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혼자서 하라더니

by 반고

은호는 혼자 양치질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자기 여행 가방을 쌌다. 어릴 때는 아들이 챙긴 짐을 내가 확인했고, 조금 컸을 때는 물건의 위치를 알려주는 정도의 도움을 주었다. 올해 1학기에 있었던 수학여행과 2학기에 열린 코딩 대회 출전도 자신이 알아서 짐을 챙겼다. 이대로라면 이번 달 미국 연수에 가져갈 짐도 스스로 싸는 게 맞겠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가방 꾸리는 것을 돕겠다고 나섰다.


“은호야, 양말 몇 개, 셔츠 몇 개 이렇게 말로 설명해 주면 내가 캐리어에 짐을 넣어볼게. 빨래할 게 있는지도 봐야 하니까 오늘 대충 싸보고 내일 마무리하자.”


내가 적극적으로 관여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족 없이 혼자 9일 동안 떠나는 긴 여정은 처음이고, 가을·겨울 옷이라 짐이 많을 터였다. 효율적으로 짐을 챙겨야 부피가 줄고 여행지에서 지내기 편할 것 같았다. 내가 지퍼 달린 여행용 수납 주머니에 종류별로 짐을 넣는 동안, 은호는 각종 세안용품을 작은 용기에 옮겨 담았다.


아들은 초벌 짐 싸기를 마친 후 옷을 더 사야겠다고 말했다. 매일 다른 옷차림으로 사진 찍고 싶은데, 지금 있는 의복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다음날 상점에 가기로 하고 은호 방을 나오려는 찰나, 갑자기 아들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형 옷 중에 뭐 없을까?”

“오, 좋은 생각인데? 스타일 참고할 겸 한번 살펴보자.”

우리는 옆방으로 가서 옷장을 열어보았다. 은호는 상의 몇 벌을 입어보더니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았다.

“나도 이런 걸 사면되겠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이 옷을 빌려 가면 어떨까?”

준호에게 물어보니 “2년간 아무도 입지 않는 옷인데 누구라도 입는 게 좋지요.”라며 흔쾌히 허락했다. 은호는 본인이 가지고 있던 옷, 형한테 빌린 옷, 새로 산 옷을 조합하여 여행 준비를 마쳤다.


물리적인 짐 싸기는 여행 직전에 했지만, 행정적 준비는 더 이전부터 한 셈이다. 지난 금요일에 학교가 파하자마자 아들은 은행 창구를 방문했다. 사용 중인 체크카드를 VISA 카드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금융 업무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를 위해 내가 옆에 있었지만, 직원의 안내를 듣고 자신에게 맞는 서비스를 선택하고 태블릿에 서명한 것은 은호였다. 해외 결제 청구 방식의 종류를 알게 된 아들은 어떤 게 자신에게 유리할지 고민하다가 대부분 사람이 한다는 방법(현지 화폐로 결재하고 통장에서 원화로 빠져나감)을 골랐다. 은행에서 혼잣말로 “달러가 너무 오르면 안 되는데…”하더니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는 미국 대선의 여파로 환율이 높아졌다며, 자신이 사용할 돈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아들은 기념품으로 후드티를 살 거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모자로 바꾸더니, 결국 상대적으로 저렴한 반소매 티셔츠를 사 왔다.


짐 싸기와 풀기가 한 세트라고 생각했을까, 은호는 연수를 다녀온 후 짐을 정리하지 않고 내가 가방을 열어보자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 평소대로라면 아들에게 빨래는 세탁기에 넣고, 캐리어는 베란다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을 것인데, ‘바쁜 고등학생인데 내가 대신해 줘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건 핑계고 자녀에게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아들에게 긴 여행이니까, 짐이 많으니까, 해외에서 준비물 빠뜨리면 곤란하여서라며 가방을 챙길 때부터 도와준다고 한 데에는 빈 둥지 증후군의 여파로 심란한 내 마음을 잊기 위한 전략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Photo Credit:

https://pixabay.com/illustrations/suitcase-luggage-baggage-tourist-8510536/

keyword
작가의 이전글뒤늦게 찾아온 빈 둥지 증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