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김포공항역에선 마치 학창 시절 등교시간에 임박해 닫히기 직전의 교문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학생과 같은 여행객을 흔히 볼 수 있다. 탑승 시간에 여유 있게 도착해 긴 무빙워크의 편의성을 조금 누려볼 량 치면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는 조급증(Quick Back) 여행객들에 왼팔이 수난을 겪는다. 지하철 문과 공항 탑승 게이트가 마주 보듯 가깝다고 생각하는 기억의 배신이라고 할까? 편집된 영상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겪는 부작용이다. 유난히 빠른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 IT와 스마트 기기의 발달과 시간을 뛰어넘는 듯 짧게 편집된 영상의 시대는 이런 조급함을 달래주기 충분하다.
영상 한 컷(한 장면)의 일반적인 길이는 10초 내외다. 먹성 좋은 사람이 들이마시듯 하면 짜장면 한 그릇도 먹을 시간이지만, 소위 ‘먹방(먹는 방송)’ 유튜버YouTuber들은 10인분은 족히 될 다양한 요리들을 펼쳐두고 10초 단위의 컷 수십 개를 이어 어느 순간 빈 접시들만 남겨둔다. 코로나 19가 가져온 단절의 시간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급격한 성장을 부추겼고 이는 영화를 비롯한 영상 문법을 바꿔 놓았다. 그에 따라 컷의 길이는 더 짧아졌고 호흡과 대사가 아닌 자극적인 자막이 메시지를 대신한다.
짧은 스토리를 이어 붙여 2시간여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해서일까? 아니면 위와 같은 조급증의 사회를 비판한 목소리였을까? 우디 앨런Woody Allen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뉴욕에 있을 때는 유럽에 가고 싶고, 유럽에 가 있을 때는 뉴욕에 가고 싶다.”
영화 <서편제>의 백미는 여주인공 송화(오정혜 분)가 부르는 진도 아리랑이 청산도 언덕의 아름다움과 어우러지고, 세 주인공이 덩실거리며 내려오는 장면이다. 5분 40초간 고정된 화면은 이내 주인공들이 사라진 후에야 다음 장면으로 전환된다. 5분이 넘는 긴 시간을 관객들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하나의 장면에 주인공들의 아픈 가족사를 모두 녹여낸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자인 김경훈 사진기자도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짧은 말을 남겼다.
“사진은 언어다.”
그가 상을 받은 보도 사진의 제목은 ‘캐러밴 모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 폐쇄 조치를 내렸고 이에 반대하는 평화 시위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지대인 티후아나의 국경 장벽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때 캐러밴(중남미 이민자) 한 무리가 뛰기 시작했고 국경수비대는 최루탄을 발사한다. 기저귀를 찬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엄마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캐릭터 티셔츠를 입었고 피어오르는 최루탄 연기 뒤편으로 높고 단단한 장벽이 보인다.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힘과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그 사진이 내포한 ‘스토리’ 때문이다.
잘라 붙인 영화의 필름이나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스토리처럼 인간의 기억은 마치 켜켜이 쌓아 올린 문서 파일과 같다. 적재적소에 알맞은 말을 한다는 것은 이 문서 더미에서 얼마나 빨리 필요한 이야기를 찾아내 언어화하는가에 달려있다. 건망증이 심하다거나 나이가 들어 기억이 쇠락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문서 파일 속에서 원하는 파일을 찾아내 다시 읽어내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된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기억력을 유지하고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내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꾸준한 메모와 스크랩 그리고 독서를 통한 지식의 보강과 확장이다. 이야기꾼들의 언어는 끊임없는 소재의 수집과 저장 그리고 꺼내 쓰기의 훈련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스토리로 저장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스토리는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심리학에선 이를 ‘CHUNK(청크)'라 표현한다. 말 그대로 상당히 많은 양의 덩어리를 의미하는데, 언어학에서는 이를 한꺼번에 배울 수 있는 말의 모둠이라 정의한다. 나는 이를 ‘기억의 덩어리’라 칭하겠다.
기억의 덩어리는 단편적인 사건 하나가 영화 제목처럼 간단히 저장되는 것이 아닌 일련의 타임테이블(시간 순서)을 가지고 이어지는 롱 테이크long take 영상과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출근’은 집을 나서 차를 타고 회사에 도착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매일 아침 반복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 나름 복잡한 과정을 포함한다. ‘출근을 한다’는 것은, 아침 6시에 휴대폰 알람이 울려 아침이 왔음을 인지하고, 두어 번의 반복 알람을 들은 후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서너 번의 하품과 동반한 기지개를 켠 후, 방문을 열고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에 자리 잡은 냉장고의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 컵에 따른 후 마신다. 그리고는 잠시 아직 어두운 창밖을 무심히 응시하고 화장실의 전원 스위치를 누르고는 문을 열고 간밤의 냉기가 남아 있는 화장실의 슬리퍼를 신고 벽에 붙은 거울 앞에 서서 칫솔을 집어 들어 치약을 묻혀 이를 닦는다. 이어질 일련의 과정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제 여러분의 머릿속에 그려질 것이다. 이렇듯 사람의 기억이란 그 기억에 수반되는 수많은 행동들이 마치 영화 속 롱 테이크 장면처럼 저장되는 과정이다. 《회복 탄력성》의 저자 김주환 교수는 이에 대해 "We live our story."라 말했다.
사진이나 그림은 전체를 단번에 감상하는 게 가능하지만 음악은 한순간에 감상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글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시작부터 순서대로 읽어 내려가야 비로소 전체 이야기를 음미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완벽한 이야기란 청자가 그 이전의 이야기를 몰라도 되며 그 이후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기억이 하나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근거를 제시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석기시대 부족 사회에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발전했다. 누군가에 대한 옳고 그르다는 이야기를 통해 그릇된 행동은 벌하고 옳은 행동에는 상을 줬다. 이는 부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협력하도록 독려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런 역할을 했던 이야기꾼들은 그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이야기가 인간의 본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태초부터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야기의 효용을 보여주는 일화와 삶의 기억마저도 완결된 하나의 이야기 형태로 저장된다. 모든 사람들이 스토리텔링 방식의 전개에 자연스럽게 동화됨은 본능을 넘어 과학이다.
어린 시절 베갯머리에서 해주시던 가쁜 숨이 섞인 할머니의 조곤조곤한 이야기가 마음의 평온을 가져온다. 잠자리에서 듣는 엄마와 아빠의 동화 한 구절이 행복한 꿈나라로 이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과장 섞인 몸동작을 섞어 엄마에게 풀어내는 학생들, 오늘 하루 있었던 파란만장한 일들을 저녁 식사에서 무용담으로 펼쳐 보이는 직장인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의미의 이야기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