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기지촌의 아픔을 어루만진
두레방 운동

문영미, 김태정 선생님과의 대담을 기록하다

편집자주] 2019 여름 자주연수 둘째날, 역사교사들은 문영미-김태정 선생님과 만나는 자리에 함께했다. 이번 답사의 주된 소재인 기지촌 여성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은 지역사회에서 묵묵히 실천해왔다. 답사에 참가한 역사교사들은 이 두 ‘언니’와의 대화를 매우 인상깊게 기억한다고 했다. 이러한 감동을 더불어 나누고자 <역사교육>은 대담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사회자 : 우현주(경기 효자고)
기록자 : 맹수용(경기 의정부고)
대담자 : 문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연구실장)
김태정(두레방 활동가)


기지촌1.JPG


우현주 두레방과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가 궁금하네요?


문영미 안녕하세요. 무척 오늘 피곤한 하루를 보낸 걸로 알고 있는데, 지루하지 않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두레방을 처음 시작하신 문혜림 선생님의 딸이고, 그 때 엄마를 도와 두레방 운동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운영위원으로서 두레방을 돕고 있습니다. 현재는 “문익환 통일의집”과 이한열기념관을 오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이한열 기념관에서는 학예연구실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87년 6월 항쟁 때 연세대에서 함께 한 인연으로 이한열기념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수유리에 문익환 목사님이 사셨던 통일의 집이 있는데,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방치되었다가 최근에는 그 분의 유지에 따라 유품을 바탕으로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김태정 두레방 활동가 김태정입니다. 활동한지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한게 우리 언니들과 관련된 주제로 기행을 하고 이렇게 저를 불러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기지촌 여성에 대한 관심이 대한민국에서 크지 않은데, 조금씩 이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과 장소가 생겼다는 점에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현장을 보셨으니 조금 더 알게 되셨으니, 언론 등에서 기지촌 문제를 접하게 되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현주 사실은 간담회를 준비하면서 저도 문혜림선생님을 알고 싶어서, 그리고 지역의 역사교사로 두레방 운동을 알게 되고, 이를 설립한 문혜림 선생님의 딸이 제 선배여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읽어 보면 좋을지 여쭤봤어요. 그 때 본인이 쓰신 <아무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를 추천해주셨어요. 이 책을 왜 쓰게 되셨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가 궁금해요.


문영미 책 제목으로 느끼실 수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의 제목은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나온지 오래 되어서 아쉽게도 현재 절판이 된 상태입니다. 사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저희 어머니가 한국에서 사시다가 미국으로 들어가셔서 회갑을 맞으셨어요. 엄마가 한국에서 활동했던 것도 있고, 주변에서 어머니 회갑 기념으로 문집을 내보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분들이 좋은 원고를 써주셨는데, 이를 바탕으로 책을 만들기엔 일관성이 없는 듯해서, 어머니의 일생을 제가 정리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머니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입장에서 써보면 좋겠다는 권유가 있기도 했고요.


어떤 책이든 책을 쓰기 전에 뭔가 알고 싶거나 궁금한 질문이 있잖아요. 제가 당시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 풀고 싶었던 부분은 2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저희 어머니는 미국분이고 아버지는 한국분인데. 아버지는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님입니다. 아버지는 원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과 종성 쪽이고요, 태어나기는 윤동주의 고향으로 알려진 북간도 명동촌에서 1921년도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다 용정으로 가셨다가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말씀해주신 명동촌에서의 아름다운 기억이 생각나는데, 당시엔 중국과 수교 이전이기에 가볼 수 없는 아버지 고향에 대한 호기심이 컸습니다. 다른 하나는 반면 우리 어머니는 앵글로색슨 혈통으로 영국에서 뉴잉글랜드 쪽으로 이주해 온 집안이었고, 농사라던가 나무를 키우는 일을 하던 집안이었습니다. 다소 유복한 장미농장의 집 딸로 태어났어요. 집에 말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15살이나 어렸습니다. 두 분이 하드포드 신학교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고 어머니가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너무나도 다른 두 분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신비롭기도 하고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두 분의 만남이 저의 뿌리였으니 책을 쓰는 일은 이 부분을 찾아보는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회갑을 맞이하면서 어머니가 여성으로서 살아오신 모습, 집에서 자식을 돌보시다가 밖으로 나와 두레방 운동을 시작하게 된 어머니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쫓아가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사학과를 졸업하여 역사에 기록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컸기에 정리를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현주 아까 영상 보셨죠? 제가 원고 작업을 하면서 한 두장이라도 어머니와 관련된 사진을 얻고 싶다 이야기하니 보내주신 사진들이었습니다. 원고 지면의 한계로 다 싣지 못하여 아쉬워서 영상으로 만들어봤습니다. 영상 속 두 분의 모습이 굉장히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오시죠?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석방되어 나오셨을 때 포옹하며 만나는 장면이 있고요, 어머니가 면회를 가셨는데 두 분이 교도소 직원이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게 키스하고 계신 장면이 있습니다. 가택연금을 당했던 아버지의 답답한 생활에서 뒷 담으로 나가 마실을 다녀왔던 장면들도 있습니다. 딸로서 두 분에 대한 소회,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주셨으면 해요.


문영미 우리 어머니는 전통적인 한국의 어머니 상은 아니었고, 자식보다는 부부 간의 관계를 중시하셨던 분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바친, 한국으로 나와 준 어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랄까? 미안하면서 고마워하는 마음이 깊으셨던 것 같아요. 올해 3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제가 6년 정도 부모님을 모셨는데, 매번 식탁에서 만나면 꼭 뽀뽀도 하시고, 뽀뽀도 힘들어지시니 팔을 어루만지시면서 매일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주신 관계였어요.


우현주 지금 문영미샘 남편분이 와 계십니다 남편분은 어떤 분이실까요? 하하. 이제 김태정샘께 좀 여쭈어볼게요. 두레방을 방문했을 때 선생님들께 여쭈어봤어요. 활동가분들 중에 의정부 분이 계신지를요. 거의 없으시다고 했어요. 그런데 김태정 선생님은 양주에서 태어나 의정부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이에요. 학창 시절 기지촌 여성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김태정 제가 어렸을 땐 개구쟁이 학생으로 사회에 관심이 많이 없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땐 동두천과 경계선에 있는 양주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이 우유 대리점을 하셨는데, 동두천에서 하셨어요. 기지촌 앞에 있는 레스토랑 같은 곳에 우유를 제공했었죠. 부모님이 여러군데 데리고 다니셨는데, 기지촌 근처는 데리고 가시지 않았어요, 아빠가 제공하는 우유 중 밀크쉐이크가 있어서 따라가면 먹을 수 있는데 잘 안 데리고 가셨어요. 그래서 기지촌에 대해 잘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암묵적으로 자연스럽게 언니들의 존재는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들에 대한 피해, 언니들의 상황은 잘 모르고 자랐죠. 제가 대학에 들어가 사회 친구들을 만나보니, 양주출신이라고 하면 거기 미군부대가 있어서 무섭지 않냐는 물음을 하기도 했어요. 어렸을 때는 미군기지에 대한 인식을 크게 하지 못했었는데, 그게 더 무서운 일이었죠.



우현주 선생님이 고등학교 때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미선 효순 사건이요.


김태정 그 때 제가 고3이었어요. 그래서 더 기억할 수밖에 없는 큰 사건이었죠, 많은 시민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제가 당시 너무 날라리(?)여서, 당시엔 인식이 크지 않아서, 그런데 나중에 20살이 되어 미선 효순의 가족을 보았을 때, ‘왜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했을까?’라는 후회가 생겼어요. 제가 광동여고에 다녔는데, 철학에 대한 관심이 깊은 선생님 분들이 계셨는데 ‘왜 적극적으로 알려주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립학교 때문이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우현주 제가 말씀을 들어보니 김태정 선생님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시고, 두레방에 취직한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첫 직장으로서 두레방을 만나신 것인데, 그 당시 내가 두레방에서 만난 활동가 분들, 언니들에 대한 짧은 기억을 들어보고 싶어요.


김태정 그냥 한국의 평범한 젊은 여성이었는데, 정말 직장을 찾기 위해 취업을 했어요. 원래 상담소라는 곳은 많은 경력이 많아야하는데 그런게 많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장님이 저를 고용하셨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지역 사람이 너무 없었다는 것 때문인 것 같아요. 두레방에 지역 사람들도 찾아오지 않으니까요. 지역 사람이다보니 고용하게 되었죠. 원장님이 이후에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부모님께서는 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시지 않냐고. 그러나 우리 집은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서로의 일에 터치 하지 않아 말씀드린 적이 없다는 답변을 했지요. 하하. 우리가 하는 활동이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성착취 피해에 처해 있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활동이에요. 그러면 친구들은 무섭고 위험하지 않냐는 걱정을 해요.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신경이 안 쓰였어요. 뭐가 위험한 것인지도 모르고. 한 달에 한 번씩 클럽으로 아웃리치를 나가요. 여성들에게 우리를 홍보하는 것이죠. 그 일도 이상하게 무섭지 않은 거에요. ‘운명인가?’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10년이 지났어요. 일을 하다 보니 두레방이 상하관계, 권위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각자의 역할이 있다 보니,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원장님은 항상 지지해주셨어요. 대신 책임은 따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일이 지루하거나, 권태롭거나 한 것이 없었습니다. 활동가들 개인은 다들 전문성이 있습니다. 두레방의 시스템의 영향이죠. 우리 언니들은 지금 7-80대 할머니들이세요. 처음엔 무서울 거라 생각했는데, 옆집 아줌마-할머니 같아요. 조금 싸움을 잘 할 것 같은 보통 아줌마 느낌이었지만요. 하하 그 때 두레방에서 저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바가 없었고, 어떻게 언니들에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프로그램을 할 수 있을지를 몰랐기에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어요. 언니들은 과거의 경험 때문에 한이 많아요. 그러면 그 한을 풀어야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을 풀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두레방이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지루할 틈이 없었죠. 원예 치료, 등산, 클럽 가보기 등등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기지촌에 이주여성들이 한국 언니들의 자리를 채우게 되었어요. 이제는 그들에 대한 지원도 해야해요. 제가 영어를 못해 소통을 못했는데, 이제는 영어공부를 해야하니 쉴 틈이 없는거죠. 04년에 성매매특별법이 발의 되면서 상담소도 운영하게 되었고, 페이퍼 워크도 늘어났죠.



우현주 두레방이라는 단체는 영어이름이 my sister’s place, 친정집이라는 의미로 만들어졌다고 하고, 두레는 순우리말로 공동체라는 뜻이잖아요. 문영미선생님께 여쭙니다. 책을 읽다보니, 어머니는 당시 50세가 넘으셨을 때인데, 어머니께서 만나는 분들은 젊은 여성들 이었을 것이에요. 아마 친정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셨을 것 같은데, 두레방 활동가, 문혜림 선생님의 운동방식이 감동적이었어요. 운동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는 부분도요.


문영미 저희 어머니가 처음 두레방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해볼게요.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을 한 이후 아이를 키우다가, 사회사업 전공이다보니, 미국인으로는 일을 찾기 어려웠어요. 우연히 미군부대에서 사회사업가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용산, 의정부, 동두천의 미군기지에서 알콜, 마약중독 미군들을 만나며 상담하며 돕는 일을 1970년대 중반에 하게 되셨어요. 그러다보니 미군들과 함께 살고 있거나 사귀고 있는 한국 여성들이 엄마의 눈에 들어온 거죠. 같은 여성으로서요. ‘이 여성들이 굉장히 힘든 상황에 처해 있구나. 한국사회와 미군으로부터 무시를 받고 힘든 환경에 처해 있구나. 이 분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에요. 광주 사건 있을 때, 아버지와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86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기지촌에서 활동을 시작한 거죠. 이전까지는 기지촌에 한국 사람들은 무섭고 별천지 같은 곳이어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여성단체로서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죠. 어머니는 이미 미군부대를 출입하며 알게 되었고, 그게 별로 무섭지 않았던 거죠. 오히려 미국여성으로서 기지촌 여성들에게 다가가기 쉬은 면도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한국으로 시집오면서 아버지가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하시면서 민주화 운동에도 관여를 하시게 되었지만, 아버지를 만나기 전부터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어머니가 고-대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던 운동을 교회에서 알게 되면서 영향을 받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름방학 때 흑인 빈민가, 할렘가에 가서 여름 동안 생활을 하시면서 일도 경험하고, 어떤 평등한 관계, 사람들에 대한 편견 없이 다가가면서 만들어가는 조직 문화 등을 배우시고 몸으로 체득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머니 같은 경우 두레방 여성들에 대해서 편견이 있는데 없는 척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편견 없이 여성들에게 다가갔던 것 같아요. 그들이 어린 시절 가난과 상처 때문에 이런 상황에 놓였다는 부분에 대한 공감을 하셨고, 그 공감이 활동으로 이어지신 것이죠.



우현주 김태정 선생님은 의정부에서 활동하시다가 지금은 평택에 계세요. 두레방 의정부에서의 활동과 평택에서 활동의 차이? 지금 어떤 일을 하시는지?


김태정 기지촌은 없어진 게 아니라 지금 진행 중입니다. 현재는 이주 여성의 문제로 대체된 것일 뿐이죠. 그래서 폭력적인 피해는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주 여성들의 지원까지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지촌이 큰 곳이 평택 지역입니다. 그래서 06년 경기도 사업을 받아서 실태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e6비자를 받고 일하는 여성들의 피해 실태조사를 했었죠. 많은 수의 여성들이 평택에 있다 보니, 성착취 피해 이주여성을 위한 활동을 평택에서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마침내 성착취 피해 이주여성에 대한 지원을 하는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의정부는 언니들의 명에회복 활동과 이주여성들에 대한 지원을 함께 하고 있었어요. 이를 하다가 작년에 평택에 가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의정부는 현재의 미션을 하고 있는 것이고, 평택은 이주 여성문제, 피해에 대한 이야기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보니 이주여성들이 겪는 피해는 인종차별의 문제로 연결되더라고요. 곧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이주민들과의 연대활동으로 이어지게 되고요.


문영미 어찌되었든 동두천, 의정부지역에서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하고 있잖아요. 사실상 여기서 기지촌 여성들은 거의 없어지고 할머니들만 남아있는 상황인거죠?


김태정 아직 안 나갔어요. 동두천 캠프 케이시에도 일부 남아있고, 2020년까지로 이전을 약속했지만, 항상 지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클럽들도 남아있는 곳이 있습니다. 부지가 평택으로 완성되고 있고 북쪽에 있는 미군부대들이 대거 평택으로 대거 이동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저희도 큰 기지 앞에 많은 여성들이 피해가 있을거라 예상을 하였는데, 이제 문화가 바뀌었어요. 미군들도 이제 시골에서 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자신들끼리 돈을 모아 택시를 타고 강남에 가죠. 그래서 이제는 서울과 강남쪽으로 미군 폭력이 옮겨가는 상황으로 번지고 있어요. 평택의 게이트가 커지고 그 앞에 상업시설이 많아도, 클럽이 있어도 여성들이 많이 고용되거나 그러지 않을 것 같아요. 평택 시내를 가거나 서울로 가게 되죠. 2006년 동두천에도 지하철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인터넷의 발달로 그들의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거든요. 서울로 나가서 놀고 들어오는 방식으로요.



우현주 한 두 가지만 더 질문을 해보고, 선생님들 질문을 들어보죠. 문영미샘은 김대중, 문익환은 기억하지만, 박용길, 이희호, 문혜림은 기억하지 못한다는 부분을 지적했거든요. 한국 역사에서 개인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 평화 운동에서 문혜림 선생님이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소회를 말씀해 주셨으면.


문영미 제가 자라나면서도 역사 인물 중 여성들이 거의 없잖아요. 위인 중에서. 그래서 무의식 중에 여성들은 역사나 사회에서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없나?라는 질문을 하면서 자라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역사샘들께서 인류의 반인 여성들의 역사 속에서의 역할을 조금 더 발굴해서 소개하는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3.1민주구국선언문 사건으로 유명한 김대중, 문익한 등등이 감옥에 가셨지만, 그 분들의 석방투쟁을 하면서 언론에 알리고 활동을 했던 것들은 부인과 가족들이었잖아요. 민주화 운동에서 그분들의 역할이 작은 것이 아닌데, 남성 위주로 역사가 기록되고 기억된 다는 것. 이것을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기 쉽거든요. 역사속에서 여성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면 좋겠다 싶어요.

우리 어머니의 경우 부인들과의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했지만, 선교사분들과 5.18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미군기지에서 일하셨기 때문에 우편이 검열되던 시절에서 apo 미국 우편을 통해 외국으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많이 하셨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또 두레방 운동을 우리 어머니가 처음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단지 기지촌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운동을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그 때가 전체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인권운동에 대한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두레방은 기지촌 여성들, 이주 여성들의 성매매 문제를 두레방에서 앞장서서 하고 있지만 국내에는 수 많은 여성 단체들이 있어요. 그 단체들이 한국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 여성, 청소년 성매매 여성을 위한 단체 등이 많은데, 그것의 첫 시작이 우리 어머니가 시작한 두레방 운동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생겼고 현재는 기지촌의 문제는 국가의 책임이다. 정책적으로 박정희 때부터 장려하고, 성병검진을 통해 여성들을 국가가 관리해왔던 것에 대한 국가적 배상을 해야한다는 재판도 하고 있는데요, 모든 것들이 우리 어머니가 두레방에서 뿌린 씨앗이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부분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우현주 한 가지만 더, 어머니가 7년 간 두레방 하시다가, 미국에 가시거든요. 책에는 향수병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아버지와 결혼할 때 언젠가 같이 미국가서 살자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미국에 가서 제2의 두레방 운동을 하게 되셨죠?


문영미 제가 태정씨가 10년 간 즐겁게 하셨다니 운명이신 것 같다 생각합니다. 우리 엄마는 7년 하다가 미국에 들어갔어요. 너무나 힘든 일이잖아요. 여성들이 살면서 트라우마를 겪었는데, 그로 인해 나타나는 싸움과 욕설과 거친 행동들이 많아서 힘들어 하셨어요. 어머니가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하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성들과 하나가 되어 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많이 힘들어하셨거든요. 그래서 어머니도 트라우마를 겪은 것 같아요. 생각만큼 여성들이 쉽게 변화되지 않거든요. 성매매로 인한 자기 파괴의 경험에서 벗어나는 일은 많이 힘든 거잖아요. 이런저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미국으로 가셨는데, 미국 가셔서도 한국 사람들의 문제가 눈에 보이신 거예요. 미국으로 건너간 여성들은 행복한 삶이 될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 남편으로부터 학대나 버림, 이혼을 당하는 등의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러면 여성들이 알콜 중독, 마사지, 성매매, 마약 등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걸 어머니가 목격하고 알게 되셨어요. 어떤 일이 있었냐면, 노스캐롤라이나 감옥에 한국 여성이 있었는데, 미군과 결혼해서 왔는데 여성이 아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어요. 알고 보니, 송종순이라는 기지촌 출신 여성을 이혼을 당하고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워야 했어요. 아이들을 재우고 밤에 식당일을 하러 갔는데, 아이가 높은 서랍장을 기어오르다가 넘어져서 서랍장에 눌려 죽은 거예요. 둘 째 아이가요. 일 끝나고 오니 아이가 죽어있으니 너무 당황해서 증거 같은 것들을 모두 치운 거에요. 그리고 경찰을 부르고 내 잘못이라는 “my fault”라고 경찰에게 말했대요. 한국식 표현으로 “다 내 탓이야”라는 말이었지요. 그 결과 여성의 책임으로 오해되어 감옥에 가게 된 사연이 알려졌어요. 그 소식을 들은 엄마가 그 분을 구하기 위한 활등을 하셨고. 이걸 계기로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을 돕는 무지개 센터를 함께 설립하게 되셨어요.



우현주 한국 여성들은 당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다면, 필리핀 여성들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면서 오는데, 그 현실은 어려운 것 같아요. 김태정선생님, 의정부의 시민단체, 역사교육과 두레방은 전혀 분리되어 있었어요. 우리가 2015 우리 지역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할 때 두레방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우리 스스로도 두레방을 찾아뵙지 못했어요. 얼마 전에 물어보니 두레방에서도 알고 있었더라고요. 최근 의정부 평화포럼이 만들어지고, 교사들도 미군기지 기지촌 여성들의 문제를 공부하다보니, 반성을 하게 됐어요. 앞으로 두레방과 시민단체, 앞으로 뺏벌도 모습이 변할 텐데, 앞으로 어떤 연대가 필요할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김태정 두레방의 문턱이 높다는 생각이 있으실 것 같아요. 의정부의 시민운동이 뿌리가 깊지 못한 부분도 있었어요. 최근 인생서점에서 사드배치 반대, 세월호 등의 의정부에서도 시민사회 활동이 많다는 걸 알고 놀라면서 좋았어요. 이런 의정부 시민단체가 있었던 것을 일찍 알았더라면 우리 언니들의 문제를 조금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어요. 언니들을 위한 활동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있고 지금 대법원에 계류 중있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미국을 대상으로 소송할 예정이에요. 가해자, 구매자인 미군들의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정부 시민이 먼저 나서서 이것에 대해 먼저 공부하고 알려주면 힘이 나서 두레방도 힘이 날 것 같아요.



우현주 지금까지 간담회를 들으신 선생님들께서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시지요.


권익산 미군은 떠났지만 사시는 분들을 계속 사셔야 하는 거잖아요.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궁금해요.


김태정정 언니들은 일반 시민으로 살고 계세요. 똑같이 일반 할머니들처럼 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고 있고요. 보통 할머니들과 언니들의 건강을 비교한 수치가 있는데, 이를 봤을 때 우리 언니들의 병이 굉장히 심한 거예요. 이에 대한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평택에는 햇살사회복지회 단체가 있는데 두레방 등 지원 단체들이 연대하여 경기도 조례를 제정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거주, 건강, 생계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하죠. 언니들이 받은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와 용서가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문제 의식이 없으니 고스란히 이주여성이 폭력을 그대로 받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소송, 입법제정, 조례제정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지원은 아직 없는 상황입니다.


문영미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모든 국민들이 공감하며 사과하라고 하는데, 지금 기지촌 여성들의 똑같은 문제가, 다를 바가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숨기고만 싶어하고 관심이 없는지 여러분께 질문하고 싶어요.


박래훈 결국 이게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공감을 받기 위해서는 여성들에 대한 편견들, 고정관념, 기지촌에 들어오게 된 상황들에 대한 편견, 여성들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경험 중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좀 지적해주셨으면.


문영미 ‘성을 즐기는 여성들일 것이다’라는 것이 대표적인 편견일 것이에요. 너무나 성에 대해 상처를 받았기에 안 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인데, 정말 어린 시절의 가난과 차별과 폭력으로 인해 정신대로 끌려가셨던 것처럼 이분들도 어쩔 수 없이 흘러가 밑바닥으로 간 것이지 섹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김태정 제가 13년차 이다 보니까, 밖에서 보는 언니들의 이미지를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늘 발목을 잡는건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를 가리는 문제예요. 이주여성에 대한, 유흥업소 언니들에 대한 경찰조사가 이 잣대로 판단하죠. 그래서 피해사실이 주목받지 못해요.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피해사실이 보이는게 문제입니다. UN의정서에 따라는 인신매매 피해의 범위를 보면 취약한 경제적인 부분을 착취하는 것 자체가 인신매매인데, 한국에서 보는 시야는 너무 좁아요. 자발성과 강제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너무 커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우리 언니들을 보는 시선의 차이가 굉장히 큽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다르지 않고 군사주의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본질을 인식을 갖고 감수성을 가져야 할 것 같아요.



우현주 오늘 역사교사들과 자리를 함께 한 소감은 어떠세요?


문영미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정말 두레방과 기지촌 여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학생들을 교육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활동하는 이한열기념관이나 문익환 통일의집도 시간이 되셔서 방문해 주시면 제가 안내해드리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태정 저도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저는 정말 이런 장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이 없었거든요. 오히려 해외 인신매매를 논하는 자리에서 더 유명했어요. 이제 한국 스스로가 관심을 가지고 장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감사해요. 저도 이제 많이 지쳤어요. 13년 되어서 이제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근데 제가 10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도 문혜림선생님이 거친 언니들을 많이 다듬어 주셨어요. 그 덕에 쉽게 언니들과 많은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죠. 문혜림선생님과 이후의 원장님들이 장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소송이나 언니들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저는 여기에 이어서 가는 젊은 세대인 것인 거고요. 여기 계시는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고,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도록 활동하는 장에서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우현주 선생님들께서 문혜림 선생님의 최근 근황을 궁금하다고 하십니다.


문영미 저희 어머니는 지금 치매를 앓고 계십니다. 제가 계속 모셨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미국에 있는 동생이 엄마를 꼭 모시고 싶다 해서, 어머니가 8월에 영구 귀국하게 됩니다. 어쨌든 가시고 싶으셨던 고향에 가셔서 언어나 음식이 조금 더 익숙한 곳에서 조금 더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현주 네. 먼 길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지역의 일에 물꼬를 터주신 문혜림 선생님에 대해 알리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이 이야기를 들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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