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근현대 형성에 대한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

책이야기> 서평 ②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쑹녠선,역사비평사, 2020


>>박상민(충북 주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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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역사 서사: “낙후하면 매 맞아야 한다”


쑹녠선은 이 책에서 동아시아의 근대 형성에 대한 정형화된 서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서사를 찾는 시도를 하고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판에 박힌 서사 중 하나는 ‘중국이 폐쇄적이었기 때문에 매를 맞았다’는 것이다.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중국 황제의 조정을 방문하여 영사관 개설을 희망했다. 매카트니는 새롭게 산업화한 영국에서 예물들을 선별하여 황제에게 가져다주었다. 건륭 황제는 그를 내쫓았다. … 영국인은 1830년대 돌아와 총과 대포를 사용해 무역 개방을 강행했고, 중국의 개혁 노력은 붕괴, 치욕 …으로 끝났다.” 2013년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표지 이야기에 실린 글이다.

여기에 담긴 논리는, 아편 전쟁의 원인은 중국이 자유 무역을 거부하고 천하의 중심을 자임하면서 외래 문화를 배척하고 선진 문명을 적대시하며, 평등 외교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담겨 있다. 1) 유럽 자본주의‧민족 국가 체제가 ‘현대’다. 2) 중국/동아시아에는 ‘현대’**가 없다, 3) 중국/동아시아는 정체되어 있으므로 외래의 충격이 있어야만 ‘현대’에 진입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현대’, ‘현대화’는 우리가 보통 ‘근대’, ‘근대화’라 표현하는 시기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저자의 ‘현대’ 개념은 일반적으로 근‧현대로 부르는 시기와 개념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저자의 표현 그대로 ‘현대’로 표기한다.





정형화된 동아시아 서사를 극복하는 방법


1) 합당한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정형적 서사에 질문 던지기

저자는 동아시아 역사를 야만‧낙후‧몽매와 문명‧개방‧선진으로 강제로 절단하는 경계인 ‘현대’를 ‘식민 현대’라고 고쳐 부른다. 그리고 정형화된 서사에서 국제법 개념과 주권 상상을 가지고 ‘청조는 외국과의 ‘평등’한 교류를 거절했으며 근대 국제 관계 개념이 결여되었다’고 지탄하는 데 대해 이렇게 반문한다. 누구의 ‘평등’, 어떤 의미의 ‘평등’인가? 불평등 조약이 가져온 ‘평등’인가? 19세기 구미 열강이 만들어간 조약 체제의 세계는 ‘평등’이 아닌 제국의 질서가 아니었나? 동아시아에서 구질서가 해체된 뒤 도래한 것은 민족 국가 체제가 아니라 일본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 질서 아니었나? 설사 20세기라 하더라도 주권 국가 체제가 실현된 기간이 얼마나 되었나? 아편 전쟁은 일군의 밀수 상인들이 원래의 무역 방식을 깨뜨리기 위해 그럴듯한 이데올로기의 지원 아래 도발한 전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유럽의 ‘식민 현대’ 논리를 따르는 동아시아 서사는 전통적 ‘조공 체제’가 ‘주권 체제’로 대체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조공 체제’로 지칭된 전통 동아시아 질서와 현대 주권 국가가 구성하는 국제 관계가 완전히 이질적인 질서인가? 그리고 전통 질서는 유럽의 무력 아래 무너지고 반드시 ‘현대’ 조약 체계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가?


역사를 돌아보면 동아시아 세계는 대체로 초강대국과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몇몇 국가로 구성되었다. 이는 세력 균형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유럽의 국가 간 관계와 다른 점이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약소국의 이성적 선택은 대국과 맹약을 맺고 기존 권력 구도 아래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최대 이익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지역 내 권력 구도가 바뀔 때 약소국은 자신의 연맹 대상이나 전략을 바꿀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조공 체제’ 하의 국가 간 권력 관계는 쌍방이 함께 구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공 체제에서 국가 간 관계는 공식적‧이상적으로는 사대 의례의 형식을 따랐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이익의 상호 작용이 있었다.


조공 체제는 예부(禮部)의 ‘외교’라 할 수 있는데, 예부 ‘외교’와 현대 외교는 국가 간에 어떻게 교섭해야 하는지를 제도와 원칙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둘의 차이라면 예부 ‘외교’는 ‘천하’가 예제(禮制)를 둘러싸고 건립된 등급 질서라고 인식하는 데 반해 현대 외교는 ‘국제’를 주권 국가가 공법 원칙에 따라 구성한 평등 체계라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는 사실 두 외교의 이상적 상태일 뿐 현실에서 운용될 때는 이상적인 모습과 큰 격차가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매우 큰 유사성이 있다. 따라서 어느 제도가 더 문명‧선진이고 어느 것이 우매‧낙후한지 말할 수 없다.


1689년 8월 27일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할 당시 청과 러시아는 이른바 현대 민족 국가가 아니었다. 흔히 조약 방식으로 국경을 확정하고 인적 왕래를 규제하는 것은 주권 국가 체제의 특허라고 여겨지지만,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보듯 주권 조약 제도는 청이 주도한 ‘천하’ 제도와 공존하였다. 주권 개념이 ‘해양 문명’의 ‘조약 체제’와 민족 국가에만 존재하는 배타적 특징은 아닌 것이다.



2) 선형적 역사 인식을 벗어나 역사의 다원성 인식하기

저자는 인류 역사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며, 미래는 과거보다 ‘선진’적이라는 단선적 발전주의 역사관을 비판한다. 대신 ‘현대’는 다원적이라고 말한다. 즉, ‘현대’는 하나의 목적이 설정해놓은 방향이 아니다. 유럽으로부터 전 지구로 확장된 기제는 더욱 아니다. ‘현대’는 다원적이며, 서로 다른 ‘현대’ 간의 상호 작용이 그들 간의 상호 배척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편 전쟁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유럽 식민 세력의 확장에 따라 이루어진 동아시아의 전환은 ‘식민 현대’라 부를 수 있다. 그것은 현대로 가는 다양한 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유럽의 ‘식민 현대’와 다른 ‘동아시아 현대’는 유럽 문화와 같은 유형의 발전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그렇다고 완전히 고립적이지도 않다. ‘동아시아 현대’는 유럽 중심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비판적으로 넘어서면서도 동아시아(혹은 중국) 중심주의에 빠지는 걸 경계하면서 찾아야 한다.


흔히 동아시아의 현대화는 국가 형태 면에서 제국에서 민족 국가로의 전환, 국제 관계 면에서 조공 체제에서 조약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여겨진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반박한다. 첫째, 제국과 민족 국가, 조공과 조약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세계 질서를 주도한 영국 자체가 민족 국가가 아니었고,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전까지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 국가는 몇 개 없었다. 조공 체제와 조약 체제는 서로 용납될 수 있었고, 반드시 서로 배척하는 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조약 체제는 주권 평등을 가정하면서도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는 모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제국 대 민족 국가, 조공 체제 대 조약 체제의 대립은 서양의 현대성과 동양의 전통성 간의 대립에서 나온 것인데, 동아시아의 복잡한 변화는 서양에 대한 모방과 추종만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 셋째, 이 논리는 변화의 외부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데, 천하 구도가 무너진 것은 국내 및 역내‧역외의 충돌이 서로 교차하고 내란과 외환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아편 전쟁만이 아니라 태평천국운동, 서부 변경과 산시‧간쑤‧신장 지역의 민란 등 내‧외부의 위기를 함께 놓고 보아야 당시 중국이 직면했던 도전과 그 대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3) 개념 뒤의 이데올로기‧폭력성 드러내기

에도 막부가 네덜란드와 중국 상선만 나가사키에서 무역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에 대해 흔히 ‘쇄국 정책’으로 표현한다. 저자는 ‘쇄국 정책’ 개념 뒤에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말한다. ‘쇄국’이란 표현과 달리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 외에 쓰시마섬, 사쓰마 번, 마쓰마에 번을 통해 조선‧류큐‧에조(에미시)와의 왕래를 유지하면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의 무역권을 연결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외에 러시아인도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다. 왕래가 금지된 것은 천주교와 그 배후의 스페인‧포르투갈뿐이었다. 막부는 특정 대상의 왕래를 금지했을 뿐 여전히 해외 정보에 강한 관심을 보였고, 해외 무역에 대해 지속적인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난학이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쇄국’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이전에 폐쇄적이었던 동아시아를 영‧미가 강제로 ‘개국’시킨 의의를 돋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역사를 ‘쇄국’과 ‘개국’으로 파악하는 것은 구미가 주도하는 ‘현대’ 서술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조공 체제가 조약 체제로 대체되면서 국제 질서는 국제법 체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국제법 체계는 주권 평등을 핵심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이른바 ‘문명국’들은 자신들이 ‘야만국’으로 간주한 국가는 국가의 성격을 갖추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국제법상 주권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다. 식민주의가 확대됨에 따라 국제법은 식민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1885년 ‘보호국’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으며, 1888년에는 ‘무주지’ 원칙이 등장하였다.



4) 초국가적(trans-national)‧초지역적(trans-regional) 시각과 비교‧연관의 방법으로 역사 바라보기

대항해 시대 이래 학자들은 세계의 문명 지역을 바다를 개척한 해양 문명과 내륙을 지향하여 바다를 등진 대륙 문명을 구분하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중국 바다의 봉쇄와 개방은 국가와 해상 집단 간의 역량 각축에 따라 변동하였으며, 봉쇄 정책의 추진은 해양 무역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해양 무역의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청대 해금 시기는 매우 짧았을 뿐 아니라 그 시기에도 동아시아 해역은 조금도 적막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한 국가의 시각만으로는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정성공의 활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현대 초기의 유럽과 동아시아에 대한 비교를 통해 유럽이 대항해의 시대로 나아간 것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무역로가 막혀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반면, 중국과 일본은 통일에 따른 장기적 안정으로 나아가면서 해외 무역을 국가 통제하에 둠으로써 안보상의 잠재적 위험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처럼 유럽과 아시아의 해양 개척 방식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그것은 문명적 차이가 아니라 역사적 우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국의 피침략의 역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중국이 실패한 이유를 선진 문명과 교류하지 않은 폐쇄성‧보수성에서 찾았다. 그리고 청이 문명 교류를 가로막았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청이 유럽 선교사의 활동을 금지하여 명 말부터 시작된 현대 과학 기술의 수입을 강제로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청 조정이 용교(容敎)에서 금교(禁敎)로 변한 까닭이 중국의 보수와 오만 때문일까?


중국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의례가 교의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신흥 교단인 예수회의 성장은 포르투갈의 국력이 성장한 때와 시기를 같이 한다. 그러나 17세기 후기부터 예수회는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해지면서 프랑스가 교황청의 신임을 받는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해외 선교의 임무를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이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체스코회 등과 합류하여 천주교 내부의 반예수회 세력이 되었다. 동아시아를 넘어 초지역적(trans-regional) 시각에서 보면, 중국 전례 문제는 단순한 신학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회와 다른 교단, 천주교 국가 간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를 둘러싼 갈등과 알력의 산물이었다. 중국 전례 문제에서 교황청은 유교를 근본적으로 이단으로 간주하고 동아시아 세계 속 ‘천(天)’의 합법성을 부인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다원적 문화 전체를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역사상 다른 문화를 용인하지 않으려 했던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만약 라마승 한 무리를 당신들 국가에 보내서 그들의 교의를 전파하도록 한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말하겠는가?”(옹정제) 17세기 천주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제한적이지만 관용을 얻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네덜란드 신교도들을 살육하고, 위그노를 프랑스에서 추방한 사람들은 누구였던가?


한편, 오늘날의 자유 무역 이데올로기로 볼 때 국가가 광저우 무역에 간여하고 독점하는 방식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특허 경영은 당시 국외 무역에서 통용되던 제도였으며, 전 지구적 무역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데 매우 큰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동인도회사도 모두 국가 특허 독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상(공행) 제도는 자본주의 발달 단계에서 미국의 ‘안전 기금 법안(Safety Fund Act)’(1829) 같은 금융법이 제정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무역 개방 자체는 독립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 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경할 수 있는 정책의 하나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대외 무역은 안전과 이익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느슨해지고 때로는 조여졌다. 청대 광저우의 공행 무역은 중국 대외 무역 정책의 한 부분일 뿐이며, 이 정책이 중국을 지구화의 바깥으로 배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광저우는 지역 무역의 중요한 허브였다.



동아시아 현대의 새로운 서사 찾기

‘동아시아 현대’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중엽까지 ‘조선 전쟁’(임진왜란)과 만주의 굴기가 가져온 대변동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청 제국의 창립은 ‘천하’ 질서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해 온 동아시아 지역 내의 각 정권이 천하의 중심으로서 ‘중화’에 대해 전 시대와는 크게 다른 이해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중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그들의 자아관과 세계관을 모두 변화시켰다. 청조의 지배로 기존 화이의 경계가 약해졌으며, 지역으로는 중원과 내륙아시아 변강을 포함하며, 족군으로는 만‧한‧몽‧회(신장)‧장(티베트)을 포함하는 ‘중국’이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청은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1689)에 이어 캬흐타 조약(1727)을 체결하여 북변의 경계를 확정하고 베이징에서 러시아 상인의 무역을 허가하고 캬흐타에서 변시를 개설하였다. 그에 앞서 1684년에는 해금을 풀어 동남 연해에서 민간 대외 무역을 허가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전통적인 조공과 다른 것으로, 조공 체제의 ‘천하’를 보다 다원적이고 융통성 있는 모습으로 전개되도록 하였다.

한편, 16~17세기에 시작된 중국인의 해외 이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 지역을 아우르는 해상 무역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20세기 들어 동남아 화교 네트워크는 쑨원의 혁명과 항일 전쟁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였다. 1980년대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것도 16세기 이래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화상(華商) 네트워크였다.


17~18세기에는 유럽 선교사들이 청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부의 주요 부문과 직책에 신앙과 문화가 다른 외국인을 임명한 것은 동시대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로, 정형화된 서사와 달리 청 정부가 봉쇄와 보수가 아니라 외래 문화에 대해 개방과 포용의 태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교류는 여러 원인에 의해 중단되는데, 그중 하나는 앞서 보았듯이 청의 폐쇄성이라기보다는 유럽 천주교 세계의 알력과 관련이 있다.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과 만주의 굴기는 해양 교류 네트워크의 성장, 서학의 유입과 함께 동아시아 지식계가 시대적 충격을 대면해서 자신과 타자 그리고 역사를 재해석하며 해답을 구하도록 자극하였다. 청에서는 경세치용‧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문 경향이 등장하여 전통 유학에 새로운 길을 열었을 뿐 아니라 이후의 혁명과 개혁에 중요한 사상적 자원이 되었다. 특히, 홍양길은 economy와 대비되는 동아시아의 경제(경세제민)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었다. 그는 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 문제를 분배 정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맬서스가 빈곤 구제 제도를 반대하고, 도덕으로 생식을 억제하여 인구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대비된다. 일본에서는 난학이 흥성하며 학문의 개방성과 활력을 보여주었고, 고학과 국학이 발달하여 현대 일본의 정신과 사상의 발단이 되었다.


물론 동아시아가 현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없진 않았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인식의 착오라 할 수 있는데,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 동아시아는 중체서용, 화혼양재, 동도서기 등을 내세우며 서양을 학습하면서 자아를 지키는 걸 목적으로 삼았다. 하지만, ‘체’와 ‘용’을 구분하여 자아와 타자의 구별을 강조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이미 구미 자본주의가 구축한 ‘식민 현대’의 틀 속에 갖힌 것이었다. ‘식민 현대’의 체계에서 서양/동양은 곧 문명/비문명이었다. 그 틀을 인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식민 현대’의 인식 체계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인식 착오는 이러한 첫 번째 인식 착오에서 나온다. 즉, 식민주의의 위협에 맞서 동아시아가 저항적 민족주의를 구축하면서 의지한 논리 역시 식민자가 가져온 문명‧진화 논리였다. 동아시아는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부강을 이루기 위해 제국이 되거나 제국에 의지해야 하는 역설과 마주해야 했다.


일본 고쿠류카이(흑룡회)가 추구한 아시아주의는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제국의 길을 가려 한 경우이다. 아시아주의는 (구미의) 식민 현대성을 비판하며 등장했다. 하지만 기존 패권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패권을 추구하고, 아시아를 진흥시킨다는 명목으로 아시아에 대한 식민을 수단으로 삼았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주의는 아시아인이 주도적으로 ‘아시아’를 주창한 첫 번째 시도였으며, 이후 반식민주의적인 새로운 아시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식민주의는 막아야 할 대상으로 보았지만, 식민주의와 함께 온 ‘현대’는 역사의 필연적 방향으로 인식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을 ‘현대’로 만들 것인가? 동아시아가 찾은 방법은 신문화 운동, 루쉰의 『아큐정전』, 신채호의 사대주의 사관 비판에서 보듯 통렬한 자기 비판‧자기 지양, 곧 ‘탈아’였다. 탈아입구가 아닌 탈아자구(自救), 즉, 자기 지양을 통해 스스로를 구하는 것.


식민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식민의 방법을 활용한 일본과 달리 중국의 현대 민족국가 건설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는 길 위에서 펼쳐졌다. 그리고 반제국주의 진영 속에서 인민의 연합, 차별 철폐를 강조하였다. 일본 현대의 형성이 ‘탈서양’을 추구했지만 ‘서양화’로 귀결된 데 반해 중국의 현대 형성은 일본을 타자로 삼았지만 일본이 간 경로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20세기 일본의 ‘아시아주의’가 식민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달리 반둥 회의(1955)의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제3세계 반식민주의 독립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요컨대, 서양과 일본의 멸시를 받았던 중국은 청 말에서 5‧4 운동에 이르기까지, 루쉰과 마오쩌둥에 이르기까지 전통과 식민 현대성에 대한 이중의 비판 속에서 자아 개조를 실현하였고, 구미에 종속되지 않은 독특한 현대화의 길을 걸어왔다. 게다가 식민 약탈에 기대지 않고 외부 원조도 적은 상황에서 초기 산업화를 이루고, 부침을 거듭하다 경제 성장을 이루며 굴기해왔다. 중국이 걸어온 이러한 길에 대해 저자는 “식민 현대를 초극할 가능성”, “검토할 가치가 있는 ‘동아시아의 기적’”, “이상화된 미래상”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몇 가지 질문

1) 500쪽에 가까운 분량의 내용을 줄여서 소개하다 보니 정작 동아시아사의 주요 구성원인 한국 이야기를 많이 옮기지 못했다. 그것은 지면의 제약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한국의 현대 형성에 대한 일관된 서사를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처럼 발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의 현대 형성에 관한 새로운 서사를 구성하는 것은 한국인의 몫이다. 이를 위해서는 도돌이표처럼 처음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의 현대 형성에 대한 정형화된 서사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새로운 서사는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2) 저자가 제시하는 중국의 ‘현대’, 중국의 길이 또 하나의 정형화된 서사나 신화가 될 가능성은 없을까? 중국의 ‘현대’와 중국의 길은 그 형성 과정에서 주변에 가한 제국주의적 폭력을 직시하고 있을까?

저자는 조약 체제에 진입한 뒤 일본이 제국주의적 침략의 길로 나아간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중국이 근대 제국화를 추구한 점은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다. 청은 일본의 대만 침공과 러시아의 일리 점령을 계기로 이역(異域), 이족(異族)인 신장과 대만을 1884~1885년 직할성화하였고, 1882년에는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며 사실상 보호국화하였다. 열강의 침략에 대한 청과 일본의 대응적 방어가 이웃 나라와 소국들에게는 경쟁적 침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한 청의 조치에 대해 "조약 원칙을 이용하여 종번(책봉-조공) 원칙을 한층 더 확인하는 것으로, 양자는 대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긍정하며 각기 병행하는 것"(345쪽)이라고 쓰고 있을 뿐이다.


3) 저자는 역사의 긴 시간대로 볼 때 만주의 굴기는 필연적인 것이었고, 이는 중국 동북 지역의 지정학적‧전략적 위치와 큰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관성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중원에서 만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만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체를 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시각의 전환’은 연관‧비교의 방법과 함께 동아시아/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로웠다. 현행 동아시아사 교과서 중에서도 지도의 남북을 뒤집어 흉노를 중심으로 동아시아를 바라보게 하고, 흉노를 중심으로 당시 동아시아 역사를 서술한 시도가 있다. 저자는 청이 만‧한‧몽‧회‧장을 아우르는 다원성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시각 전환의 방법을 적용하여 회족이나 장족의 눈으로 청의 역사를 바라보면 청의 역사는 어떻게 보일까? 혹은, 시진핑 시대의 중국을 같은 방법으로 바라본다면?


4) 저자는 조공 체제와 조약 체제가 내세운 이상과 원칙에는 차이가 있지만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고, 두 체제의 공존도 가능했다고 말한다. 이는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가 서양의 조약 체제로 전환되면서 동아시아에서 현대가 시작되었다는 '식민 현대'의 단선적 서사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주권 국가 간 평등을 전제로 한 조약 체제의 실상이 국제법을 통해 국가 간 불평등이나 침략,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었다고 해서 ‘조공 체제는 상대적으로 덜 나빴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조공 체제 안에서 약소국의 자주성과 주권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고 해도 자주성의 보장/철폐가 강대국의 선의에 달려 있는 불완전한 것이라면(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속방' 조항을 보라), 조약 체제가 내세운 주권 국가 간 평등의 원칙은 끊임없이 갱신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실현해야 할 이상으로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이 책을 더 풍부하게 읽기 위한 메모

좋은 책은 ‘회로도 먹고, 매운탕으로도 먹는’ 독서법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 교육과 관련한 영감을 많이 받았는데, 그중 두 가지만 적어본다.


1) 교과서 서술에 대한 새로운 상상

이 책은 저자가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중국의 한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수정해서 모은 것이다. 그래서 깊이가 있으면서도 글이 재미있다. 특히 청 왕조 성립 이후 화이 관념의 변화를 다룬 3장 4절과 매카트니 사절단을 그린 만평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6장 5절이 그렇다. ‘역사 교과서가 이렇게 서술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글이다. 검정 교과서 체제에서는 교과서 서술 방식이 크게 변하기 어렵겠지만 앞으로 인정제나 자유 발행제로의 변화를 전제로 말한다면, 이 책처럼 잘 쓴 글을 분석해서 역사 교과서 서술의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매 편의 글 자체도 좋지만, 또 하나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한 편의 글이 마무리되는 부분에서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거나 다음 주제와 관련한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1장 3절, 4장 2절, 6장 4절 등) 새로운 교과서 서술의 형식으로 실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2) 역사와 매체

국어과의 『언어와 매체』처럼 역사과도 『역사와 매체』라는 과목이 있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시각‧영상 매체가 학교 역사 교육과 공공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에서 인정 교과서로라도 만들어지면 좋겠다. 꼭 그 과목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역사 수업에서 시각‧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수업할 수 있는 주제들이 이 책에는 여럿 나온다.


∙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와 만들어진 전통(34쪽)

∙ 영화 "명량"과 임진왜란에 대한 한중일 3국의 서사(60쪽)

∙ 『이코노미스트』의 시진핑 표지 사진과 '청의 봉쇄와 보수'라는 신화(140쪽)

∙ 영화 "사일런스"와 숨은 기리시탄(탄압을 피해 종교를 포기한 걸로 위장한 천주교도)의 아이러니(185쪽)

∙ 매카트니 사절단의 건륭제 알현 만평과 오리엔탈리즘(257쪽)


사족. 글도 좋고, 번역도 훌륭한데, 찾아보기(색인)가 없다. 부디 많이 읽혀서 2쇄가 발간될 때는 찾아보기가 추가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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