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교사가 묻고 지성이 답하다 2 - 유용태 교수
≫ 편집부 정리
<역사교육>에서는 125호부터 특집대담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역사이야기’에서는 역사연구자들의 연재 기고문을 받아 게재해왔습니다만 기고문과 연재글 너머 역사 연구자와의 대화를 통해 역사 선생님들께 역사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역사 연구자들의 고민과 삶 그리고 지적여정은 그 자체로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교사가 묻고 지성이 답하다’에서는 역사교사의 시선과 문제의식으로 지성에게 직접 묻고 대화한 기록을 선생님들께 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역사교육 어렵사리《역사교육》과의 인터뷰 응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번 인터뷰의 취지는 석학들의 의견, 특히 교사들이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친다면, 석학분들의 경우는 역사교육을 크게 설계하시는 입장인데, 그 입장에서의 역사에 대한 관점 혹은 입장 그리고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를, 전국의 역사 선생님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취지가 있구요. 더 나아가서 유용태 교수님의 경우 특히 동아시아 과목 형성에 크게 기여하신 바,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물론 교사들에게 바라는 바도 궁금하구요. 우선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나가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준비했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어떤 계기로 그 전공을 시작하셨는지 동기, 흥미 혹은 문제의식이 궁금합니다.
유용태 석학이란 호칭은 좀 부담스럽네요. 원래 학부 시절에는 한국 근대사와 한국사회의 현실문제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제가 77학번인데, 유신 정권 말기의 대학에서는 매일 같이 유신 반대 시위가 일어났지요. 그때 저의 동료와 선후배들은 유신독재를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무엇이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런 쪽으로 역사와 사회과학 서적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어요. 당시 중국은 우리가 오갈 수도 없었고, 책이나 자료를 구해볼 수도 없는 적성국가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러한 금지된 상황이 우리에게 오히려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고, ‘아, 거기에 뭔가 대단한 인류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기대감을 더 갖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러한 조류 속에서 자연스럽게 중국현대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고, 수강 신청할 때도 중국사 방면의 강의를 많이 들었죠. 따라서 그것이 처음부터 학문적인 관심은 아니었던 것이죠.
역사교육 그렇다면 혹시 신민주주의라든지 직업대표제 등에 관심이 많으셨던 것인가요?
유용태 그때는 뭐 그런 용어나 개념도 잘 몰랐고, 그런 것들은 나중에 대학원에 들어가 심화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지요.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의 연장이었고 그래서 1920년대 중국의 농민운동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준비했어요. 제 자신이 농민가정 출신이었는데, 농민가정 출신의 대학생이 도시에 와서 공부하면서 현실 문제 눈에 뜨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농민들이 조금 더 인간답게 대우를 받으면서 잘 살 수 있는 방법, 농민도 주권자로서 정치의 주체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에 관심을 가졌어요. 이러한 농민운동에서 대학생들 혹은 지식인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이런데 관심이 자연스럽게 가게 되었고, 중국 근현대사 속에서 그런 사례를 찾아보자고 시작한 것이 석사논문의 주제로 이어졌죠. 그리고 그게 결국 직업대표제 연구로까지 이어졌어요. 이건 직업단체 회원이 직업별 대표를 직선으로 뽑아 국회와 지방의회를 구성하고, 의원수는 직업별 인구수에 비례해 할당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농민은 노동자·교사 등 각종 직업군과 함께 하나의 당당한 주체가 되는 거지요. 1920년대에는 유럽과 중국에서 이걸 “신민주주의”라고 불렀어요.
역사교육 정말 삶에서의 연장이 사회적인 문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고, 그게 또 전공까지 오신 것 같네요!
유용태 그렇죠. 기본적으로 내가 발 딛고 사는 현실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학술적인 문제의식으로까지 발전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나중에 보니까 원래 학문을 그렇게 하는 것이라 되어있더군요. 논어에도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하면 인재기중의(仁在其中矣)”니라고 나와 있어요. 절실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하면 仁이 그 속에 있다는 뜻인데, 학문(學問)이라는 것이 배우고 묻는 거잖아요? 이 때 仁이란 가족은 물론 이웃까지 포함하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죠. 그게 학문이 추구해야 할 바라는 겁니다. 절실하게 묻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질문이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죠. 저도 물론 절문과 근사를 알고 논문 주제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보니 내가 절문과 근사를 나도 모르게 했다는 것을 알고 좀 흐뭇했어요(미소).
역사교육 약소한 인터뷰로 이리 성찰의 방법까지 제시해주시니 너무 감사한데요? 그렇게 출발한 교수님의 논문을 들여다보면, 중국 근현대사에 있어 ‘민족’, ‘농민’, ‘민주주의’ 등과 관련된 논문을 많이 쓰셨더라구요. 하지만 오늘날에 교수님의《환호 속의 경종》(2006)이나《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2010)와《동아시아사를 보는 눈》(2017) 등을 보면, 동아시아라는 새로운 접근방법, 관점을 제시해 주셨는데, 어떻게 연구의 영역이 (공간적으로) 확장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유용태 사실 동아시아사에 대한 관심은 1993년부터 담당한 “동양근대사” 강의에서 시작되었어요. 그 때 박사과정을 밟으며 대학 강의를 시작했는데, 그 강의를 위해서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생각했어요. 제가 학부생 때 동양 중세사, 동양 근대사, 동양 현대사, 동양 사상사 등을 수강했었는데, 그 내용은 100% 중국사였습니다.
역사교육 저도 학교 다닐 때 그랬습니다(격한 공감).
유용태 30년 뒤에도 ‘동양사’에는 ‘중국사’밖에 없었다는 거죠. (30년 전으로 돌아가면)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중국사만 가르치면서 왜 동양사라고 하지?’ 그러나 이에 대해 아무도 설명을 안 해줬어요. 그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졸업을 했고 돌고 돌아 제가 강의하는 입장이 됐을 때, 이 의문을 나의 학생들한테까지 물려줄 수 는 없다고 보고, 중국사 일변도의 동양사를 어떻게 벗어날까, 이른바 ‘탈동양사’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양사가 원래 아시아사를 가리키지는 말이기는 하지만, 한 학기라고 하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또 한국 동양사학의 연구역량(중국·일본에 치중)으로 봐도 아시아사 전체를 다루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라는 공간으로 좁혀 중국·일본·베트남까지를 포함하되, 한국사도 관련되는 부분들은 함께 다루기로 범위를 정했습니다. 근대 이전 시기라면 북방의 유목민족사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만 근대 시기라서 제외했지요. 그래서 ‘동양 근대사’를 한·중·일과 베트남을 포괄하는 ‘동아시아 근대사’로 좁혀서 강의안을 짜고 수업을 진행했어요. 물론 여기에는 당시 학계에 막 유행하기 시작한 ‘동아시아 담론’도 고려되었고 석사과정에서 일본사와 베트남사 수업을 들은 것이 밑천이 되었지요. 이 강의를 93년도부터 하다보니까 90년대 말부터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예컨대 한중일 3국간 상호 호칭을 다룬 글, 당시 유행했던 유교 자본주의론을 비판한 글이라든지, 일본과 중국 역사 교과서의 한국사 인식을 다룬 글 등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2003년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다원적 세계사와 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라는 제목의 특강을 했습니다.
역사교육 아하 이게 바로 임용 서적으로 유명한 “갈색 책”에 3부에 들어간 원고였죠?
유용태 네, 이 글이 바로 그거에요. 그때부터 탈동양사를 넘어서 동아시아사를 ‘지역사’의 하나로 어떻게 체계화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시작했죠. 다시 말해 처음 중국사 일변도의 동양사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의에서는 동아시아사를 그냥 단순하게 한중일에다가 베트남까지 포함시켜 이들을 비교사 방식으로 파악했어요. 이렇게 수년간 가르치다가 점차 ‘지역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동아시아사를 재구성하고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때부터는 비교사와는 다른 ‘연관사’, ‘상호연관성’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교육 동아시아가 같이 공유하고 있는 문화라든지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것이죠?
유용태 그것도 포함하는데, 연관성은 그런 문화의 공유하고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전혀 공유하지 않아도 연관될 수 있어요. 이는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 동아시아사는 기본적으로 교류사인 것으로 알고 있나요?
역사교육 이것은 임용고시이야기인데요, 제가 공부했던 바로는, 동아시아사가 등장하기 이전, 특히 세계사 교과서의 지역사 중심 서술 체제가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역사는 결과적으로 교수님께서 문제의식이 있으셨던 것처럼 서양 중심-중국 부중심체제를 벗어나기 힘들었으며, 이에 대한 대안책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상호교류의 교류사라고 알고 있거든요. 이에 따라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상호교류의 원리가 지난 번 개정교과서까지 지속적으로 적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연관사도 교류사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유용태 물론 교과서만 바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럴 수 있겠네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관계사나 교류사 등은 단기간에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관계를 말하는 거죠. 그에 비해 연관사는 이러한 직접적 연관성도 포함하긴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장기간에 걸쳐서 구조적으로 파악해야만 드러날 수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연관성까지 포함하고 이것을 더욱 중시합니다. 양쪽이 직접 관련을 맺지 않아도 연관될 수가 있고, 문화적으로 공통성을 갖고 있지 않아도 연관될 수 있습니다.
역사교육 그렇다면 교수님 혹시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유용태 예를 들면 7세기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군대는 한반도에 전력투구하지 않았고 신라에 패한 후에도 당 조정은 설욕전을 계획했으나 이를 포기했습니다. 둘 다 똑같은 이유로 그렇게 되었어요. 이는 당시 중국 서남쪽에 있던 토번(티벳) 때문이었거든요. 티벳이 당나라의 목덜미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북쪽의 한반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거죠. 당 나라의 수도 장안의 위치를 연두에 두고 티벳과의 거리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하고 티벳은 너무 멀고 직접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었지만 당을 통해서 이렇게 중대하게 연관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세계 최강이던 당나라의 국력이 이런 지정학적 요인에 의해 분산된 결과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당전쟁의 승패를 단지 우리의 거족적 저항이나 화랑정신의 승리로 설명해서는 자기만족의 역사인식에 빠지고 맙니다.
현대사에서 다른 예를 하나 들자면, 제 책에서 상세히 다룬 것인데 1965-73년 북한의 무장 게릴라(공비) 남파가 왜 하필 그 때에 집중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무장 게릴라는 1965년에 시작해서 1973년에 끝나는데, 68년이 정점이에요. 이걸 한국사에서는 남북간 체제대결로 설명을 해요. 그렇다면 체제대결은 이 시기에만 한정되는 일인가? 당연히 아니죠. 더구나 이 이유만으로는 왜 68년에 정점에 달했는지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건 베트남 전쟁과 관련돼 있습니다. 당시 한국군과 주한 미군이 베트남에 파병되기 시작했는데, 북한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북베트남에 파병하여 돕고자 했어요. 그러나 당시 북베트남은 ‘선의는 고맙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이미 모택동이 중국군을 파병해 돕기로 돼 있었고 실제로 65년부터 파병했거든요. 이에 김일성은 한반도 휴전선에 위기를 조성해 한국군과 주한 미군이 추가로 베트남에 파병될 수 없도록 발목을 잡으려는 우회전략을 썼어요. 한국군 전투병의 첫 파병이 65년이고, 최종 철수하는 해가 73년이에요. 게릴라 남파가 시작되고 끝난 해와 정확하게 일치하죠?
그럼 왜 68년이 정점이냐? 68년은 무장 게릴라가 청와대 기습을 노린 김신조 사건을 비롯해 후방 각지에 특별히 많이 출몰한 해입니다. 이는 베트남 전장의 “구정 공세”(뗏 공세)와 연관되어 일어났어요. 원래 베트남에서는 우리처럼 음력설 명절을 쇠다 보니 이전까지는 설날에 군인들도 모두 휴무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68년 1월의 구정에는 이런 관례를 깨고 구정을 D-DAY로 잡아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대한 총공세를 펼쳤어요. 상대의 허를 찌른 거죠. 북한은 구정 10일 전에 김신조를 시켜 청와대 습격을 기도하고 이틀 뒤 동해상에서 미군 정보함(푸에블로호)를 납치했어요. 이는 미군의 관심을 한방도로 돌리게 해놓고 베트남 전장에서 총공세를 퍼붓겠다는 성동격서, 동아시아 차원의 양동작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한국사는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포함하는 지역적 연관성을 가지고 이해해야지 한반도 안에 가둔 채 남북대결 구도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하튼 이러한 역사의 맥락은 상당히 큰 시야에서 구조적으로 파악해야만 드러나는 경우이고,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분야입니다. 이러한 연관사가 어렵다고 단지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관계, 특히 양국관계에만 그쳐서는, 우리가 학생들에게 역사교육을 통해 역사적 사고력을 키워준다는 목표가 극히 제한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좀 더 넓고 깊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자극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역사교육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을 어떻게 녹이는 게 좋을까요? 동아시아사 구성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까요?
유용태 앞서 말씀하신대로 교류사를 동아시아사가 포함할 수는 있는데, 저는 이 교류사 일변도로 가면 놓치는 것이 많다고 생각해요. 교류사로 내용이 구성되면, 문화적·경제적으로 교류할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는 대국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교류를 강조하다보면 갈등이나 독자성을 간과하기가 쉬워요.
또한 동아시아사라고 하면 주로 한·중·일만을 두고 생각하는데, 이는 좁은 의미의 동아시아(동북아)이고 특히 교과서가 문화적 공통성(유교, 한자, 불교, 율령)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개념에 의거해 동아시아 범위를 정한 때문이죠. 원래 문명이나 문화권은 공통성을 기반으로 그 범위를 정합니다. 그러나 지역(region)은 연관성을 기준으로 그 범위를 정합니다. 전혀 다르죠. 이런 지역개념에 의거해 동아시아사를 지역사의 하나로 파악하고 그 범위를 정해야 합니다. 지금의 교과서처럼 문화적 공통성을 기준으로 범위를 정하면 상당한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한자문화권(유목세력, 동남아 해양세력)은 배제될 수밖에 없지요. 이건 아마 우리 자신이 한자/유교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아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나온 견해인것 같아요.
이러한 문화적 공통성만을 가지고 범위를 정하는 것은 유목세력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던 일본에서 나온 견해입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의 경우는 끊임없이 유목세력과 평화적이건, 적대적이건 접촉을 했기에 이를 빼놓고는 근대 이전의 역사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일본의 장소성을 반영한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협의의 동아시아든, 동남아도 포함하는 광의의 동아시아든 필요하고 할 수 있을 범위만큼 하면 되는 것이구요. 꼭 넓어야 좋은 것은 아니니까요. 결국 동아시아사를 구성할 때 역사주체들의 상호 연관성을 잘 드러내는 것, 곧 연관사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비교사도 꼭 필요하지만 그에 비하면 부차적입니다.
역사교육 연관과 비교가 가장 핵심적으로 지역사를 구현해낼 수 있는 방법이로군요! 그런데 이러한 맥락에서 현장 선생님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 동아시아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만들어진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비교와 연관이라는 개념이 낯설 수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동아시아사는 어떤 포인트로 접근해야 할까요? 아니 비교와 연관을 통해 현장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유용태 중요한 질문입니다. 역사 교육을 통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그 교육적 효과라는 게 뭐냐? 흔히 ‘역사적 사고력을 기른다’, ‘국제 이해를 돕는다’, 뭐 여러 가지 있죠. 이런 목표들은 각국의 역사 교육 과정에 똑같이 제시돼 있는 목표인데, 왜 굳이 연관과 비교를 하고,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지요? 저는 이를 통해 성찰적 역사인식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학의 본질은 성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스토리잖아요. 과거를 현재 시점에서 본다는 것은 되돌아본다(retrospect)는 의미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나 민족이든 역사의 주체로서 되돌아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반성적 사색, 곧 성찰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찰의 원래 의미는 자신을 보되, 자기 바깥의 관점에서 보며 또 자신을 그 자체로서 보는 게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 속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에요. 역사연구와 역사교육은 이런 성찰적 인식을 키워주는 것이고, 거기에 연관사와 비교사가 상당한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관과 비교야말로 방금 말한 성찰을 역사 속에 수행하는 두 방법인 것이죠. 그 결과로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이구요.
또한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동아시아 역사의 주체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을 맺으면서 살아왔는지를 살펴본다면 가령 우리가 비판하는 ‘내셔널 히스토리’에서 당연시하는 자기완결적인 역사이해가 얼마나 상대를 무시하고, 유아독존적인 역사인식인가를 드러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연관사와 비교사는 역사인식에 있어 반성적 사색을 자극하고 극대화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가르칠지는 쉽지 않지만, 이러한 성찰적 인식을 학생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하죠. 여기에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건, 인물, 자료 등이 필요한데 그런 시각에서 정리된 것이 많지 않다는 게 현재로선 아쉬운 점입니다. 연구자들이 열심히 연관과 비교의 스토리를 역사적 사실들 속에서 찾아내 만들어가는 것이 큰 과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이러한 시각과 방법으로 쓰려고 시도했지만, 지금 고백한대로 현재의 연구성과가 대부분 각국사 위주로 진행된 것이라서 우리의 시도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계속 보완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국사와 세계사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동아시아라는 지역사를 도입했다면, 그동안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그게 동아시아사를 만든 이유기도 하구요. 따라서 우리 모두가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역사를 인식하고 구성하는 단위만 state/world에서 region으로 바꾸는 데 그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어요. 근대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내면에 가지고 있던 본질적인 문제점들(자국사의 자기완결적인 스토리를 추구하는 자국중심주의, 세계사의 유럽 중심주의와 대국중심주의)을 해결하는 다양한 시도가 수십년 동안 진행되었는데도 큰 성과가 보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동아시아사를 지역사로 구성한다는 것은 인식체계와 구성방법 자체를 새롭게 혁신하자는 것이에요. 그 하나의 방법으로 연관사와 비교사가 효과적이라는 것이고, 그에 의거한 스토리는 연대기식 통사보다 주제사로 서술하는 것이 좋다고 봐요. 물론 여태까지의 통사중심의 체제에 익숙하다보니 주제사가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는 있어요. 하지만 원래 주제사가 통사보다 어려운가?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역사교육 교수님 말씀 덕분에 뭔가 동아시아사에 대한 사명감이 더 불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대부분의 역사 선생님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 완결적인 서사인 것 같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역사에 대한 본질적 이해, 성찰 보다는 팽창적 역사, 빛만 보는 역사를 이른바 “소비”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거든요. 지역사 구도의 역사인식이 이러한 우려스러운 점을 많이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연관과 비교의 역사 인식은 동아시아에서 출발하겠지만 나중에는 세계사까지도 충분히 확장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용태 저의 책《동아시아사를 보는 눈》의 종장에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동아시아사를 특권화시키지 말자, 그것은 수많은 지역사 중의 하나이며, 또 다른 지역사와 접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 큰 규모의 메가 지역사와 세계사를 형성해왔다, 연관과 비교라는 방법은 지역사와 지역사를 연결하는 방법으로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고,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사에 도달할 수 있다 라고요.
자국사든 세계사는 통사는 흔히 발전사관에 의거해 스토리를 구성합니다. 앞에서 성찰을 강조했는데, 연관과 비교의 지역사는 이 발전사관을 상대화 하는데도 촉진작용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세계사는 문명의 발전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성취와 희생 중 희생을 제거한 채 성취 위주로 스토리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이웃과 소국의 희생이 말소된) 대국중심주의로 연결됩니다. 성취와 대가, 중심과 주변, 빛과 그림자는 어느 한 쪽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잖아요? 양쪽을 다 볼 수 있게 해야 그 상호관계를 통해 성찰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쪽만 가지고 역사 스토리가 구성해서 결국 자력으로 이루어낸 영광스런 발전이라는 자기만족의 역사인식만 학생들에게 심어주게 됩니다. 이런 교과서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성찰적 역사인식에 도달하기가 어렵지요. 양면의 상호관계를 주의 깊게 살필 때, 성찰적 역사인식이 가능해집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자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자기만족의 관점과 자기성찰의 관점이 서로 대립합니다. 늘 그 국가의 주류세력들은 자기만족의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자기성찰의 관점을 억압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자학사관으로 비하합니다. 이쯤 되면 역사학도 아니고 역사교육은 할 필요가 없게 되지요. 성찰의 계기들을 차단하는 순간 우리는 역사 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최근 한・중・일 3국간의 역사인식 갈등도 모두 각국의 자국사를 자만사관에 의거해 구성하고 가르치기 때문에 조장된 것입니다. 민주화 정도가 낮은 나라일수록 늘 자만사관이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받아 우세를 차지하지요. 따라서 이에 따라 역사를 구성하고 가르치다보면 자국사는 물론 이고 다른 나라의 역사까지 훼손하고 침해하게 되는 거고, 결국 3국간의 역사인식 갈등으로 비화되었다는 거지요. 즉 누군가 하나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갈등의 주체는 상호 연관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관사와 비교사를 통해 이런 자기만족의 스토리를 좀 더 효과적으로 상대화하자는 것입니다.
역사교육 아하, 교수님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한줄 요약이라는 것인데요, 말씀하신 바, 자만사관을 상쇄시키기 위해 반성과 성찰을 통한 역사의 상대화가 필요하고, 이것이 곧 연관사와 비교사를 통해 역사를 보는 눈을 아이들로 하여금 길러 줄 수 있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과목이 곧 지역사 기반의 동아시아사라는 것 같습니다.
유용태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연관과 비교가 동아시아사에서만 가능하고 필요한 방법인가 하고 묻기도 합니다. 당연히 아니지요. 제 책에서도 강조해 말했듯이 이러한 방법은 자국사와 세계사를 다시 쓰는 데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구요. 이를 포함해 동아시아사를 어떻게 지역사의 하나로 인식하고 체계화 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을 다룬 책이《동아시아사를 보는 눈》인데, 실제 역사의 스토리를 서술한《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에 비해 독자의 관심이 엄청 적어서 놀랐어요. 서평이 각각 1개와 6개로 차이가 나요. 역사를 가르치는 것도 물고기를 잡고 요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관건은 ‘방법’ 아닌가요? 그런데 정작 방법론에 들어가면 뭔가 쉽지 않다는 인식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남이 해주는 요리만 먹을 건가요?
역사교육 이제 슬슬 인터뷰가 끝을 향해 가는 것 같은데요. 마지막 질문을 드리고자 해요. 마지막 질문은 역사, 역사교육 그리고 이를 넘은 현실이야기를 여쭈고 싶어서요. 홍콩문제와 관련된 질문을 드리고자 해요. 정말 모든 사람의 공분을 샀던 일이기도 하고, 또 이는 오늘 저희가 이야기한 동아시아적 관점을 파괴하는 사건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지금 있어서의 중국의 행보는 어떻게 평가하시고, 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유용태 뜨거운 이슈인데, 저도 이게 현실의 문제다, 그러니까 역사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깊이 알지는 못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연구자로서 알고 있는 대로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홍콩은 아편전쟁 이래 영국 식민지였다가 1997년도에 중국으로 반환되었잖아요. 그 반환 결정은 1984년 중영연합성명에 의해 발표되었어요. 아시다시피 당시는 덩샤오핑이 사실상 중국을 이끌고 있던 때고, 그의 지도하에 “일국양제(一國兩制)”라고 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중국이 빼앗겼던 홍콩을 다시 품에 안은 겁니다. 일국(一國), 하나의 중국이지만, 양제(兩制), 제도는 두 개로 가자는 거였죠. 이는 현실의 홍콩 시스템이 대륙의 시스템과 다름을 인정한 것이고, 다만 이러한 양제는 50년 동안만 시행하기로 했지요. 따라서 당시로부터 50년 뒤인 2047년에는 일국일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제(一制)가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과 같이 대륙의 공산당 일당제일 것인지 아니면 그로부터 변화하여 뭔가 다른 시스템이 될 것인가, 이것은 반환 당시에도 지금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50년 후에 일국일제가 된다는 것이었죠. 어찌되었건 결국 일국양제는 시한부였고, 모든 이들이 이를 아는 상황에서 홍콩 반환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홍콩인들은 별다른 반대나 저항이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날 홍콩 시위대의 가장 중요한 요구 중 하나는 행정장관 직선제를 시행하라는 거잖아요. 그 요구가 처음 나온 것은 2014년입니다. 그전에는 이러한 요구가 없었고 홍콩 행정장관을 1,200명(입법국, 구의회, 직업단체 등 다양한 주체로 구성)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뽑았지요. 반환결정 직후인 85년부터 홍콩인들은 식민지 체제를 급속히 민주화 하여 주민 직선의 시정국(市政局)의회와 구의회를 신설하고 총독의 자문기구에 불과하던 입법국도 민선의 민의기관으로 만들어 갔어요. 그렇게 해야 97년 이후 대륙의 일당제가 파급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다고 본 거지요. 행정장관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간선제로 선출하는 것으로 되었구요. “일국양제”는 홍콩의 이러한 새로운 체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출발한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2014년부터 직선제 요구가 터져 나왔어요. 이 갑작스러운 전환은 대만의 민진당 정권과 연관이 있어요. 이 역시 연관사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입니다.
국민당이 장기간 집권하던 대만에서 민진당이 처음 정권을 잡은 것이 2000년입니다. 그런데 민진당은 대만 본성인(1949년 이전부터 거주하던 이들)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거든요. 이들은 “우린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이다”는 정체성(아이덴티티)을 갖고 있어서 국민당이 추구하는 대륙과의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민진당의 주요 정강인 “대만 독립론”으로 나타납니다. 이 민진당이 2004년 선거에서도 국민당을 이기고 정권을 잡았어요. 이때부터 북경 당국은 이 사태에 대해서 뭔가 비상한 대응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만약 이게 홍콩이나 마카오(홍콩과 똑같은 방식으로 1999년 반환), 그리고 티벳과 위구르 등 소수민족 지구까지 확산될까 우려한 거지요. 이에 따라 2005년에 마련된 것이 바로 “반분열국가법”입니다. 이는 중국이라는 국가를 분열시키는 언동을 규제하는 법이에요. 결국 하나의 중국에 반하는, 어느 누구의 분립요구도 모두 이 법으로 제압하겠는 것이지요.
이 “반분열국가법” 제정 이후 홍콩의 행정장관선거에 북경 당국이 개입하는 정도가 점점 커지다가 시진핑 체제가 등장하면서 2014년부터는 행정장관후보를 북경 당국이 심사하기 시작했어요. 이에 대응해 그때부터 직선제 요구가 터져 나온 겁니다. 물론 이번 시위에서 발단은 “반송중법”이었지만 결국 시위가 확대되면서 직선제 요구가 크게 부각되었지요. 이번 홍콩 사태를 역사적으로 보면, ‘1997년 반환될 때 일국양제를 약속했는데 왜 약속을 깨고 행정장관 선거에 너희가 자꾸 개입하는가! 하지 말라!’는 요구인 것이죠. 이에 대해 북경 당국은 이들이 겉으로 표방하는 것은 직선제지만 실제로는 요구하는 바는 홍콩독립이라며 강경대응을 하는 것입니다. “광복홍콩”이란 구호를 그렇게 해석한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일부이지만 있어요. 왜냐하면 이런 일당제국가의 일방적인 통제와 지시를 받는 상황이라면 그런 중국에 통합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번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여러 갈래 성향(직선제 요구, 독립요구, 시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 보장 등)의 사람들인데, 시위에 대해 중국이 너무 강경대응을 하니까 홍콩인들도 점점 더 격해져서 과격한 구호가 먹혀들게 되는 것입니다. 북경 당국은 “일국양제”의 약속을 지키고, 그 안에서 이들의 다양한 주장이 토론되고 수렴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나 북경 당국은 그렇게 하다 보면 오히려 독립 주장이 확산되고 그런 세력들이 상호 연대하면 걷잡을 수 없어져 마치 소련이 붕괴되듯 중국 붕괴의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겁니다.
역사교육 그래도 그 50년 시한인 2047년에는 어찌되건 또 한 번 요동칠 것 같은데요?
유용태 아마도 1997년도에 일국양제를 50년 시행한다고 했을 때 홍콩인들이 별 다른 저항을 하지 않은 것은 50년 뒤에도 중국이 지금의 일당제가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고 뭔가 달라져 있지 않겠는가, 라는 기대를 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저는 중국의 경제와 사회가 변화했기 때문에 이대로 일당제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일당제는 국유제 하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사유 재산이 없고 계급이 없는 완전 평등 사회에서만 일당제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정당은 party잖아요. party는 part에서 온 말이니까 정당은 부분적인 이해만을 대변할 수 있어요. 어떤 거대정당도 국민 전체의 이해를 대변할 수 없어요. 그게 원래 ‘파티’의 본질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사유재산이 있고 계급의 불평등이 있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다당제가 시행되어야 각기 다른 이해 집단의 요구를 대변할 수 있습니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일당제는 계급과 사유재산이 폐지된 사회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사회주의 정당이 일당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개혁개방 이후에 사유재산과 계급이 다 부활되었거든요, 그 결과 다양한 이해집단들이 생겼어요. 이렇게 물적 조건 자체가 달라졌는데도 일당제를 계속 밀고 나간다는 것은 토대와 상부구조가 불일치해서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서도 시행된 적이 없는 체제라서 ‘결국 안 될거야!’ 라고 단언 하기는 어렵지만요.
여기서 대만 얘기도 살짝 하고 싶은데...
역사교육 예, 그러시죠.
유용태 역사교사모임은 일본과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앞으로는 대만 쪽으로도 교류를 넓혀갔으면 해요. 대만 교육당국이 올해 8월 고교 역사과목으로 동아시아사를 신설하기로 최종 결정했고 내년부터 시행한다고 합니다. 원래 대만의 중등 역사교육은 중국사-세계사 체제였다가 민진당 집권 이후 본성인의 정체성을 반영하여 대만사를 신설해 대만사-중국사-세계사 체제로 바꾸었는데, 이번에 이를 대만사-동아시아사-세계사로 다시 바꾼거에요. 이에 관해서는 김유리 교수가 올해 9월호《역사교육》에서 그 경과를 상세히 다루었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수년간 준비하고 논의해왔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고교 “동아시아사”도 참조했습니다. 또 우리의《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번역해서 내년 초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이는 한국과 대만이 서로 참조할 뭔가를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제가 작년 12월《역사학보》에 대만 최초의 동아시아사 저작을 소개한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습니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이면서도 중국이 아니라는 이중정체성을 가진 독특한 곳이어서 중국을 상대화 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봐요.
역사교육 예, 대만 교사들과의 교류 필요성에 저도 공감합니다.
역사교육 정말 긴 시간 좋은 말씀 해주셨는데요, 정말 마지막으로 교사들한테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실까요?
유용태 저도 잠깐이지만 중등학교에서 역사교사를 했기 때문에 “전국역사교사모임”에 대해서는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어요. 창립 멤버이기도 하구요.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중요성을 늘 자각하면서 내가 역사 통해서 학생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어떤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는가?이걸 늘 생각하면서, 교재도 준비하고 수업에 임하면 아무래도 역사 교사로서의 보람이나 자부심이 더 커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웃음)
물론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면 그냥 자동으로 종치면 들어갔다 나오고, 문제 출제해서 시험 보고 1년 마치고 학교 옮겨가서 새 학교 적응하다 보면 또 정신없이 1년 가버리고 그렇게 일상화되는 거죠. 사람의 생활이라는 게 원래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대다수는 보수적 성향을 내면에 갖고 있지요. 삶 자체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그걸 파악하고 적응해야 되기 때문에 남다른 에너지를 써야 되거든. 그게 계속되면 피곤해서 못 살아요. 그러니까 늘 깨어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거고(웃음), 내가 뭐해서 먹고 사는가? 역사를 가르쳐서 먹고 살기에, 그래서 조금 더 그 본래의 의미를 살릴 수 있도록 하려면, 그래도 그런 자각을 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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