 감정 변화를 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 축배가 필요할 때 상황에 맞게 준비하는 센스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이런 경지에는 절제를 알며 삶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법이다. 술과 담쌓고 지내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작가의 이전글 빨래 독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