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연재] 이용기 교수의 한국근현대사 다시 보기①
/ 이용기(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2004년에 뉴라이트가 등장한 이래 한국사회는 한국근현대사 인식을 둘러싸고 심각한 학문적・사회적 논쟁을 겪어왔다. 뉴라이트 계열이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좌편향이라고 공격하면서 시작된 ‘교과서 논쟁’은 보수 정권 하에서 ‘자유민주주의’ 논쟁, 교학사 교과서 논쟁과 국정 교과서 파동 등을 거치며 파행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2008년부터 ‘건국절’ 논쟁이 더해지면서 가히 ‘역사전쟁’이라 부를 만한 격렬한 쟁투가 벌어졌다. 주지하듯이 뉴라이트 계열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이 건국을 의미한다며, ‘8・15’를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광복절’보다는 대한민국의 ‘건국절’로 기념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진보세력’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수립이 건국을 의미한다며, 1919년의 건국과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구분해야 한다고 맞섰다.
1948년 건국론은 대한민국 출범 전후의 국가폭력과 분단 문제를 도외시하고 보수 반공의 입장에서 현실의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를 신성화하려는 이데올로기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1919년 건국론은 정당한 논리이며,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에 대한 절적한 대응일까? 오히려 1919년 건국론 역시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한 즉자적 대응으로써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임정이라는 ‘지향으로서의 국민국가’를 과도하게 상찬하는 주장이며, 결과적으로 국가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요컨대 1919년 건국론과 1948년 건국론은 현상적으로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단지 국가의 건립 시점에 대한 이견일 뿐이며 국가가 건립된다는 것이나 그것을 기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배제한 채 공히 국민국가를 신성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잉정치화하고 진영논리에 갇힌 소모적인 ‘역사전쟁’에서 벗어나 복잡다단하고 착잡한 한국 근현대사의 여러 쟁점에 성찰적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을 다시금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역사전쟁 과정에서 ‘진보세력’의 아이콘처럼 떠오른 1919년 건국론을 비판적으로 되새기는 차원에서, 임정의 역사적 실상과 임정법통론의 실제적 기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임정법통론을 신성화하는 한국 민족주의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1)
1) 이 글은 최근 발표한 필자의 논문 「임정법통론의 신성화와 ‘대한민국 민족주의’」(2019, �역사비평� 128)를 대폭 축약・가필한 것임.
1919년에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으로 표출된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의 결정체이자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체였다. 그동안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 속에서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의 조직으로 모여 ‘임시’적이지만 ‘정부’를 수립하고 ‘민주공화제’를 천명한 것은 한국사에서 큰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임정은 파리강화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고자 노력하였고, 해방되는 순간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임시헌법과 건국강령 등을 작성하여 건국의 기초를 놓는 작업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임정은 스스로 자임하였고 훗날 한국사 서술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과연 독립운동의 최고지도기관이자 정통정부(또는 법통정부)였다고 볼 수 있을까?
주지하듯이 임정이 수립될 당시 독립운동 최고지도기관의 형태를 둘러싸고 당과 정부 두 가지를 놓고 독립운동 진영에서 이견이 있었다. 여운형 등은 주권・인민・영토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논리와 배타성을 갖기 쉬운 정부보다는 독립운동가들의 결사 형태인 당을 조직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방도라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부 형태가 채택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한국 민족의 독립주권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등장 등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독립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던 독립운동 세력이 외교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정부’ 형태를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임정은 실질적인 정권기관이나 망명정부가 아니라, 3・1운동으로 표출된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와 역량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구성한 ‘임시’ 정부였던 것이다. 2)
이처럼 임정은 외교독립의 가능성이 보이던 특정한 정세의 효과로 구성된 것이었기에 외교노선의 한계가 드러나자 위기 국면에 봉착하였다. 여기에 초대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리더십의 한계까지 더해지면서 임정은 출범한 지 3년 만에 정체 상태에 놓였다. 이에 해외 독립운동 세력은 독립운동의 방략과 지도기관을 새롭게 세우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는 더 이상 임정이 독립운동의 최고지도기관일 수 없음을, 그리고 ‘임시’적인 ‘정부’조차 그 존재가치가 의문시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사실 임정은 근대 국가의 핵심 요소라 할 주권・인민・영토를 갖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정부’를 자임하고 유지할 동력을 갖기 힘들었다. 이러한 한계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정 내부에서도 인식되고 있었던 것 같다. 임정은 1925년 2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在함”이라는 기존 조항을 “대한민국은 광복운동 중에 광복운동자가 전인민을 代함”으로 수정하였는데, 이는 원칙적으로 인민주권론의 심대한 제한이며, 임정 스스로 민족적 대표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이후 임정 고수파를 제외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은 줄곧 임정을 대신할 독립운동의 최고지도기관으로 민족유일당이나 민족통일전선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김구 스스로 회고했듯이 한동안 임정은 명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고 할 만한 유랑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어 해방의 가능성이 가시화되는 1940년대에 임정은 ‘정부’라는 상징성이 다시금 부각되면서 활동력을 배가하였다. 그 결과 중국 관내 좌파세력을 흡수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대일전에 기여하고, 건국강령을 작성하여 건국을 준비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중경 임정은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했을 뿐 전체 독립운동을 망라하거나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임정은 1940년대에도 연합국을 상대로 임정승인 외교를 정력적으로 펼쳤지만, 연합국의 정치적 계산 외에도 임정 자신의 대표성의 한계로 인해 그 결실을 거둘 수 없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임정은 3・1운동으로 표출된 전민족적 독립 의지를 내외에 천명하고 왕정복고가 아니라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지며, ‘임시’적일망정 ‘정부’를 표방하고 외교독립의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던 성과를 갖는다. 그러나 임정은 외교노선의 한계가 뚜렷해진 이후로 ‘정부’를 자임할 동력을 상실했으며, 다시 그 역사적 의미가 부각된 1940년대에도 여러 독립운동 세력 중에서 한 축을 이루었던 것이 사실이다. 요컨대 임정은 독립운동 상에서 공과를 함께 갖고 있는 하나의 유력한 독립운동단체였다고 볼 수 있다.
2)지수걸, 2019,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의 국제정세 변화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20세기 초 세계사의 굴절과 3・1운동�(2019 역사학회 정기학술대회 발표자료집).
3)임정은 1927년 3차 개헌에서 ‘인민주권’ 조항을 다시 살리면서도 그 부속 조항으로 ‘광복운동자의 주권 대행’을 규정하였으며, 1944년 마지막 개헌 때까지 이를 유지하였다.
임정법통론은 임정이 전체 인민에 대한 정치적 대표성과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정부라는 논리이다. 임정은 수립 이후 줄곧 자신이 ‘3・1운동으로 표출된 전 민족적인 독립 의지에 기초하여 수립된 정부’이자 ‘한국 민족의 유구한 주권과 정통을 계승한 정부’라는 의미에서 ‘법통정부’라고 주장하였다. 전자를 뒷받침하는 장치가 국내 인민의 대표성을 확보한 ‘한성정부’ 정통론이라면, 후자는 임정이 대한제국의 주권과 國統을 계승했다는 주장(특히 국호)과 연결된다. 그러나 전민족적 대표성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객관적 한계를 갖고 있음을 직시해야 하며, 최근 연구에서는 상해 임정 수립과 한성정부는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4) 역사적 정통성은 스스로 자임하는 것이기에 사실보다는 가치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제국의 관계를 연속과 단절 중 어디에 초점을 둘 것인가, 그리고 국통을 계승한다는 논리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지면 관계상 향후 과제로 남겨둔다.5) 그런데 문제는 충분한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임정법통론이 역사적으로 적잖은 폐해를 보여 왔다는 사실이다.
임정 고수파는 1920년대의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운동, 1930년대의 민족혁명당 결성 운동과 한국혁명운동통일 7단체회의 등 해외 독립운동 세력들이 민족통일전선을 추진할 때마다 임정법통론을 내세워 임정 중심의 통일만을 고집하였다. 임정 ‘법통’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대항하는 차원이었으며, 김구는 민족혁명당 추진에 대해 “같잖은 혁명론”이라고 폄하한 바 있다. 이처럼 독립운동 시기에 임정법통론은 임정의 존속과 주도권을 위한 자기 정당화 논리로 작동한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임정법통론은 임정 중심의 국가건설 논리이자 좌파에 대항하기 위한 우파의 정치 논리로 기능하였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핵심 세력은 “기미년에 전 국민 총의로써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의 주권을 계승한 지 이미 30년이 된 법통정부”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좌파와의 갈등은 물론이고 때로는 미군정과의 충돌도 감수하면서 임정 중심의 건국 노선을 비타협적으로 견지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분단의 한국현대사가 웅변해준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임정법통론은 신생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관련된 예민한 문제가 되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제헌헌법 전문에 반영하는 데 앞장섰다. 물론 그는 김구가 주석으로 있던 현실의 임정보다는, 자신이 집정관 총재로 임명되었던 ‘한성정부’의 법통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정작 임정 주석이던 김구는 현실의 대한민국을 ‘남한단독정부’라고 규정하고 이에 참여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임정법통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임정법통을 계승했다는 논리는 적어도 김구에게는 전혀 수용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우파세력의 이데올로기였던 셈이다.
4) 윤대원, 2009, 「임시정부법통론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 �역사교육� 110.
5)다만 임정이 처음 임시헌법을 제정할 때 ‘구황실 우대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혹시 이 조항을 삭제한다면 인민의 반항을 살까 두려워”(조완구의 발언) 되살렸다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만큼 임정 자신이 왕정인 대한제국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전민족적 대표성을 주장하기에는 머뭇거림이 있었던 것이다.원과 의미」, �역사교육� 110.
정부 수립 이후 오래 동안 임정법통론에 대한 적극적 주장은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 임정법통론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민주화 투쟁이 가열되던 1986~87년의 개헌 국면에서였다. 먼저 불을 지핀 측은 야당인 신민당이었다. 신민당 총재 이민우는 1986년 6월 국회 연설에서 헌법 개정의 5대 핵심사항 중 하나로 임정법통 계승의 명문화를 주장하였다. 이후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가 수용되면서 급진전된 개헌 협상에서 임정법통 계승 문제는 손쉽게 해결되었다. 당시 여야는 서로 강조점을 달리 하면서도 임정법통론을 내세울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과 보수세력은 북한과의 정통성 경쟁과 저항세력의 급진적 이념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반공적 입장에서 임정법통론을 강조하였다. 자유주의적 야당은 독재정권의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을 비판하는 대안적 아이콘으로 임정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저항세력의 ‘정부 부정’이 ‘국가 부정’으로 확대될 우려에서 국가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임정법통론을 주장하였다. 결국 1987년에 개정된 현행 헌법의 전문에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명문화됨으로써 임정법통론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로 격상되었는데, 이는 진보세력의 민중적 민족주의가 부상하는 것에 대한 수동혁명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 학계는 1990년대까지도 임정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강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거 ‘민중사학’ 계열에 있던 연구자 중에도 민주공화정인 임정 수립의 의의를 강조하거나 민족통일전선의 흐름 속에서 임정을 바라보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건국절’ 논쟁을 거치면서 전 사회적으로 임정법통론을 강조하는 흐름이 강해졌다. 보수파의 건국절 주장에 반대하는 각종 성명서에서도 임정법통론이 넘쳐났다. 여기에는 임정 수립을 건국으로 보는 ‘1919년 건국론’이 공통되고 있으며, 임정법통 계승을 규정한 헌법에 근거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인식이 담겨 있다. 이는 진보와 보수가 묘하게 얽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보수세력이 남한 중심의 반공・산업화 서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구성한다면, 진보세력 역시 임정 중심의 민족・민주화 서사를 통해 그것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성찰은 뒷전으로 밀리고 ‘건국’과 ‘국가 정통성’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전제되며, 다만 건국의 주체와 대한민국 정통성의 내용을 둘러싼 투쟁이 전개될 뿐이다.
과거에는 임정법통론이 보수 반공 이데올로기와 남한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역사전쟁’을 경과하면서 임정법통론은 오히려 보수세력의 ‘국가주의’ 이념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논리로 기능하고 있다. 임정법통론을 둘러싼 맥락의 변화는 한국 민족주의의 굴절을 시사한다. 이러한 계기는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쳐 일어난 세계사적 격변과 한국의 위상 변화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진보 이념의 퇴조, 남북 체제경쟁에서 북한의 몰락과 사실상 남한의 승리,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라는 자신감 또는 주술,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아래로부터의 내셔널리즘 등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이 변화하였다.
과거에는 대한민국이 빈곤・독재・분단・종속 등으로 점철된 부정적 이미지로 비추어졌다면, 이제는 경제적으로 발전되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민족적으로 중심이며, 대외적으로 강해진 ‘자랑스러운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과거 다수의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어글리 코리언’이라고 비하하거나 ‘恨의 정조’에 입각한 민족정체성을 갖고 있던 것과 달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자긍심에 입각한 내셔널리즘이 급격히 확대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민주화’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제 대한민국은 성찰과 지양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우리나라’로 각인되었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 자체가 문제는 아니겠지만, 성찰을 배제한 애국심은 역사상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곤 했다.
1980년대에 저항 이념으로 등장했던 ‘민중적 민족주의’가 약화되면서, 진보세력 사이에서도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민족을 상상하는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강해지고 있다. 이는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을 상상하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반공・반북 이념에 입각하여 남한만의 내셔널리즘을 추구하는 보수세력의 ‘대한민국 국가주의’와 차이를 갖는다. 그럼에도 그 민족과 통일은 정상화되고 신성화된 대한민국의 확장으로 상상되며, ‘임정법통론’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담보하는 핵심 지점의 하나가 된다.
분단 상황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구별될 수도 있지만, 양자는 내셔널리즘이라는 공유점을 갖는다. 더구나 ‘대한민국 민족주의’는 ‘대한민국’을 매개로 ‘대한민국 국가주의’와 공모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민중적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시대역행적이다. 이제 우리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이라는 구도에서 벗어나 내셔널리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근대 국민국가와 그 정당화 기제인 ‘국사’(National History)에 대한 성찰을 해나가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 정통성’의 신화를 대중적으로 확대・강화하고 있는 임정법통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더욱 심화되어야 한다.
* 사족 : 필자는 최근 사회적으로 임정과 김구가 신성화하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주위의 역사교사들에게 우려의 말을 전한 적이 있다. 일부 교사들은 김원봉이 대중적 관심을 받는 것을 예로 들어 필자의 우려가 과도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표시했다.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과연 김원봉이 임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일종의 김원봉 팬덤이 나타날 수 있을까?
<참고문헌>
강원택 편, 2006, �한국인의 국가정체성과 한국정치�, 동아시아연구원.
김정인, 2018, 「3・1운동과 임시정부 법통성 인식의 정치성과 학문성」, �서울과 역사� 99.
윤대원, 2009, 「임시정부법통론의 역사적 연원과 의미」, �역사교육� 110.
이용기, 2019, 「임정법통론의 신성화와 ‘대한민국 민족주의’」, �역사비평� 128.
지수걸, 2019,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의 국제정세 변화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 �20세기 초 세계사의 굴절과 3・1운동�(2019 역사학회 정기학술대회 발표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