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불완전함을 닮은 체제
그래서 사랑스런 민주주의

역사이야기>대담:역사교사가 묻고 지성이 답하다 4 박상훈(정치발전소)

>>편집부 정리 (담당에디터 : 정겨울)


<역사교육>에서는 역사이야기 지면에서 격호 단위로 특집대담 시리즈을 연재합니다. 그동안 ‘역사이야기’에서는 역사연구자들의 연재 기고문을 받아 게재해왔습니다. 하지만 기고문과 연재글 너머 역사 연구자와의 대화를 통해 역사 선생님들께 역사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역사 연구자들의 고민과 삶 그리고 지적여정은 그 자체로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교사가 묻고 지성이 답하다’에서는 역사교사의 시선과 문제의식으로 지성에게 직접 묻고 대화한 기록을 선생님들께 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대담일시 : 2020.12.01.(화) / 19:00
-장소 : 온라인플랫폼 줌
-참가자 :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 문순창(편집부장), 정겨울(편집부 에디터)


#1. 출판인, 정치학자, 실천가 박상훈에 대하여


역사교육_ <역사교육>과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늘 고민하신 학교장님과 역사 교사 간의 대화의 자리를 마련 한다는 마음으로 이번 대담을 준비했습니다.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가수 ‘유산슬’의 노래처럼 ‘합정역 5번 출구’에 정치발전소 사무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연과 관련 행사 등이 풍성하게 이루어지고 최근에는 정치사회 도서를 소개하고 판매하는 북카페도 열었다고 들었어요. 그곳에 직접 방문해서 대담을 나누고 싶었는데, 코로나19가 심해져서 이렇게 온라인으로 뵙게 되었습니다.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사작해볼까요? 첫 번째 질문으로 ‘정치발전소’는 어떤 활동을 하는 곳인지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박상훈_정치가 좋아졌으면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모임을 만들었어요(편집자주 : “유쾌한 정치 실험 공동체”라는 모토로 창립되었으며 2016년에 사단법인 단체가 되었다) 정치에 대해서도 배우는 게 필요한데, 대학에서 배우는 건 현실정치에서 실천적인 지혜를 얻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전문적인 직업 정치학자들의 영역이라 현실정치에 참여하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사실 조금 거리가 있어요. 그래서 정치학이 가지고 있는 가치 있는 영역을 현실정치에 전달할만한 것이 있다면 그런 부분을 추려서 같이 공부하고 싶었지요. 좋은 정치를 고민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 단체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사교육_그렇군요. 학교장님이 살아오신 바를 함께 돌아보고 싶습니다. 삶의 이력이 참 이채로우시던 걸요? 경영학과(학사)를 졸업하신 뒤, 대학원으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하셔서 최장집(고려대) 교수님께 석/박사 학위 공부를 하셨더라고요. 그런데 이후 학계로 가신 것이 아니라 출판사 ‘후마니타스’ 출판사를 운영하시며 ‘출판 운동’을 통해 정치, 노동, 사회 등 진보적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지금은 ‘정치발전소’를 만들어 활동하시고 계시고요. 얼마 전에는 국회 산하 국회미래연구원 거버넌스 그룹장 등 연구원(계약직)으로도 활동하시기도 합니다. 일찍이 강단에 가거나, 현실정치에 참여하거나, 다른 활동도 가능했을 것 같은데 이런 길을 걸어오시게 된 계기나 이유가 궁금해요.


박상훈_제 이력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1980년대 학생운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참여를 했어요. 4학년 때는 그걸 이어가는 게 고민스럽더라고요. 당시에는 시위를 주도해서 잡혀가거나 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간단히 말해서 대학생으로 살기보다는 ‘졸업하지 않고 운동가로 사는 길’을 선택해야 하는데 저는 그 길이 도저히 자신이 없더라고요. 일단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공부를 좀더 해보고 운동에 대한 확신이 들면 그때 가서 다시 참여해보고자 생각했었지요. 이후 사회과학 분야로 대학원을 갈 생각을 했습니다. 정치학을 선택한 건 선배의 조언을 통한 비교적 우연한 계기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후 박사 학위를 마치고 진로를 고민할 때 보통의 경우처럼 대학의 교수가 되거나 하는 것은 저 스스로가 내키지가 않더라고요. 옛날에 친구들이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잡혀갈 무렵 저는 대학원의 길을 가면서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 갈등과 고민을 풀어보고자 한다”고 주변에 설명했는데, ‘결국 교수가 되려고 하는거냐’라는 결과로 귀결이 되는 게 좀 그래서...

그래서 차린 출판사가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요. 좋은 책도 좀 만들고, 스스로도 공부도 하고 일정하게 가족들에게 소득도 가져다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출판사가 어느 정도 됐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잘 안되더라고요. 출판사하는 후배들에게 넘겨주었죠. 이후에 배운 게 정치학이니까 ‘정치하는 분들, 관심이 많은 시민들과 모임을 하는 것이 어떨까’해서 시작했습니다. 정치고전도 함께 읽고, 민주주의와 관련된 이슈에 대한 강연이나 집담회도 하고요. 현실 정치에 참여하신 분들과 대화나누는 자리도 시민들과 함께 가져보고, 예비정치인으로서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박상훈(정치발전소 학교장), 코로나 19 상황 악화로 대담은 온라인화상플랫폼 '줌'을 통해 진행되었다.


역사교육_후마니타스 출판사가 펴낸 정치사회 분야의 좋은 책이 많지 않나요? 개인적으로는 손낙구씨의 <부동

산 계급사회>(후마니타스, 2008)가 떠오릅니다. 부동산 문제를 계급적 인 시선에서 학술과 실천의 양면을 넘나들며 대중들과 소통했던 좋은 책이었던 것 같아요. 손낙 이러한 책들을 만드는 출판 작업은 어떤 생각으로 임하시곤 하셨는지요.


박상훈_꼭 학술 분야에 있는 사람들 말고도 사회 속에 있는 좋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저자로 발굴했으면 했었죠. 박사가 아니더라도 사회 속에 지식인들, 대학을 경험을 못한 분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지혜와 경험을 갖춘 분도 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해서 ‘아카데미’에서 절반 정도 저자를 발굴했다면, 절반은 노동운동 하는 사람, 빈민운동 하는 사람, 의료 관련된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 이런 식으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 거 같아요. 스스로도 좋은 공부를 하는 계기가 되었죠.


#2. 정치학자 박상훈의 말과 글


◦ 불완전함에 대한 존중
…지나친 자기 확신과 일방적 주장을 앞세우는 사람만큼 피곤한 대화 상대는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해낼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완전함에 대한 숭배 의식’이랄까. 아무튼 현실에 대해 화를 낼 뿐 소소한 변화나 점진적인 개선은 중시하지 않는다. 작은 일이라도 실제로 변화를 성취하려면 얼마나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한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 준비와 노력이야말로 진짜 현실과 진짜로 싸우는 일이고 그래야 주변을 밝게 만들면서 새로운 모색과 운동이 확장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알지 못한다. … 누구도 인간의 완전함을 전제할 권리는 없다. 불안전하여서 노력하고 타인에게 배우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시간> 중에서)


역사교육_ 선생님의 말과 글을 발췌해서 선생님들께 소개하며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는 정치적 실천 이성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입니다. ‘진보가 반보수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민주주의가 인간을 가장 닮은 체제로써 불완전함을 존중하려는 접근 태도’라던지, ‘한꺼번에 크게 변화를 하려 하기 보다는 오래 가는 변화를 추구’한다 던지. 학교장님의 말과 글에서 그런 정치적 실천 이성에 대해 언급하신 게 참 좋았어요.


박상훈_정치라고 하는 인간 활동은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정치학은 사회학이나 경제학 같은 한 분과 학문이기 전에 정치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보거든요.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료 시민에게는 정치라는 것이 있어야 사회도 있고, 예술도 있고, 문학도 있고, 스포츠도 있고 하겠죠. 일단 정치 공동체를 만들어야만 인간으로서 다른 피조물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요. 정치라고 하는 인간 활동은 어떤 면에서는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천사나 신과는 달리 인간은 정치라고 하는 수단-어떤 면에서는 다소 권력과 영향력을 다투는 이 수단-을 손에 쥐고 잘 선용할 수 있을 때 개인 삶도 공동체 전체의 삶도 나아질 수 있다는 관점이 널리 수용되었으면 해요. 그러면 정치는 어떤 면에서는 나의 어떤 이상이나 이념을 실현하기 이전에 공유제로 이상이 다른 사람들하고도 함께 가꿔가야 할 공통의 터전이 되는거죠. 그게 있어야 진보주의도 보수주의도 있을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진보적이다 한다면 그 전에 정치적이어야 되고 정치적이고자 한다면 먼저 인간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가능성과 함께 그 한계에 대해서도 받아들어야만 좋은 정치적 실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제 주위에도 과거 다 사회운동이나 진보운동을 했던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민주화 이후에 좌절하거나 정치를 하면서도 늘 화가 나 있다거나 뭐가 안 이루어진다는 것을 세상 탓만 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런 상황은 혹시 세상 그 자체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정치라고 하는 인간 활동의 특징을 잘못 이해하고 다룬 것에서도 있지 않을까 문제 제기를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늘 옳은 것만이 아니고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배우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정치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비로소 내 삶도 나아지고, 사회 속에서 (완전하진 않지만) 협력의 기반을 넓히고 변화의 가능성에 어떤 공간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말하게 된 거죠. 이런 말들을 꾸준히 하면서 생각을 비슷하게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공부 모임이나 정치활동을 같이 하는 게 정치발전소의 정신이랄까 가치인 것 같아요.

정치발전소의 회원들은 대다수는 진보적인 성향이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사람들도 배제하기보다 와서 불편하지 않고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정치발전소를 거쳐 갔던 사람들이 어디나가서도 늘 얼굴이 화난 사람들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면서도 갈등과 이런 것들을 회피하지 않고 개선해가고 완화해가는 역할을 맡아주었으면 합니다.

박상훈 학교장의 저서들 : <정치의 발견>(좌, 후마니타스,2010), <정당의 발견>(중, 후마니타스, 2017), <민주주의의 시간>(우, 후마니타스, 2017)


역사교육_책 속에서 학교장님이 종종 언급하시는 미국의 사회운동가 알린스키**(Saul D. Alinsky, 1909~1972)의 글이 떠오릅니다.

“세상에 대해 좌절감이 들 때는 세 가지 중 하나를 하라. 첫째, 가서 통곡의 벽을 쌓고 너 자신을 위로하라. 둘째, 미쳐버린 후에 폭탄 투척을 시작하라. 하지만 그 방법은 단지 사람을 우파로 돌아서게 할 뿐이다. 셋째, 교훈을 얻어라. 고향으로 가서 조직화하고, 힘을 모아서 다음 전당대회에서는 너희 자신이 대의원이 되어라.”

이 얘기가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학교 현장에서 혁신학교의 실천과 도전이나 가깝게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나 정치적 시비에 대한 문제같은 일이 있잖아요? 제도권이나 정치적 외압에 ‘싸울 일’도 화낼 일도 참 많고요(일동 웃음). 무언가 한 걸음이라도 변화시키고 싶은 실천가들의 포부(어떤 맥락에서는 욕심일 수도 있겠죠)가 현실과 괴리가 될 때 참 괴롭잖아요. 그런 점에서 알린스키의 말이 위로가 되었어요. 명쾌하고 단적인 결의가 아닌 실천적 이성의 다짐과 격려라는 점에서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지역조직가. 오바마, 클린턴 등 민주당의 주요 정치인과 당대의 학생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위 발언은 68혁명과 반전운동의 바람이 불던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경찰과 군 방위군이 폭력을 행사한 뒤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여전히 우리가 현 체제 내부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한 것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저서로는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아르케)가 있으며 ‘정치발전소’에서 알린스키에 대한 해설서로 <알린스키, 변화의 정치학>(조성주 해제, 후마니타스)를 출간하기도 했다.



박상훈_개인적으로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좋아합니다. 까뮈가 『이방인』을 쓰면서 동시에 『시지프 신화 : 부조리에 관한 시론』 라는 철학책을 같이 썼어요. 『이방인』에서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로지 ‘이미지’로만 말하고, 그것의 철학적인 의미는 『시지프 신화』에 담으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지만 자신의 메시지나 주제는 철학의 언어로 담으려 했던 거죠. 어떤 사람들은 ‘시지프 신화’ 속 시지프의 행동을 쓸데없는 노력, 헛된 노력이라고 볼지 몰라요. 까뮈의 문제의식이 가슴에 와닿던 것은 그 신의 저주를 받아서 돌을 굴리고 굴러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쓸데없는 노력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엉덩이를 같이 받쳐 들고 그 돌을 함께 굴러서 떨어뜨려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했다는 점에서였죠.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나이 들고, 아프고, 병들고, 죽게 되겠죠. 그것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일텐데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끊임없이 돌을 굴리고 있고. 그 사이에 인간의 역사는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울 D 알린스키

신은 자족적이고 완전한 존재기 때문에 늘 단조롭습니다.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늙고 죽겠지만 그러한 인간의 존재 자체는 역사가 되고 한 시대를 이루고, 그 시대는 가치와 인간을 성숙시키게 되는 것이라고 봐요. 우리는 다들 굴러떨어지는 돌이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은 누군가 굴러가는 돌 속에서 역사를 만들고. 또 다음 세대가 그 역사를 이어가는 거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신보다도 더 다이나믹해지고 새로운 자각을 갖게 해주는 거 아닐까요. 이루어지는 게 없다고 통곡할 수도 있고, ‘세상 모든 건 근본적으로 다 구조적인 문제니까 뒤엎자 아니면 의미가 없다’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제한적이라도 동료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우리가 만든 법과 절차에 따라서 사회를 개선하고 바꿀 수 있는 그 노력을 하는 삶, 그것이 어떤 면에서 가장 인간적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알린스키는 그런 걸 운동가들에게 잘 말해줬던 사람이었죠.


◦ 폐쇄적이고 상투적인 운동의 언어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우리 사회 진보파에게는 무엇보다도 정치의 언어, 민주주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 사활적 문제가 아닌가 한다 … 운동의 언어는 윤리적으로 늘 확신에 찬 주장을 말하지만 인간이 처한 상황이란 어느 한편이 무조건 옳은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럴 수만 있다면 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 덕분에 매일 매일 괴로워하겠는가. (<정치의 발견> 중에서)


역사교육_아마 시민들에게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처음으로 푼 대중서가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가 아닐까 합니다. 진보정당/노동조합/시민단체 활동가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신 것을 책으로 옮기신 거죠? 쉽게 풀어쓴 책이지만, 책 사이사이에 강연 당시의 긴장과 웃음도 함께 느껴지더라고요. 많이 공감받았던 부분이 ‘정치적 언어’에 대한 부분 같습니다. 진보파들의 정치적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 하실 때 바람직한 정치적 말과 글에 대해서 논하신 거에 대해 인상 깊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을지?


박상훈_정치에 대한 제 태도랑도 관련이 있죠.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건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참된 삶이 무엇인지, 우리 행동을 이끄는 도덕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이런 건 언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할 수 있죠. ‘운동’도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언어 행위라기보다는 정념이나 감정의 측면이 좀 더 강하죠. 저는 감정과 정념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것만이라면 인간이 좋은 사회와 좋은 공동체와 좋은 질서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봐요. 인간은 동물이기도 하고 본인이 해결할 수 없는 열망 때문에 감정을 표출하는 그런 존재라고도 생각되요. 덕분에 예술과 문학의 발전도 있었지만. 동시에 좋은 사회, 좋은 질서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죠.

그런 점에서 운동가들은 열정의 언어가 강한 사람들이죠. 그 덕분에 권위주의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용기를 낼 수 있었지만, 늘 사람이 싸움으로만 살 수가 없고 늘 화를 내는 방법으로 악과 대면할 수는 없죠. 때로는 그 악의 원천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고 악조차도 때로는 우리와 살아갈 동반자일 수도 있고요. 그 악 자체도 어떻게 보면 우리가 좀 더 선한 삶을 살아야 되는 적절한 자극으로도 삼을 수 있는 것이고 생각해요. 모든 악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찌보면 신성모독이 아닐까요. 그보다는 악과 병행하며 내 마음속에 늘 욕심과 욕망과 탐욕이 남을 해치거나, 사회를 나쁘게 만들기보다는 나를 절제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될 수 있게 한다면 훨씬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운동을 했던 진보파들에게는 정치의 영역에서 그런 태도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게 된거죠.

왜냐면 정치를 운동으로 해서는 본인을 지킬 수 없어요. 운동으로 법의 판단을 이끌 수 없죠. 거기에는 나름대로 정해진 규칙도 있고 합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걸 익혀가면서도 자신의 마음속에 ‘우리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좀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만 잘 있다면, 그 안에서도 정치가 가능하게 하는 기회를 좀 더 화내지 않고 좋은 태도로 가지 않을까, 이런 걸 말해보고 싶었어요.

<정치의 발견>이 출간된 그때가 딱 민주노동당이 사실 첫 번째 실패를 경험하게 될 때거든요. 한 2010년을 전후한 시기여서 본인들도 대선후보를 냈지만 잘 안되었고, 서로 분열도 하게 됐고, 근데 잘 돌아보면 이게 정치의 피할 수 없는 조건들이니까 그 속에서 찾아야지, ‘나는 순수하고자 했노라. 근데 정치나 다른 사람이 나의 순수성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실패 했노라’라고 말하는 건 비겁하기도 하고 진지한 태도의 결여일 수도 있다라는 걸 공유해보고 싶었어요.


역사교육_진보파들은 정치를 비롯한 일선 현장에서 실천할 때 도덕적 우위나 당위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혹은 그게 나쁜가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현장에서 다양하게 실천하는 교사들 같은 경우는 ‘나는 승진에 목 매여 하는 것이 아니고 애들을 위할 것이고 우리 학교 공동체를 위해서 하는 거야’라는 도덕적 확신 내지 우위를 힘으로 삼게 되기도 한 거 같아요. 그런데 도덕적 우위 없이 진보파가 힘을 낼 수 있을까요? 흔히 진보파에게 돈이나 조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웃음). 경계하고 성찰하게 되면서도 참 어려운 지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박상훈_그런 분들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긴 하죠. 이타적인 것도 많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사회 구성원들이 많다는 것은 좋은 사회의 징표인 것은 틀림없는데, 더 많은 이타주의자를 만들고 더 많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전에 각자가 처한 조직이나 사회질서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만해야 가능해요. 그 사회질서를 움직이는 건 영향력이죠. 누가 더 많은 결정을 해서 사람들에게 돌아갈 자원들의 분포를 결정하는 것이니까. 영향력을 구성하는 것은 권력이라고 볼 수 있고, 권력을 만들어내는 건 공직이라 말할 수 있고 그 공직에는 적절하게 보상이 따르죠. 공적인데서 따르는 보상은 시민들이 노동의 결과를 세금으로 걷어줬기 때문에 거기에 맞도록 보상을 하죠. 이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저는 이렇게 된다고 봐요. 돈 문제, 임금이든, 급여든, 수당이든, 활동비든, 그건 좋은 활동의 토대에요. 돈 없이 인간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죠. 돈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필요해요. 좀 더 영향력 있는 자리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다른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이고, 그건 어떤 면에서 인간사회가 진보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죠. 과거의 권력을 일부가 독점하던 시기에서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안 한다’보다는 ‘나는 다르게 쓰겠다’는 것이 좋은 태도고 민주주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권위주의 때라면 돈과 자리를 바라기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민주화가 됐다는 얘기는 최소한 사회가 공정한 질서 정당성의 기초는 가졌다는 뜻이니까. 그때라면 체제 안에서 좀 더 나은 영향력을 선용할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갖는게 그게 더 용기 있는 일이라고 보죠. 자리를 좀 더 영향력있는 자리를 갖게 되면 사람은 힘들어요. 그걸 잘 감내해야만 사회가 변화하지, 우리는 늘 비주류로만 있으면 선한 사람도 선함을 유지하기 어렵고 이타적인 사람도 이타성과 사회를 위한 희생도 뭐하는 짓인가 하기 쉬워져요. 누군가 사회를 이끌어야 된다면 우리도 당당하게 사회를 과거세력보다 더 잘 이끄는 사람으로 생각해야만 책임감이 생긴다. 꼭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해요.


역사교육_이른바 ‘운동정치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진보정당 ‘운동’이 아니라 진보정당 ‘정치’여야 한다는 얘기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지점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고, 아울러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운동의 역할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운동을 통해서 역동적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해온 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반문도 가능할 것 같은데,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박상훈_운동은 너무 넓은 개념이에요.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고요. 옛날 과거 아테네 철학자들도 인간의 원천을 운동이라고 보기도 하고, 근대 철학을 연 토마스 홉스도 인간의 본질은 운동이라고 할 만큼 운동은 너무 넓은 개념이에요. 운동은 언제나 필요하죠. 우리가 민주주의를 한다는 얘기는 ‘우리가 밥을 먹는다, 나름 건강하게 산다’라기 보다는 ‘건강하게 살고 내가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권위주의 시대라면 경제 문제에 대해 권력자의 명령을 통해 풀어가겠지만, 민주주의라면 그것을 다룰 적절한 선출직이 있고, 선출직에 의해서 정부가 이끌어지죠. 그 것은 곧 시민을 대표하거나 시민을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도전해야 될 영역이 된거죠.

근데 운동을 여전히 갖고 있는 분들에게는 정치에 나가는 걸 극도로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전에 대학교수가 되는 걸 어리석게 여겼듯 말이죠. -그럴 필요 없는 일이었는데-. 정치적으로 보일까봐 의식을 하는 거겠죠. 근데 실제는 돌아보면 다 386 사람들도 민주주의 덕분에 정치 주변에 있게 되요. 민주주의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을 하죠. 혹시 이게 심리적으로 정치라는 것을 받아 안아서, 그 속에서 몸부림 치면서 사회를 좋게 만드는 일을 특히 하게 되는 결과만 맞는다면 굳이 운동에 대한 열정만 강조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도 자기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저는 인간의 수준은 높아지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운동은 그런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게 가족들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고 오히려 정치의 영역에 의해서 본인의 소명과 능력만 있다면 그 영역에서 좀 더 다른 활동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얼마든지 좋은 일이고 민주적인 일이다. 이런 걸 좀 강조하고 싶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진보 영역 안에 운동에 대한 약간 낭만주의적 부채의식을 너무 과도하게 갖는 걸 사회에도 안 좋고, 본인에게도 안 좋고, 우리에게도 좋은게 아니다. 그걸 적극적으로 덜어내고 그 공간에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실력과 열정으로 채우면 좋겠따. 이런 걸 말해보고 싶었던 거죠.


역사교육_<정당의 발견>에서 나왔던 로베르트 미헬스**의 역설 같은 얘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를 했던 것 같아요. 생디칼리스트였던 그가 나중에 파시스트가 되어 이탈리아 무솔리니를 지지한 건 참 흥미롭습니다.


**1876~1936,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관료제나 조직이 확대/비대해짐에 따라 결국엔 소수 지도부에게 의사결정권이 집중되어 민주주의를 왜곡시킨다는 ‘과두제의 철칙’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교수로 근무하던 말년엔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한 파시즘 체제를 지지하고 숭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박상훈_그분은 조직을 걱정을 많이 한거죠. 인간사회에서 조직을 만들게 되면, 조직 안에는 리더가 있고, 그걸 이끄는 상근 관료제가 있고, 이들이 활동하게 되면 평등하는 건 어려워지는거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한거에요. 필연적으로 리더는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결정권을 갖고 있고, 조직 내 관료들은 일상적으로 조직의 자원을 본인들에게 보이지 않게 배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평등은 훼손될 거라고 본거죠. 그가 꿈꾸었던 이상에서는 관료제 없이 일반 민중과 최고 통치자가 직접 만나는 것을 생각한 것이죠. 그 속에서 어떤 순수한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폭발하고 욕심도 없고 관직에 대한 음모도 없는 이런 상태가 구현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기대한겁니다. 그야말로 맨가슴과 순수함으로 인간이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을 꿈꾼 분이에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움직이기 어렵죠. 누군가는 경제 정책을, 사법부를, 검찰을, 경찰을, 군대를, 세무 관료를 맡아 운영해야 하니까요.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의 보이지 않는 조건들이었던 거에요. 이 분이 실망을 거듭하다가 무솔리니를 주목하게 된 것이죠. 거기에는 ‘검은 셔츠의 운동과 열망’, 이런 것만이 있으니까요. 조직과 위계를 싫어하는 것, 대표나 대의제를 싫어하는 것, 이런 마음들이 결국은 파시즘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된겁니다. 파시즘도 처음에는 ‘순수한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그 체제도 당연히 군대를 만들고 경찰을 운영하죠. 결국 그 미헬스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물론 미헬스가 주장한 바의 일부는 맞아요. 조직 혹은 관료제의 문제는 원하는 거와는 달리 불평등한 효과를 낳기도 하죠., 우리가 택해야 하는 태도는 관료, 위계, 조직 없는 사회를 바랄 것이 아니라 한 조직이 위계와 경직성만이 있지 않고, 다른 가능성을 갖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고 봐요. 민주주의는 결국은 관료를 없애는게 아니라 관료를 지휘할 선출직 대표를 뽑아내는 거니까요. 근데 미헬스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거죠.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선출직 공직자들의 역할이 잘만 된다면 유럽의 복지국가들처럼 우리나라도 약자들이 모멸받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도 함부로 남들에게 모욕당하지 않는 세상을 이루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거에요.


역사교육_뒷 질문하고 연결이 되는 것 같은데, ‘직접민주주의론’ 비판도 하셨어요.

“(직접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대의 민주주의가 더 진보적이고 민중적이다. (중략) 결론적으로 말해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워 대의제의 야유를 대상으로 삼는 일은 반정치주의의 격조 높은 버전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렇게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대의주의의 참여기반을 어떻게 심화하고 정부의 책임성을 어떻게 더 잘 실현할지와 같은 실체적 문제를 제기하는게 더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시간>(2017) 중에서

「민주주의자의 변론」이라는 칼럼이 논란이 돼서 따로 공개강연 및 토론 행사도 자청해서 여시기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에서는 공동체에 주권자들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방점을 찍다 보니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하곤 합니다. 촛불시민혁명도 대표적인 사례로 보는 것 같고요. 그런 점에서는 학교장님의 직접민주주의 비판에 관해 갸우뚱하는 선생님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박상훈_일단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직접민주주의는 고대 민주주의(아테네 민주주의)가 대표적인 에가 될 겁니다. 정치학자의 입장에서는 고대 민주주의하고 현대 민주주의와는 확실히 구분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을 하죠.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2500년 전, 아테네에서 한 200년 했고, 오늘날에 와서 짧게 잡으면 유럽/미국 등지에서 19세기 말, 길게 잡아야 18세기 말부터 되야 민주주의라고 부를만 하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인간의 역사에서 짧은 시기에 했던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두 가지 경험은 매우 달라요. 그래서 똑같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쓴다하더라도, 두 체제의 특성이나 제도, 절차, 과정은 굉장히 다르죠. 그래서 보통은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 민주주의하고 분리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요.

한편으로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대립시킬 때도 저는 역사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면서 썼으면 해요. 만약에 직접민주주의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면 오늘날의 ‘대의 민주주의’가 고대 직접민주주의보다 수백만배 더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거에요. 옛날처럼 여성이라고 해서 배제되고, 가난한 노동자들도 빠지고, 부모 가운데 누가 이주민이었다면 빠져야 하고. 요즘엔 누가 여성이라고, 부모님 중에 남방계다 북방계다 따지지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따지지 않고 누구나 다 시민이 될 수 있는건 현대 민주주의가 가장 넓게 시민권을 연 체제죠. 그리고 우리는 직접 정치 조직도 만들 수 있고 직접 관료도 될 수 있고 직접 노동조합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옛날에 고대 직접민주주의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정당을 만드는 것은 반란이에요. 촛불집회도 인정될 수 없죠. 반란행위니까.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훨씬더 직접민주주의다. 훨씬 더 민주주의 가치에 부응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라고요.

만약에 옛날 민주주의를 직접이나 간접이냐 따지지 않고 제대로 본다면 고대 직접민주주의 역시도 당연히 ‘대표’가 있어요. 대표가 없이 인간 사회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노동자들도 노조 위원장이 있어야 노동자라고 하는 집단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직접 민주주의를 하자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다 단체 대표 명함을 갖고 다니세요. 대표없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어떤 면에서는 다 대의민주주의고요 어떤 면에서는 다 직접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어요.

그런데 왜 제게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면, 그거는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는 사실상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시민들이 처해있는 다양한 조건에 맞는 조직, 결사, 그들의 대표, 그들의 활동과 이런 요소들 경시하기 쉽다는 점이에요. 그러다보니까 직접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다 단체나 조직이나 결사체 없이 마치 촛불을 든 시민의 마음과 정부가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어떤 걸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낭만주의라고 생각을 하죠.

우리가 해야할 노력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결사를. 뭔가 힘을 만들어서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조직을. 그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서는 상근 활동가를. 상근 활동가를 이끄는 그 조직의 대표를. 이런 사람들 사이의 협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먹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니까 직접민주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정당 싫다. 의회 싫다, 대표가 왜 필요하냐’라고 쉽게 주장해요. 그런 환경에서는 누가 승자가 될까요?. 그건 이미 사회적으로 강자집단이 승자가 될 겁니다. 지방자치제에서 하는 직접민주주의는 행정관료가 승자가 되기 좋고요. 주민참여예산을 해봐도 결국은 그거를 이끄는 건 관료가 되는 경우가 많고요. 직접민주주의를 지방자치제에서 할때도 잘 보시면 행정 집행부의 수장들이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합니다.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다기 보다는 아니라 쉽게 동원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나 약자들의 요구가 배정되는 건 제가 보기에는 약간의 서비스 결과인거지 나머지 전체는 오히려 시민권의 내용을 약화되기 딱 좋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지역도 재정 문제도 다 주민투표를 하지만 결과는 기업이익이 더 실현되는 것으로 종종 나타나곤 해요. 기업이익이 실현되다 보니 세금만 줄고 세금이 주니까 수도 전기 교육 이런 것이 주 예산으로 편성이 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야할 돈만 깎여나가기도 해요. 수도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는 유색인 약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이리저리 내몰리기도 하고, 공립학교 예산이 줄어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기도 합니다. 한번 깊게 생각해 볼 문제에요. 주민소환, 주민발안 이런 것들도 돌아 보면 사회 시민들의 삶 가운데 보호받야 할 사람들에게 나은 결과를 낳지 않았다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익이 있는 곳에는 그들의 권익을 주장할 수 있는 조직과 결사와 활동가와 대표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는 일입니다. 전체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면 그래도 괜찮은 정당 하나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되는 거죠. 괜찮은 공직 후보자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도 엄청 중요하고요. 지난 민주화 33년 동안 그래도 최고 통치자를 만드는 문제에서 늘 실패하거나, 만들고 나서도 최고 통치자가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에서 잘 안되었다면 ‘어떤 정당’이 어떤 공약과 내용으로 정부를 이끄려고 하고 최고 통치자가 되려고 하는지 이런 문제부터 우리가 관심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러지 않고 뭔가 직접민주주의라는 것을 통해 현실의 정치를 야유하는 건, 제 눈에는 좀 반정치주의로밖에는 안 보여요. 그런 점에서는 우리나라 직접 민주주의론은 격조 높은 반정치주의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내용적으로는 정치를 위협할 때가 많기 때문이죠. 유럽의 극우정당들도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데요. 그게 결코 유럽의 진보파들이 좋아하는 민주주의론이 아니다라는 것을, 경청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역사교육_주민투표가 활성화되고 주민 자치가 내실화 되어 있는 스위스에서도 때때로 그런 장치들이 소수자를 내모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이런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 것도 낳는 것인데, 그 책임 소재가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도 문제인 듯 해요.


박상훈_처음 말씀드린 것처럼 정치가 없다면 인간은 보다 덕(virtue)이 깊어지고 이성적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정치의 역할 없이 인간 스스로 나아질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복잡한 정치 없이 여론조사나 대중시위를 통해 드러내면 쉬워보일 수 있겠지만 (토마스 홉스가 비유를 빌리자면) 정치의 기능이 없다면 공통의 권력을 우리가 만들어서 정당한 질서나 민주적 통제를 부과하지 못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천사이기보다는 야수일 때가 더 많다고 생각되요.

예를 들어서 국민소환제를 한다고 치면 우리는 대표를 뽑을 때 2천만명이 모아서 투표를 하였는데, 그 대표를 소환시킬 때는 50만~100만이 있으면 된다고 해보자고요. 50만은 큰 교회 조직 몇 개면 충족시킬 수 있어요. 그러면 차별금지법 이런 것을 주장한 국회의원이나 공직자 그들이 1차로 타겟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죠. 낙태 관련한 헌재의 판결을 뒤집으려고 하는 분들이 이런 걸 입법하는 의원들을 쫒아다니는데 활용하게 될지도 몰라요. 마치 도편추방제처럼 2천만 명의 의사로 뽑은 주권이 50만 명의 사람에 의해서 악용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해요. 힘들지만 곧바로 실현되지 않아서 답답하겠지만 그 과정을 잘 치워서 변화를 만들어가는게 민주주의자들에게 꼭 필요한 덕성이라고 생각을 해요.


** 2018년 스위스 북동부주(장크트갈텐 칸톤)에서 무슬림의 공공장소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는 것을 주민투표를 통해 압도적 통과한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본래는 주(칸톤) 의회에서 우파 정당을 중심으로 발의한 안건이었으나 녹색당 등 좌파 정당의 반대로 주민투표로 넘어간 의제이다.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착용하는 문제는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한 논쟁적 사안이나, 민주적 절차와 책임이라는 차원에서 주민투표로 소수자(해당 칸톤에 거주하는 무슬림은 5%에 불과하다)의 반발을 사는 안을 강제로 통과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을 것 같다.




#3. 학교에서의 민주주의 교육이 나아갈 길


역사교육 다음은 학교와 수업 속 민주주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학교에서는 최근에 민주시민교육이 강조되고 있고요 역사나 사회 교과군 교육 전체를 놓고 봐도 민주주의 교육이 꽤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질문에서는 세계사 수업 속에 등장하는 아래 세 가지를 주제로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 아테네 민주정치 △프랑스 혁명 △19세기 유럽/미국의 참정권 운동의 역사 등을 주제로 정치학자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상훈 아테네 민주주의는 약간 실험 같은 걸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요. 특히 아테네 민주주의는 학교 같이 굉장히 동질적인 시민들 사이에서만 가능하거든요. 이주민도 , 여성처럼 누군가 집안일하는 사람도, 재생산 활동을 맡은 존재들은 시민에서 제외한 체제이니까요. 그런데 학생들은 어떤 면에서는 교육 당국이나 선생님 아래에 있는 존재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매우 동질적인 구성들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상황으로 볼 수 있기도 하죠. 아테네 민주주의처럼 추첨을 통해서 평의원도 만들어보고, 행정관도 만들어보고, 배심원도 만들어보고, 전체 회의도 해봤으면 하는 생각도 있어요. 왜냐면 그렇게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놀라운 점도 보여줄 수 있고, 동시에 한계도 볼 수 있거든요.


아테네 민주주의는 왜 200년을 넘기지 못했을까요. 처음에는 시민적 열정으로 됐다가 나중에는 점점 민회의 역할이 줄어요. 천 명정도 되는 소수의 회의체에 의해서 체제가 경직되기 시작해요. 그러면 그 과정을 한번 해보다 보면 아이들 스스로 경험을 하겠죠. 스스로 결론도 없이 누군가는 소리만 지르고,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결국 어떻게 작동하게 되는지 장단점을 체험해볼 수 있다는 생각은 있어요. 학급 단위로 해볼 수도 있겠네요.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관련된 여러 쟁점을 토의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프랑스 혁명은 대단하죠. 어떻게 보면 ‘세습에 의한 권위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피로써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죠. 어떤 면에서 프랑스 혁명이 우리가 말하는 소위 민중 주권, 인민 주권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인간 역사에서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낸 거죠. 평등한 시민권의 세상을 폭력으로 열어젖힌 체제니까.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생각해볼 주제들이 참 많다고 생각이 들어요. 민중의 의지를 모으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구체제의 낡은 구조를 깨는 것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요. 그런데 그 체제가 질서를 만들게 되면 그건 폭력이 되기 딱 좋아요. 프랑스 혁명을 1~3기 이렇게 나눠서 보고, 인민 주권이 권력으로 작용할 때 장점과 단점이 논의됐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 체제가 갖는 흥미로운 점까지. ‘왜 시민들은 나폴레옹을 원하게 됐을까?’에 대해 성찰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른 이야기지만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는 민주주의를 싫어해요. 프랑스 정당들은 ‘민주주의’ 글자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 다 ‘사회주의’나 ‘공화주의’가 들어가죠. 민주주의에 가장 인색한 나라가 프랑스에요. 그 나라의 민주화 과정의 특성하고 정치적 문화와 관련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되죠. 프랑스는 노조 조직률이 우리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사람들이 결사도 싫어하고요, 문제가 생기면 광장으로 뛰쳐나가서 해결할 열정이 중요해요. 그러한 프랑스의 그림자가 바로 강한 관료제에요. 우리도 만약에 좋은 정당이 없고 좋은 노사관계나 시민사회가 부족하다면 결국 광장의 촛불집회와 관료가 동전의 양면을 살피게 된다는 걸 프랑스 사례를 보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유럽/미국의 참정권 운동에 대해서도 이렇게 가르쳤으 해요. 차티스트 운동에서 가장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 최초의 정치적 노동운동이라는 점이에요. 노동운동이 중심인데 교과서나 이런 곳에서 보면 노동운동이란 말이 많이 빠지더라고요. 재산권 없는 사람들이 제한 선거를 폐지해달라고 주장한 운동이죠. 첫째로 노동운동이라는 점을 가르쳤으면 좋겠고요, 두 번째로 거기에서 대표들에게 돈 주라는 요구(세비 지급)이 나와요.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만 할 뿐 그들이 정치를 조직하고 만들지 못할 것에 대한 대안이었던 거죠. 근데 이들은 돈을 받아야 자유롭게 정치에 관여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은 차티스트 운동의 보이지 않는 중요한 전제라고 생각되고요. 세 번째는 남성 보통 선거권 운동이었다는 그 시대 한계 같은 게 있어서 그걸 다루었으면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완벽히 성공하진 못했죠. 그 다음에 이어진 여성들의 참정권 운동이 굉장했어요.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노력의 산물인 점이 있어요.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둘 다 시민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죠. 여성 차정권 운동도 그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실패했어요. 그런데 그걸 누가 성공하게 하느냐. 바로 진보정당들이에요. 진보 정당들이 끊임없이 운동을 조직하고 그 조직의 돈과 열정을 쏟아서 표를 만들고 표를 통해서 정치 영역에 밀고 들어갔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보통 선거권이라는 걸 얻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명사 민주주의에서 대중 민주주의로 넘어가게 된거죠.

차티스트 운동이 1830년대 시작됐고, 영국에서 남녀 보통선거권이 1938년인가 이루어지니까 거의 백 년 걸린 거에요. 우리가 참정권이라고 하는 건 미군정 때 거져줘서 한건데, 이들 나라에서 투표라고 하는걸 ‘페이퍼 스톤(paper stone)’이라고 부르는 이유라든지, 서프러제트 때처럼 동등한 표를 찍고자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송구한 희생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 그 마지막은 역시 조직화 된 정치의 개입을 보통 사람들도 해야만 그게 실현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논의가 교과서나 수업에서 잘 구현되면 좋겠습니다. 교과서에만 한정해서 보면 아직까지는 진보정당의 역할이나, 노동자들의 역할, 여성들의 역할은 잘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근데 생각해보면 그거 없이는 어려웠을거잖아요.


역사교육_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정당이 대중정당화 되는 역사가 중요하고 민주주의 발전과 관련해 차티스트 운동이나 서프러제트와 같은 좌파운동의 공이 있는건데 그 연결고리를 부각 하기 보다는 자유주의 운동이라는 테두리로 가두는 것이 세계사 교과서의 서사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박상훈_ 자유주의 운동으로 몰아가는 거는 이유가 있겠죠. 우리나라의 보수 측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을 강조하니까요. 하지만 자유주의의 가치를 일정 부분은 평가해주는게 맞다고도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시민혁명이 가장 중요한 건 ‘권리’라고 하는 의식을 가져다준 거잖아요. 인권이라는 것. 그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했다는 것. 근데 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는 형식적으로 배우는 것 같다. 실제 역사는 참으로 인간 정신의 놀라운 점을 그전에는 부르주아 시민혁명에서 나타났다면, 노동자들이나 여성들도 당당하게 현대 민주주의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과정이 참으로 아름답고 그전에 못 배우고 못 가졌던 사람들도 대중정당을 만들어서 정치에 충격을 준 것은 아름다운 역사이고 가르쳐도 좋을 것 같긴 해요.


역사교육_다음 질문은 한국사 부분에서 민주주의 교육에 관련된 질문이에요. 역사과에서는 한국사에 한정해서 보면 현대사 속 4·19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민주화 운동의 전체적인 흐름과 군사 독재 정부 시절의 역사를 함께 나누면서 민주주의 교육을 하고 있어요. 정치학자 입장에서 이러한 한국 근현대사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을 고민할 때 바람직한 방향은 어떤 것이라고 보는지요?


박상훈_ 민주화 운동은 최근 들어 피해자에 대한 보상, 진실과 화해의 진상규명의 작업 등이 유의미있게 진행되는 중이라고 봅니다. 요즘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념사업/기념관도 잘 되어 있는 거 같더군요. 제가 좀 걱정되는 것은 지나친 운동의 그것만 강조하다 보면 마치 박물관처럼 박제화된 느낌을 받게 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민주화 운동 과정의 어떤 실제 모습이나 현장성을 많이 강조하는 접근도 충분히 의미가 있겠죠. 저는 오히려 다른 방향에서 가르쳐져야 민주화 운동의 힘이나 가치를 더 잘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제 입장에서의 제안은 민주화의 과정의 ‘정치사’(편집자 주 : 분야사로서의 정치사라기 보다는 정치 주제와 행위자들의 역사라는 의미로 풀이된다)와 같이 가르쳐야 만 된다고 봐요.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보면,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만이 민주화를 가져온 것만은 아니에요. 거기에는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서 다양한 제도권 안팎에서 일어난 정치 활동들이 있어요. 그걸 저는 균형 있게 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에서는 정권의 앞길을 둔 정치적 갈등이 하나 있고, 그것과 연동되어 사회적 운동과 갈등이 두 축으로 움직이는 걸 가르쳐져야 된다고 봐요. 그렇지 않으니까 어떻게 되냐면 마치 운동을 한 사람들은 어떤 숭고한 종교적 희생자 비슷하게 다루어지게 되는데, 저는 그런 점이 사람들의 일상과 민주화 운동의 가치를 자꾸 멀어지게 만든다고 생각이 들어요. 정치 과정과 민주화 운동의 두 개의 동력이랄까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엮이는지 봐야 된다고 봐요. 그렇게 되면 민주화 운동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그것이 갖는 현실적 인간의 모습 같은 것이 잘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서 1960년대~1970년대 민주화 운동이라고 부르면, 거기에는 1960년대 4.19를 이끌었던 교사들나 기자들 중 상당 수는 위에서 말했던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반독재 얘기를 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미국의 영향을 받았던 기독교의 흐름도 있었을 거고요. 그게 1980년대 들어가서 민중운동하고 갈등하게 되는데 이런 양상도 역사적으로 아마 이해할 수 있게 되겠죠. 야당도 잘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라는 해서 일종의 보수세력으로 볼 여지도 있는 정체세력인데 이후 정치 체제가 권위주의화 되면서 이들도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에 참여하기도 하죠. 이들도 바뀌고 변화되요.

이들도 역사를 통해서 발전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김대중 같은 인물도 출현했다고 생각해요. 그 분이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우리나라 역사 권위주의 역사에서 정치가로서의 김대중은 크게 평가할 지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는 반독재 투쟁의 과정에서 사회 운동이나 학생 운동, 기독교 운동, 가톨릭 운동과 교류했고 이후 김대중이 학생 운동 세력을 정치에 입문하게 돕는 역할을 하게 되죠 저는 김영삼도 생각보다는 재밌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다부진 야당 지도자 역할을 했던 그가 없었더라면 YH무역사건이나 유신체제의 조기 몰락은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김영삼이라는 한 인간의 개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고요. 아이들에게 이런 비슷한 시기가 된다면 운동가가 될 수도 있지만 저는 김영삼, 김대중 같은 정치가도 큰 역할 할 수 있다고 가르쳐야 된다고 봐요. 잠재적인 운동가가 되어야 권위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거 아니라 매력있는 정치가의 역할도 그 과정에서 중요했다는 걸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죠.

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의 주류들은 나중에 보면 결국 현실정치 리더들의 옆에 보좌역할을 하고 있거든요. 냉정하게 한번 정치와 운동 사이에 재미난 관계를 좀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운동과 정치라는 것이 대립하는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 대립하면서도 흐름을 같이 할 때가 있으니까요. 이 과정을 역사적으로 검토한다면 아이들이 군사 독재에 저항했던 운동가에 대해 순백의 이미지로만 이해하지 않게 될 것 같아요. 숭고한 운동가의 삶이 인간현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괴리감을 크게 느끼거나 기념식에서만 잠깐 느껴보는 걸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이런 현실정치의 맥락도 수업에서 같이 다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역사교육_역사교사들도 현대사 교육의 서사를 보다 폭넓고 다양한 시선에서 구성하고 접근을 다양화하려고 노력하는 중이긴 합니다. 그 시대의 학생이나 시민이나 노동자 계층 등 다양한 개인의 삶들이 당시 시대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민주화 과정이 이행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다룬다거나 독재로 인해 유보된 우리사회의 가치와 진로는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성찰적으로 현대사를 들여다본다던지 등이 그렇습니다. 학교장님께서도 민주주의의 역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가르치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제안해주신 것 같아요. 그 방안으로 정당사 내지 정치사를 결합해야 민주화의 역동적 과정을 풍성하게 설명하자는 제안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박상훈 그렇죠. 재야 세력이나 운동권도 당시에는 ‘사회 속 야당’ 역할을 한거죠.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도권 안에서 야당이었다면. 학생 운동은 사회 속의 야당 역할을 했고. 지금은 그들이 현재 민주화 체제에서는 그들이 여당이 되고, 주류가 된 거니까. 그렇게 가르치면 일관될 것 같아요. 그런데 현재의 민주화 이전의 역사에 대한 서사는 이러한 세력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구조라고 생각이 합니다. 그러한 역사적 맥락이 파악하지 못하면 학생들이 오늘날 정치현실에서 그저 정치에 대해서 야유하게 만드는 그런 문제도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역사교육 이런 고민에 대한 견해도 궁금합니다. 역사교사로서 그리고 그 이전에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줘야 하는 교사들이 가질법한 고민입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고, 갈등 현상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다른 미래를 상상하게 해야한다고 생각을 하는 선생님들이 많습니다. 아마 역사 교사들 중 상당 수는 그런 ‘성향’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교육적 과정 도중에 잘못하면 아이들에게 어떤 대립적 심성이나 세상에 대한 분노와 같은 것들을 나도 모르게 강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됩니다. 말하자면 ‘아이들을 성마르게 하는 태도’를 기르게 하는 건 아닌가라는 성찰적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종례의 교육처럼 민감하고 논쟁적인 것을 수업에서 되도록 회피하려고 하는 자세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민주주의자로서 교사는 아이들과 어떤 모습으로 만나야 할까요?


박상훈 분노라고 하는 건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억울함이나 열악한 처지에 대해서 정의감을 갖게 된다는 의미일 때가 많죠. 분노라는 그 자체는 인간이 용기를 내게 만드는 한 측면이라는 생각은 분명 들어요. 그런데 우리가 가르쳐야 할 분노는 ‘자각적인 분노’라고 생각해요. 프랑스 사회운동가 스테판 에셀이 쓴 「분노하라」 라는 책이 강조하는 것도 이 ‘자각적인 분노’에요. 정의를 실현하는 문제에서 ‘용기를 가져라’라는 거지 ‘화를 내라’와는 달라요.

분노에 대해 가치로운 절제와 더불어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분노는 용기를 갖게 하지만, 동시에 자기를 다치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에 분노가 자신을 집어 삼키지 않게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해요. 또한 인간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화를 낼 때는 반드시 ‘일부러’ 내야한다는 점이라고 보고 이를 부모나 교사도 학생들에게 꼭 강조해주었으면 합니다. 화를 낼 때의 목표가 ‘내가 화를 낸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화를 내는 것을 통해서 전과 같은 현실은 관용될 수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변화를 같이 모색하게 만들어 가야된다는 걸 말해요. 그게 분노라는 감정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것 같아요. ‘자각적 분노’, ‘일부러 내는 화’, ‘전략적 분노’ 이런 식으로 얘기되면 어떨까 싶어요.



역사교육_ ‘일부러’라는 말씀이 통제 가능한 화를 말씀하시는거죠?


박상훈_ 화 난다고 화를 내는 건 보통의 사람이지만, 화가 나는 것의 원인이 정의감이나 공정함에서 나와 관용할 수 없음의 결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결의나 정의감이 실현되는 쪽으로 나타나도록 책임 있게 화를 내야 한다고 봐요. 성마르거나 조급하게 내는 화는 인생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봐요. 100년도 못사는 인생이지만 길게 보면 그 시간에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자기가 만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시간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그것이 인격이라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비판적인 사고의 핵심은 이견이라고 생각해요. 정당정치가 갖는 긍정적인 것은 사회 갈등이나 대립을 이견으로 다룰 수 있는 공적 과정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봐요. 이견과 적대는 다르잖아요. 이견은 틀린 게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견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민주주의자지, 이견을 가진 사람을 배재하는 것은 민주주의자도 아니고 좋은 인간도 되기 어렵다고 보죠. 요즘 우리 사회에 충분히 다름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되, 그 다름이 서로 오해하거나 서로 편견 때문이 아니라면. 그 다름과는 친구가 되야한다고 생각해요. 다름을 가진 사람과 서로 양보하고 조정하고 협상을 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태도라고 봐요. 내 주변에 나랑 똑같은 사람만 두고 살면 인간은 실수하게 되있어요. 나랑 좀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데,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절제하면 내 인격도 좋아지고 실수도 줄일 수 있거든요. 그건 리더가 꼭 갖춰야 할 품성이긴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도 그런 자세가 되면 하루하루 스트레스보다는 오늘 다른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고 삶의 태도도 조금 달라질 수 있을까 싶어요. 권위주의 시대라면 싸워야지만, 그 단계를 지났다면, 즉 체제 자체는 들어 엎어야 하는 권위주의 체제가 아닌 민주화 된 체제라면 싸움과 갈등을 공존하면서 논쟁하며 다투고 협상하는 이견으로 바라봐주는 것. 틀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같이 가야하는 다른 것들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여 보는 것. 이렇게 가야 한다고 봐요. 그럼 사고가 달라지게 되겠죠. 공부하는 법이나 철학도 달라지게 되고. 그때쯤 되면 사람들의 표정도 아이들의 표정도 깊어지게 되지 않을까. ‘공부해서 뭐하냐?’ 이런 거 보다 공부라는 게 다른 생각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하겠구나 이렇게 되죠.


#4. 정치학자 박상훈과 오늘날의 정치 현실


◦ 현대 민주주의란 '갈등에 기반을 둔 갈등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갈등이란 현대 민주주의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에 가까운 기능을 한다. 다만 민주주의는 갈등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갈등의 수를 줄이고, 규모가 큰 갈등 속에서 작은 갈등을 해결, 완화하는 것을 추구한다. (<정치의 발견> 중에서)

◦ 정치란 차이를 없애고 같아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차이가 존재하고 같아질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차이와 다름을, 공존할 수 없는 적대가 아닌 생각의 차이나 이견으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좀 더 나은 공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 경쟁하고 타협하고 싸우고 조정하는 ‘종합 예술’ 같은 것이 정치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민주주의 시간> 중에서)


역사교육_민주주의/민주정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이견을 가진 사람들이 타협과 공존을 통해서 발전해나갈 수 있는 정치 체제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 점 충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재 우리나라는 양 진영이 합의를 이룰 수 없는 지점들이 지금 너무 커진 것 같아요.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국가에 비해 그 여지가 적은 것 같습니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갈등 양상 자체는 심각한 진영대결의 상황이기도 하고요. 요즘은 단지 진보-보수의 차원이 아니라 갈등의 지점과 양상도 더 복잡하고 다양해져서 시민들 사이에서 정치 이야기를 편히 나누기에도 참 어려운 것 같아 안타깝고요. 이런 현실에서 대화, 갈등, 타협과 조정이라는 실천적 시도가 가능할까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상훈 어떤 면에서는 ‘정당들의 관계가 어떠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바꿔나가고 더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의 본질 같아요. 우리 정치사에서 보수 정당이 국가의 이익을 독점한 채 똘똘 뭉치는 모습, 그리고 분열하는 모습을 우린 봤죠. 그러나 보수 정당이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기 떄문에 우리가 한 발짝을 진전하기 힘들다고 보기에도 어렵다고 생각해요. 하기에 따라서는 양상은 많이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저는 보수 정당 분들 보다는 흔히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분들을 아는 편인데요. 그들 중 일부의 관점과 태도를 볼 때 변화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안 하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더 잘할 수 있는데 반대를 과도하게 두렵게 만들면서 본인들의 노력 안 함을 알리바이 삼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옛날에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같은 분들을 인정하게 되는 게 있습니다. 그분들도 화를 낸 적은 많아요. 그런데 그분들의 행태나 말에서 비열함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고 봐요. 무언가 경외심을 가지게 하고 ‘저런 것이 정치인의 기상 같다’는 느낌을 시민들에게 주었죠. 정치는 사람을 두렵게 하는 요소가 있지만 이는 공포를 갖게 하거나 적의를 느끼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하거나 풀어나갈 때 마음 속의 떨림 같은 것을 갖게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정치는 그런 면모가 너무 적어요. 여야 모두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라 보고요.

마지막으로 한국 정치에 대한 제 생각을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는 현재의 상황이 어떤 면에서는 우리 정치가 여야 간의 차이가 너무 없어서 생긴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정당 정치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정당 간의 신념의 체계가 우리와는 조금 달라요. ‘나는 자본의 힘보다 사람들과 협력을 통해서 얻는 가치를 중시한다’는 생각과 ‘재산권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와는 차이가 분명하죠. 오히려 대화의 여지는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전 봐요.

그런데 (우리나라 주요 정당들은) 차이가 거의 없어요. (중략 : 박상훈 학교장은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데이터 3법, 노동조합법 개정 등의 사안을 통해 그 지점을 설명하였다)흥미롭게도 정당정치의 매력은 이념적 공공적 차이가 뚜렷할 때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유럽의 덴마크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 좋은 정치가 있는 나라라고 하는데 그곳은 정당이 11개 정도 되고 차이도 뚜렷해요. 시민들이 선호를 표출하고 나면 조정하고 타협하는 ’연합정치‘라고 하는 연정의 틀을 통해서 그것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죠. 우리의 정치 현실도 그렇게 성찰적으로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역사교육_다음 질문입니다. 이번 2020 미국 대선, 총평을 짧게 해주세요.


박상훈 민주주의를 통해서 사회가 발전하는 모습이라는 것에서 전진과 퇴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 같아요. 미국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했지만 사실 ‘유색 인종을 배제하는 민주주의’를 여야가 합의한 면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등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미국 민주주의에 큰 충격을 줬어요. 미국에서 흑인 차별이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흑인’은 인종 문제이기 이전에 노예제에 대한 문제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충격이었던 거죠. 미국 시민의 1/8 밖에 안 되는 차별받는 ‘흑인’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것도 미국 사회의 놀라운 충격을 주는 측면이었고, 그 충격이 또 트럼프라고 하는 반대 거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미국 사회가 두 개의 극단적인 충격을 10여년 만에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엘리자베스 워렌’이나 ‘버니 샌더스’의 시대가 곧바로 오기 어렵다고 생각을 했어요. 우선 분열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이 필요하고 그래서 조 바이든의 당선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 엘리자베스 워렌이나 버니 샌더스가 나왔다면 당선이 어려웠을 수도 있었겠어요. 이번 선거에서 조차 트럼프도 표를 많이 얻었죠.

선거라는 건 크게 3단계를 거치거든요 하나는 ‘후보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렌이 아닌 바이든이 되었는가의 문제도 흥미롭습니다. 다음에는 ‘시민들이 표를 찍는 행위’가 있어요. 근데 더 중요한 것은 ‘개표’에요. 개표 결과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것의 정당성이 해석되어 당선의 의미가 굳어지는 거거든요. 저는 지금 버니 샌더스가 미국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고 트럼프가 배제되는 과정이 더 흥미로워요. 개표 과정을 이렇게 진행하게 되면 트럼프는 미국 사회에서 면역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 이런 것을 생각 하게 되요. 그런 점에서 우리 정치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이렇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서 배타적인 정치를 하는 싸이클을 끝나야 하는 것을 미국 정치에서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점에서 정치는 사회가 분열된 속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받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지 못해요. 세상을 바꾸는 건 예술과 발명과 스포츠, 혁명 이런 것이 바꾸고요. 정치는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이 나오게 하여 세상이 나아지게 하는 데 있다고 전 생각해요. 정치는 가장 큰 미덕은 공동체의 통합성이에요. 진보든 보수든 그걸 기초로 두고 해야 하는 것이지 이를 감수하고 다 바꾸려고 한다면 사회가 견뎌내지 못합니다.


역사교육_ 2010년대 들어 민주주의 체제 자체의 효용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는 것 같아요. 미국은 트럼프니즘, 유럽은 극우정당의 발흥이나 브렉시트 문제 등으로 ‘민주주의 혹은 민주정이 한계를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민주주의/민주정 역시 근대적 정치체제이자 역사적 구성물로서 어떤 평가를 해볼 시점에 놓인 게 아닐까요?


박상훈_제도적으로 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전성기에요. 현재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민주정)을 택한 나라가 120개 정도 됩니다. 구성원들의 절대 다수를 평등하고 자유롭게 다루는 체제는 인간의 역사에서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어요. 소수 지배체제가 인류사에서 거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지요. 지구 땅에 민주주의 국가가 절반을 넘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가 되기에는 어려울 뿐더라, 어따ᅠ간 의미에서는 되는 것이 최선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다른 체제도 있을 수 있죠. 그래도 민주주의 체제가 이렇게 많으니까 전성기일 수 있다고 봐요.

민주주의는 체제 이념을 중심으로 경쟁할 수 있는 좋은 요건을 가졌어요. 사민주의 또는 사회주의 그룹과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들 사이 경쟁이 대표적이죠. 그 경쟁의 과정에서 인권이든 사회권과 같은 분야에서 진보가 기여를 많이 할 수 있었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현재는 우리가 살아가야 될 미래의 비전을 두고 경합하는 게 약해져버렸다는 점이에요. 이게 약해지면 사회가 ‘다른 것’으로 싸우게 되요. 그 ‘다른 것’이 정체성일 수도 있고, 인종이나 성적 취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문화의 차이나 테러와 같은 문제일 수도 있고요. 그게 인간이 가진 한계에요.

오늘날 민주주의의 현실에 놓인 문제는 민주주의가 끝난 게 아니라 인간의 한계가 드러나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한다면 기대할 수 있는 게 어디까지구나. 그래서 민주주의를 통해서 하지 못하는 건 다른 걸 통해서 보완해 가야겠구나’라는 지점이라고 봐요. 이 지점에 관해서 인류가 생각을 모아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안되면 트럼프니즘이나 극우포퓰리즘도 계속 될거고 끊이지 않을거에요. 그게 우리가 처한 도전이라면 도전이라 생각해요.

민주주의가 잘못된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잘 작동할 수 있는 이념이나 정당적 차이가 안정되게 정치를 구성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적나라한 인종차별, 적대 의식과 같은 것이 정치를 더 많이 지배한 것, 이게 우리가 개선해야 할 숙제 같아요.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겠죠. 미국정치가 보여준 건 어려움 속에서 개선의 기회를 보여준 거고. 유럽도 극우 세력들에게 끝까지 몰렸지만 대체로 극우 세력의 집권을 막은 경험을 보여준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이후에 대해 전망하는 구체적으로 견해는 아직은 없어요. 그런 점에서는 현재도 민주주의가 대세죠. 심지어 극우 포퓰리즘 조차도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하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다행이죠. 다만 정당들 사이에서 미래 비전은 좀 더 구체화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역사교육_마지막으로 역사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마무리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상훈 근대 이전에는 정치학은 역사학의 한 분야였어요. 마키아벨리도 이탈리아가 도시국가들로 분열된 당시의 상황에서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기를 바라고 �군주론�이나 �로마사논고�를 썼죠. 역사가 보여주는 건 인간이 주체적으로 노력하는 실천적 지혜에 대한 것들이었어요. 저는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진보적인 교육 운동을 추진하는 힘이 되어 주셨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는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역사’나 ‘관용 해서는 안 되는 역사’와의 대면을 강조했다면 이제는 앞서 언급한 과거 실천적 지혜를 강조했던 전통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가면 어떨까 싶어요. 권위주의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측면과 더불어 정치에서 혹은 인간의 삶 속에서 발휘할 수 있는 지혜로움을 통해 시민들을 도와줄 수 있는 관점들을 역사 교육이 나누어주었으면 해요. 그러한 과정이 많아진다면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도 달라지겠죠. 야유하고 욕하고 것보다는 정치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보되 우리 인간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라는 측면으로 질문이 더 많이 제기되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역사 선생님들과 대화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One-Pick! : 역사교사들에게 추천한 논문/단행본/문헌

○ 박상훈, <민주주의의 시간>(후마니타스, 2017)

○ 박상훈, <정당의 발견>(후마니타스, 2017)

○ 박상훈,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 2015)

○ 박상훈, <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후마니타스, 2013)

○ 샤츠 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후마니타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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