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서평1 : <면화의 제국>(스벤 베커트, 휴머니스트, 2019)
≫강기웅(경기 안산양지고)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라는 이 책의 부제가 너무 과장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업혁명이 시작될 때 면산업이 주된 산업이라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뮬 방적기와 제니 방적기가 돌아가는 방적공장은 영국 산업 혁명의 오랜 상징이었다. 여기에 무엇을 더 덧붙일 것인가?
스벤 베거트는 덧붙일 것이 많다고 말한다.
면산업은 그저 산업 혁명이 시작될 때 먼저 발전한 선도 산업 ‘따위’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를 발전시키고 성숙시킨 주요 요소였다. 유럽에서 수십 년 동안 가장 중요한 산업 부문인 면산업은 거대 이윤의 원천이 되고 결국 유럽 경제에서 다른 부문들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또한 면은 사실상 세계 모든 지역에서 산업화의 요람이 되었다. 면산업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는 훨씬 늦게 나타났거나 나타나지 못했거나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작금의 산업 자본주의를 살펴보자. 호주에서 캐낸 철광석은 굳이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의 철강회사에서 제련되어 다시 다른 대륙에 판매된다. 중동에서 시추된 석유는 대한민국의 화학단지에서 석유화학 제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현대에는 낯선 풍경이 아니지만 면산업이 발전하여 구축된 ‘면화의 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에는 이렇게 원산지와 공업 중심지가 동떨어져 있는 것은 말뿐이라도 “배를 움켜쥐고 웃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면직물 공업의 발달과 그로 인해 성립된 면화의 제국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면화의 제국은 배역만 바뀐 채 반복되는 새로운 산업 제국의 길을 열었다. 예고편이 아니다. 면화의 제국은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며 이후의 산업은 배역만 바뀐 후속편일 뿐이다.
면산업의 중요성은 당시 세계에 통용되어 있던 글로벌 무역체제에 편승한 것이 아니라 면산업을 위한 체제를 아예 만들어냈다는 것에 있다. 유럽은 면화가 자생하는 지역이 아니었고, 다른 지역의 면화를 옮겨 키우려 해도 기후가 알맞지 않아 키울 수 없는 지역이었다. 면산업이 발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특히 영국에서 면산업은 세계를 선도하는 산업이 되었다. 1780년대까지 미국은 거의 면화를 재배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십 년 뒤에 노예노동을 통한 면화 재배는 미국의 주요한 농업 형태가 되었다.
이후 면화의 제국은 기존에 전통적인 면공업을 영위하던 지역을 급속히 탈산업화 시켰다. 맨체스터상공회의소에서 “우리의 바람대로, 그들이 다시 농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축하했듯 세계 곳곳에서 영국산 직물의 수입으로 가내에서 이루어지던 수공업 방직이 붕괴했으며 수많은 직공이 평범한 노동자가 되었다. 면화의 제국은 기존 면공업지대를 주변화 시키고 잉글랜드를 비롯한 일부 지역을 주요 공업지대로 재편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결코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자유경쟁체제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자본주의를 이끈 강력한 국가의 보호아래에서 면화의 제국은 성립되었다. 면산업의 성립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영국의 면산업이 허약했던 시기에 질과 양에서 압도적이었던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통제하여 면산업 발달을 자극한 것은 영국 정부의 역할이었다. 아직 세계시장에서 인도 면직물과 상대가 되지 않는 영국산 면직물의 판로를 보장한 것은 영국의 광대한 식민지 시장이었다. 훗날 기계공업의 발달로 폭증한 면화의 수요를 보장한 것도 식민지 개척으로 인한 토지 약탈로 광대한 토지를 면화 재배에 전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광대한 토지에는 노예들이 일하며 면화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을 보장하였다. 독립적인 자영농은 상품작물 재배보다는 생계작물 재배를 우선시했기 때문이었다.
남북전쟁으로 미국의 노예제가 파괴되면서 면화 재배를 위한 노동방식이 변화를 강요당했다. 만약 해방 노예들이 희망하는 대로 각자의 토지에서 자유롭게 농사를 짓는다면 면화 재배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영농이 아니라 소작인이 되었고, 백인 자영농들마저도 토지와 생계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이제 미국 남부의 면화 재배는 노예 노동이 아니라 임금노동, 차지농업, 소작 농업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농업 형태는 지구의 다른 부분으로 퍼져나갔다.
앞에서 보았듯 면화의 제국의 확장에는 자유 시장이 아닌 국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고, 자본가들에게는 국가가 가장 중요한 권력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본가들이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가 국민에게 의지하면서 노동자들도 힘을 얻었다. 노동조합과 정당을 결성한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움직이면서 노동조건을 개선해나가면서 생산비용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 세게 다른 지역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일자리가 열렸고 면산업은 본래 자리였던 곳으로 돌아갔다. 아시아와 남반구로.
이 책에서 살핀 유럽 중심의 면화의 제국이 성립하고 변천해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산업자본주의의 성립과 변천 과정을 보여준다. 다른 세계의 원료 공급과 노동력을 장악하게 해준 폭력적인 전쟁자본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했고, 산업의 필요에 따라서 농업과 노동 방식을 바꿔놓았다. 면산업은 그것이 자연적이든 사회적이든 주어진 환경에 맞추기보다는 산업에 환경을 맞추어 변화시켰고 그 범위가 전세계적이라는 것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다른 주요 산업들은 모두 면산업의 발자취를 따랐다. 표지에서 말하듯 자본주의는 면화가 맺힌 들판에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