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이야기 > 특강 ‘한국현대사와 인권’& 번개답사(마석모란공원) 후기
>>김경수(전남 곡성고), 박영진(경기 덕정고)
2020년은 개인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해이다. 작년까지 생활했던 인천에서 전남지역으로 옮겼고, 3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다는 주말 부부의 생활을 접고 올해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의 창궐로 여행과 모임은 금지되었고, 지역과 학교를 옮기니 아는 사람들도 없고, 함께할 모임도 없이 학교와 집만 왔다 갔다 하는 진자 운동하던 중이었다. 학교에서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은 구글 클래스니 줌이니 하는 새로운 장비와 시스템을 통해 비대면에 잘 대처하는 데 그런 것도 빠르지 못해 눈팅 만으로 여기저기에 기웃거리고 있었다.
나도 뭔가 해봐야지 하는 마음에 zoom은 좀 부담스럽고, 대면은 시간과 환경적으로 불편하던차에 전역모에서 유튜브 특강을 한다기에 얼른 신청해 듣게 된 강의가 박래군 소장의 특강이었다. 우리 사회의 곳곳의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독재 정권과 권위주의 정권에서 발생하는 인권 유린 현장을 알리기 위해 발로 뛰며 겪은 박래군 소장의 체화된 강의였다.
제주 4·3항쟁에서 다랑쉬굴의 솥단지와 시신으로 전시된 이덕구 대장의 윗옷 속의 숟가락을 통해 민중의 저항은 이념보다 살기 위한 생존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서대문 형무소의 담장 안의 미루나무와 담장 밖 미루나무를 보고 형무소에서 고통 받고 죽어간 사람들의 엄혹한 환경을, 마석 모란공원에서 수은 중독으로 죽어야 했던 문석면과 컨베어벨트에 사망한 김용균을 통해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아이들의 무참한 죽음에서 산업재해를, 용산 전쟁기념관의 탱크를 놀이터로 만들고 어린이들에게 전쟁을 친숙하게 하는 문제를,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보호시설을 통해 배제와 격리, 차별과 혐오를, 세월호 사건을 통해 사회적 참사에 속 피해자의 권리와 우리가 이런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5.18 민주 항쟁을 통해 처벌하지 못한 역사의 문제와 저항의 주체가 빈민과 여성들이었다는 사실을, 남영동 대공 분실을 통해 우리 사회 엘리트가 지은 건물이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식인과 엘리트들이 사회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 사회의 리더라고 불린 사람들이 오히려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는데 더 앞장섰고, 어려울 때 마다 차별받고 억압 받았던 민중들이 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던 연수였다.
공교롭게 최근에 보여진 의사들과 의대생들의 행태와 이 나라 최고라는 학교의 대학생들, 어려운 고시를 패스한 검사들의 모습이 겹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지도층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만이 아닌 약자에 대한 기록도 기억하고 패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그들과 암묵적 공범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장님의 말씀에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
코로나19의 숲에서 번개답사를 맞이하다.
10월 어느날, 코로나19의 또 다른 후유증인 코로나 블루를 겪으며, 확찐자가 되어가는 상황속에서 저는 ‘프로 집콕러’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역모에서 가뭄의 단비와 같은 번개 답사 글을 보았습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이불 밖을 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절박감에 답사를 신청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올해 신규교사입니다. 경기도가 낯선 제게 올 한해는 너무나 가혹한 한 해였습니다. 친구 하나 없는 경기도인데다, 신규연수 또한 취소되어 발령 동기들을 모르는 채 지낸 9개월이 너무나 외롭고 야속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활동했던 의역모는 제게 너무나 따뜻한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런 따뜻함을 기억하고 신청한 전역모의 번개답사, 그 곳을 향하는 길은 제게 무척 설레는 길이었습니다. 초행길, 세월의 흐름에 닳아 낡은 자동차 전용도로의 포장길…. 운전의 두려움 조차 설레게 만드는 시간이었는걸요. 한편으론 생각보다 막히는 길에, ‘혼자 지각하면 누구에게 말씀드리지?’, ‘어떻게 첫마디를 꺼내야할까?’ 갖은 걱정에 걱정을 안고, 마석 모란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시간은 9시 59분. 다행히 늦지않게 도착했습니다. 쭈뼛쭈뼛 사이에 끼어들어갔습니다. 첫마디를 떼는게 무척 어려웠는데, 제게 ‘어느 선생님을 따라온 학생이냐’는 질문을 해주셔셔 제 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 신규교사라고 말씀드리니, 너무나 반갑게 맞이해주셔셔 감사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학술답사 이후, 처음 온 답사. 두근거리며 대화에 귀기울였습니다. 답사 최신 트렌드가 인이어 답사라며...^^ 인이어를 받고 자료집을 받아보고서,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사설 공원묘지인 모란공원에는 생각보다 제법 많은 묘들이 있었습니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힘쓴 분들 외에도 민간인들도 많이 묻혀계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분들의 묘지 옆에는 작은 안내표지가 있어, 금방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부족한 지식의 한계로 알지 못하는 많은 운동가분들이 계셨기에 그저 표지를 읽고서 이해하는 척했습니다만, 금새 박래훈 선생님께서 오셔셔 설명해주셔셔 많은 일화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잠들어 계셨기에 그분들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 또한 복습차원에서 코로나19가 조용해진 후에 박래군 선생님의 『우리에겐 기억해야할 것들이 있다』를 읽고 홀로서기 답사를 한 번 더 갈까합니다. 그 전에 전역모 분들께 기억에 남는 몇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고자 합니다.
“스물일곱의 불꽃” 박영진의 묘
많은 묘들 가운데 한 개의 묘에 여러 이름들이 새겨진 특이한 묘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박영진의 묘입니다. 박영진은 야학을 다니며 노동문제에 눈을 떴고, 임금인상투쟁을 하다, 전태일처럼 노동운동에 헌신 끝에 분신하여 생을 마감했습니다.
답사란 우연한 곳에서 우연한 배움을 주는 것 같아요. 그의 묘에 박영진, 박창호, 양순녀, 김천석에 이어 올해 유학수라는 인물까지 총 5명의 인물들을 합장했다는 사실도 인상깊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이 저를 사로잡게했습니다. 1960년에 태어나 1986년에 스물일곱의 불꽃처럼 사라진 박영진 앞에, 1994년에 태어나 2020년 스물일곱이 된 또 다른 박영진이 앞에 서는 우연이었습니다. 나와 동명이인인 사람이, 그것도 나와 같은 나이에 불꽃처럼 살다갔다는 것을 듣자, 묘한 동질감과 한켠으로는 묘한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습니다. 나는 ‘스물일곱의 다른 박영진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불꽃처럼 살고 있었는가’, ‘임용고시에 합격했다고 모든게 끝난 양, 나태하게 살고있지는 않았는가’, 괜시리 한번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문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는 윤동주의 서시의 문구가 생각나게하는 묘였습니다.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람, 그래서 더욱 다른 운동가들보다 마음 한켠에 남는 인물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삼백만 근로자의 대표” 전태일의 묘
사실 저는 지난 박래군 선생님의 연수를 듣기 전까지 모란공원에 누가 묻혀있는지도 몰랐습니다. 특강을 듣고서 전태일 열사가 이곳에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묘를 보고 든 이미지는 ‘죽어서도 투쟁을 잊지않는 사나이’입니다. 마침 답사 전날, 전태일 추모식이 열려있었고 때마침 추모비에 누군가가 빨간 머리띠를 묶어놓았었거든요. 죽어서도 상징이 되어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사나이, 훗날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존경했고 존경하는 노동운동의 상징이 된 그의 묘였습니다.
한편, 묘지를 답사하면 항상 느끼는 것은 ‘덧없음’이었습니다. 조선왕릉 등의 묘를 답사하다보면 ‘세월의 덧없음’이라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긴 세월 권세를 누렸다가도, 세월이 흘러 죽게되면, 왕과 왕비 둘만 산에 외로이 남아있는 모습에서요. 그렇지만 전태일의 묘는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비록 왕릉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그를 둘러싼 동지들, 즉 아래에선 그를 존경했던 박영진과 박래전이, 뒷켠에는 새로운 노동문제로 ‘비정규직’문제의 상징이 된 김용균씨가, 그리고 그런 노동자들을 멀리서 응원해주는 어머니 이소선씨의 무덤까지. 처음 전태일이 이곳에 올 때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주변을 지켜주고 있기에, 덧없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청년 노동자” 박용균
전태일의 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박용균의 묘가 있습니다. 멀리서 보아도, 박용균의 묘는 대번만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자갈돌을 수평하게 깔고, 그 위에 자전거를 타는 노란 청년의 모습을 꽂은 특별한 묘제이기 때문이지요. 박용균은 2018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컨베이어 벨트에껴서 유명을 달리한 청년 노동자입니다.
사실 저는 전태일의 묘보다 이곳에 박영균의 묘가 묻혀있다는 것을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금년, 저는 발령을 받으면서 한국사와 함께 ‘사회문제탐구’라는 과목을 맡았습니다. 난생 처음 맡는 과목에 처음엔 힘들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문제 사례를 다뤄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회 문제를 역사적 연원으로 살펴보아 학생들에게 역사가 주는 의미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의미있어 매력에 빠지게하는 과목이었습니다.
박용균이라는 노동자를 제가 만난 것은 사회문제탐구 과목을 통해서였습니다. 노동문제의 일환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면서 태안화력발전소의 사고사례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아직은 하루살이, 목구멍이 포도청인 신규교사의 입장인지라, 관련 사례만 찾으면 다음날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기 바빴습니다. 박용균씨는 그렇게 활용한 비정규직의 안타까운 죽음의 사례였습니다.
오랜만에 접한 그의 이름에 반가움도 잠시, 나의 수업사례를 다시 한 번 반성했습니다. 나는 당장에 수업 진도에 나가기 바빠 ‘아이들에게 비정규직에 대해서 경제적으로만 접근하지는 않았는지’, ‘박용균씨의 죽음을 분위기 환기를 위한 재료로 쓰지는 않았는지’, ‘그들의 삶을 통해서 ‘역사’ 말할 수는 없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괜시리, 노란 자전거 위에서 웃는 그의 모습이 나에게 치열하게 고민해보라는 고민을 던져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할말이 있는, 기억되어야할” 묘들
그 외에도 정말 많은 묘들이 있지만, 유독 ‘아직 할말이 있는 무덤들’이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흔히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라고 말하는 ‘박종철’의 묘도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임진강에 뿌린 것이 아버지의 한이 되어 가묘를 꾸몄다더군요. 당시 민주화 운동 당시의 억압적 사회 모습을 알 수 있어서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묘조차도 옆에서 지키려는 옆의 박정기 아버지의 묘를 보면서 아들의 의지를 이어받은 아버지의 모습에 숙연해졌습니다.
대체로 모란공원의 묘들은 이런 함께하는 이야기들을 담은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때로는 아내와 함께, 때로는 어머니 때로는 아버지와 함께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들과 함께하기도 합니다. 죽어서라도 억울한 맘을 다른 사람들의 의지로 이어나가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지와 가족애가 모란공원을 더 따스한 느낌의 묘지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 아직 숙제로 남겨진 묘들도 눈에 남았습니다. 과거사규명이 되지 않아 죽음이 밝혀지지 않은 묘들입니다. 먼 한켠, 높다란 위치에 남겨져 있는 그들의 묘들이 아직 우리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하는 길이 멀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의 기억, 아이들의 기억, 우리들의 기억
김춘수 선생님의 「꽃」이라는 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간 모란공원이라는 들었을 때, 그저 한 추모공원에 불과했습니다. 박래군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모란공원은 제게 ‘전태일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게 모란공원은 ‘현대사의 발자취’가 되었습니다. 그 안에 녹아있는 노동, 민주, 인권의 역사들이 여기 숨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답사를 통해 제게 모란공원은 ‘전태일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된 듯 합니다.
또 한켠으로는 이번 답사가 수 많은 과제를 남겨준듯합니다. ‘줄어든 수업시수로 인해, 소홀해진 한국 현대사 수업, 전달하지 못한 민주화와 노동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구성해야할 것인가?’, ‘언젠가 아이들 속에 잊혀질 수도 있는 노동, 민주화, 인권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 ‘역사에서 인물들의 의지를 어떻게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이곳 모란공원의 이야기를 더 나아가 무엇을 더 공부해야할 것인가.’
처음엔 마냥 좋았던 가뭄에 단비 같았던 번개답사였습니다. 그러나 번개답사는 가뭄 끝에 내린 홍수처럼 제게 수업에 관한 많은 고민을 갖게했습니다. 사실 아직 좋은 수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 답사를 기회삼아, 좀 더 노동과 인권, 민주화의 차원에서 더 공부를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먼저 『전태일 평전』과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읽어보려합니다. 코로나가 조용해진다면, 소개 받은 다른 묘지인 망월동 묘역과 양산 솥발산공원, 이천 민주공원도 방문해보려합니다. 제게 좋은 공부의 기회와 사색의 기회와 숨쉴 틈을 만들어준 이번 번개 답사에 감사합니다. 답사 안내를 해준 박래군 선생님과 코스를 구성하기 위해 애쓴 전역모 집행부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 관계자 코멘터리 – 이은안(집행부 답사부장, 답사기획자)
10월에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라는 주제로 현대사 특강을 해주신 인권운동가 박래군선생님께서 강의 내용중에 나왔던 모란공원의 민주열사묘역을 역사선생님들에게 안내해주시겠다는 깜짝 제안을 해주셔서 급기획된 번개답사입니다. 코로나와 교통편 등 여러 제약으로 많은 선생님들이 함께 하지 못하고 20여 명의 선생님께서 참여해주셨지만, 민주열사묘역에는 박래군선생님의 동생 박래전열사도 계시고, 또한 답사 하루 전날인 11월13일은 전태일 50주기로, 박래군선생님의 안내로 함께한 모란공원 답사는 더욱 의미있는 답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