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시골’이라는 단어는 할머니의 포근함과 더불어 항상 낯선 경험에 대한 기대감을 주었다. ‘시외버스’라니 이 얼마나 일상 외 스러운(?) 설레는 경험의 시간인가. 그 기대의 한 자락엔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여름밤 납량 소설도 포함되었다. 유난히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해 여름밤, 그날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내 기억 파일에 자리했다.
경기도 화성초등학교 인근 마을에서 한 할아버지가 돌연 집을 나선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은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갯벌에 바지락을 캐러 가신 날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할아버지만 귀가를 안 한 것이다. 이상한 일은 다음날부터 벌어졌다. 동네 여기저기서 그 할아버지를 봤다는 목격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름간 목격담만 이어졌지 그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거나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리고 보름에 한번 모여 공동 작업을 하는 날이 다시 돌아왔고 갯벌에 모인 어르신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사라졌던 그 할아버지가 저 멀리 갯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할아버지에게 달려간 어르신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할아버지는 두 발이 갯벌 깊숙이 박힌 채 앉은 자세로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
자정에 볼펜을 쥐고 ‘분신사바’를 외치거나 칼을 물고 거울을 보면 충격적 사실이나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등의 도시 괴담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 한 동안은 물속에 앉아 조류의 흐름에 흔들흔들 춤추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악몽을 꾸곤 했다.
어린 시절 우화나 속담, 전설 등이 맡았던 역할을 현대에 와서는 영화가 대신한다. 관객에게 예상치 못한 충격과 낯선 순간을 경험하게 하고 대중은 이를 오래도록 기억한다. 예매를 위해 극장 앞에 줄을 선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버스 창문을 열고 이렇게 외친 사람이 망쳐버린 주말의 극장 나들이처럼 말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죽었어!”
심리학자 피아제Jean Piaget는 인간에겐 낯선 대상이나 환경에서 일종의 불편을 느끼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고 지적했다. 두려움과 불편함을 호기심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인지능력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성과 감정에 지진을 느낀다. 인간의 감정은 한 가지 감정이 활성화되면 다른 감정으로 바로 이동하기 어렵다. 궁금함에 사로잡힌 순간, 여타 감정의 개입을 차단하는 보호막이 쳐지는 순간이다.
많은 학자들이 애플의 혁신은 스티브 잡스의 강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시각도 여기서 비롯한다. 인간은 호기심의 강도에 따라 대상에 대한 관심을 넘어 집요함까지 가지게 된다. 강함 호기심은 다른 감정을 차단해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하고, 이는 공감을 원한다는 강한 신호로 해석된다. 인지발달 과정에 있는 어린아이들이 집요할 정도로 부모에게 질문을 해오는 것도 같은 이치다. 부모 역시 이에 대해 귀찮다고 대응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답하고 또 아이들에게 반문하는 대화를 전문가들은 권한다. 그것이 아이들의 인지발달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부모 역시 아이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아이를 부정적 감정으로 대하지 않는 순기능을 가지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결국 서로가 공감대를 찾는 과정이다.
대중이 모든 것에 아이들처럼 호기심이 충만하다면 마케팅이나 광고시장은 애초에 형성되지 못하지 않았을까? 회고절정은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갈수록 새로울 것 없는 일상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빠름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호기심 또한 나이와 경험이 많을수록 줄어들어야 함이 타당하다. 그러나 행동 경제학자 로웬스타인Lowenstein은 정 반대라고 말한다. 인간은 기존 지식의 양이 일정 이상 축적되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부분에 더욱 집착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론은 우리에게 새로운 힌트를 준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출발이 주목과 관심에 있지만 상대의 관심사를 정확히 간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상대가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알 수 없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다. 바로 낯선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대가 알지 못할 낯선 것으로 지식의 공백을 느끼게 하고 이를 통해 호기심을 이끌어 낸다면, 당신의 말에 공감하게 하는 사전작업은 성공한 셈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들었던 갯벌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잠시 잊고 있었다. 궁금하지 않은가? 할아버지는 왜 갯벌에 앉아 돌아가셨을까? 그렇다면 동네에서 할아버지를 봤다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를 본 것인가? 이런 궁금증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다. 당신에게 하지 않은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갯벌에 앉아 이미 돌아가신 지 한참 된 할아버지는 한 손에 소주병을 꽉 움켜잡고 계셨다.
고무 매트리스로 뒤덮은 놀이터 한 편의 모레 웅덩이는 아이들의 창의성을 자극한다. 비어 있는 것은 채워야 할 본능을 자극하고, 채워야 할 무엇인가는 다른 말로 호기심이다. 방송이나 연설 도중 인위적 포즈pause를 통한 일정 이상의 정적은 상대의 주목을 끌어낸다. 왜? 비어 있는 소리의 간극에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즉각적인 추측이 모든 청자에게서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강조의 3법칙이라 말한다.
첫째,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천천히 말한다.
둘째,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을 더 크게 말한다.
셋째, 강조할 말 앞뒤에 인위적인 공백을 준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순간 지식의 공백을 자극받고 주의를 기울이곤 한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오랜만에 등장한 가수나 배우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지 않은가? 친구들과 대화 도중 학창 시절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녀 혹은 웃음유발자였던 괴짜 녀석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지 않았는가? 이럴 때 우린 이렇게 말하곤 한다.
“왜 있잖아! 그 친구!”
“아, 저 가수 이름이 뭐였지?”
“왜 그 영화에 나왔었잖아!”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의 예고편은 악마의 편집이라 불린다. 충격적인 뭔가를 본 듯 눈을 부릅뜬 패널의 클로즈업된 표정, 뜬금없이 눈물을 훔치는 여성 출연자나 마치 실제 화가 나서 싸움을 하는 듯 언성이 높아진 남성 출연자들을 짧게 교차해 보여준다. 시청자는 엄마가 사 오라고 주문한 물건들을 메모하지 않을지언정 예능 프로그램 다음 회의 본방 날짜와 시간을 휴대폰에 알림 설정한다. 인기 있는 드라마의 경우 시청자의 관심을 잡아두기 위해 예고편을 따로 하지 않는 전략을 쓰기도 하지만, 만만치 않은 시청자의 원성을 견뎌야 한다.
피아제가 인간이 낯선 대상이나 환경에서 일종의 불편을 느끼고 이를 호기심으로 해결하려 한다고 주장했듯 지식의 공백은 어쩌면 인간에게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중년에 접어들어 하는 가장 흔한 대화의 그림은 스무고개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시작된다. “아, 그거 뭐였지?”라는 단발성 신음으로 말이다. 분명 아는 것인데 낯설다. 낯선 것에 대한 지식의 공백은 불편하고, 이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호기심을 느낀다. 해결하지 못하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치 고통스러운 듯 행동한다. 아니 심지어 고통이 실제 느껴질 때도 있다. 관심을 잡아두는 비결은 궁금하게 하고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들은 대화를 이렇게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너희 그거 알아?”
모나리자의 눈썹은 왜 없는 것인가? 그리지 않았을까? 미완성일까? 누군가 지웠을까? 또한 모나리자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루브르 박물관 앞에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종일 긴 줄이 그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유명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 미스터리함에 비결이 있다. 낯선 것, 차별화된 것을 넘어 독창성을 인정받은 무언가는 항상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면 일단 대화의 아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이다. 그리고 이 관심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궁금증을 어어 가는 것이다.
고흐Vincent van Gogh의 마지막 작품은 <나무뿌리들>이다. 37년의 짧을 생을 살며 10년의 전업화가로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스케치를 남긴 그의 마지막 작품, 그 상징성으로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배경이 어디인지는 묘하게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간 원작인 그림을 빼고 유일한 단서는 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의 처남이 남긴 편지 속 한 구절이었다. “고흐가 죽던 날 아침 햇빛과 생명으로 가득 찬 숲을 그렸다.”
130년간 아무에게도 밝혀지지 않았던 미스터리는 예기치 않은 코로나 19 사태가 단서가 되었다. 반 고흐 연구소의 한 박사는 코로나 봉쇄로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한 엽서 속 사진에 나오는 나무뿌리 형태가 고흐 그림과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수목 학자 등의 검증을 거쳐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 질환을 앓던 생의 막바지에 요양하던 오베르쉬즈 우아즈라는 마을임을 알아냈다. 고흐의 마지막 그림 <나무뿌리들>의 배경 장소는 그가 묵었던 숙소에서 불과 150m 떨어져 있었다.
궁금하게 하기나 미스터리 기법의 묘미는 단연 청자나 독자에게 ‘전능감’을 느끼게 한다는데 있다. 전능감은 인간의 본능이다. 갓난아기의 울음은 어머니에게 배고픔의 신호로 받아들여지며 이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통해 즉시 해결된다. 이는 아기들이 느끼는 일종의 환상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이 본능은 성인이 되어서도 남아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가진 지식보다 많이 안다는 착각을 안고 산다. 그렇기에 지식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며 무엇인가를 알아냈을 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알아냈다는 자체만으로 쾌감을 느낀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궁금함을 느끼면 그 이후의 결말을 예상하기 시작한다. 지식의 공백이 가져온 고통이 그들의 관심을 잡아두게 하는데도 유용한 것이다. 마치 스스로 내기를 하듯이 “아마 이렇게 될 거야~!” 혹은 “거봐, 내 말이 맞지?!”와 같은 쾌감을 선사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적당한 빈틈을 보여주는 것은 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당신에게 집중하게 한다. 어린 시절 놀이터를 떠올려 보라. 놀이 기구라고는 그네, 시소, 철봉이 다였고, 바닥에는 모래가 가득 쌓여있었다. 오색의 놀이기구와 안전한 고무로 바닥을 모두 덮어 버린 놀이터는 오히려 재미없다. 아이들의 상상력마저 제한한다. 몇 개 안 되는 놀이기구에 모래로 가득했던 놀이터는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이 빈 곳을 창의적인 놀이로 채웠다. 모래로 소꿉놀이를 하며 부부가 되어 보기도 했고, 성을 짓고 왕이 되어 보기도 했으며, 땅따먹기를 하며 세계 정복의 꿈을 꾸기도 했다.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꽉 짠 니트는 덥다. 몸을 옥죄어 자유로울 수 없다. 궁금증이 마련한 빈틈에는 창의성이 움튼다. 익숙하고 평범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전혀 호기심을 두지 않는다. 하물며 당신의 말을 기억하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당신의 언어를 기억하게 하는 방법은 평범한 것을 낯설게 하는 의외성(unexpectedness)에 있다. 어쩌면 당신은 내일부터 이렇게 대화를 시작할지 모른다.
“혹시, 그거… 아세요?”
참고 : 고흐의 마지막 그림과 관련한 이야기는 필자가 더빙한 OBS 월드뉴스 기사의 일부를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