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수립 전후 남과 북의
‘중앙정부론’

역사이야기 – 한국근현대사 다시 보기②

>>이용기(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1. 들어가며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과 동시에 38선으로 분할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는 미소 양국의 세력 분할을 위한 일방적 조치였으며, 남북 분단의 시발점이 되었다. 해방 당시 한국인들은 38선에 의한 분할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당연하게도 조만간 남북을 아우르는 독립국가가 수립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염원과 달리 남북 분단은 더욱 심화되어, 1948년에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었고, 1950년에는 전쟁이 발발하여 돌이키기 힘들 정도로 상호 적대감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20세기가 저물 무렵 국제적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남북은 지금까지도 상호 긴장과 적대의 관계를 종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분단 상황을 기정사실로서 매우 익숙하게 느끼기도 하지만, 사실 38선 분할로 촉발되었던 남북 분단이 이처럼 격화되고 장기간 지속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냉전이라는 국제적 조건이 한반도에 크게 작용했고 민족 내적으로도 좌우·남북 대립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그러할 가능성이 뚜렷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렇다고 1945년의 38선 분할이 1948년의 남북 분립으로, 그리고 다시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냉전이 종식된 지 30년이 다 되도록 지금까지 분단이 지속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 동서로 분할되었던 독일은 비록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음에도 전쟁을 겪지 않았고 결국 통일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원하지 않던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심화시키면서 전쟁을 치르고 분단 상황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따져야 하겠지만, 본고에서는 1948년의 정치적 분단이 어떻게 전쟁으로까지 치달았는가를 성찰하는 차원에서, 정부 수립 전후로 남북이 주장했던 ‘중앙정부(中央政府)’라는 다소 낯선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중앙정부론이란?


1948년에 남과 북에 수립된 두 정부는 스스로를 ‘중앙정부’로 자임하였다. 중앙정부라는 말은 지금도 지방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에 대비하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서 특별한 개념어가 아니다. 그렇지만 남북이 경쟁적으로 표방했던 ‘중앙정부’라는 표현은 자신에 대한 성격 규정인 동시에 상대방과의 관계 설정을 지시하는 독특한 의미를 가졌다.1) 남북 두 정부는 자신이 각각 38선 이남과 이북에 제한되는 일개 지방정부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중앙정부’라고 선언한 것이다.


1)해방 이후 ‘중앙정부’라는 표현은 (특히 국공내전 상황에서)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는 남북이 대립·경쟁하던 상황에서 중앙정부론이 등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내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중앙정부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분단이 가시화되던 1947년 말부터인데, 이 무렵 연합국에 의해 분할되었던 독일의 통일 문제를 보도하면서 ‘중앙정부’라는 표현이 쓰인 것도 흥미롭다. 이 용어의 비교사적 검토는 향후 과제로 미룬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야 오늘에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에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중략)…이 국회는 전민족을 대표한 국회이며,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民國) 정부는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이에 또한 공포하는 바임니다. 2)
남북조선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수립된 중앙정부는 전조선 인민들을 정부 주위에 튼튼히 단결시켜 가지고 통일된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급속히 건설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이며, 국토의 완정(完整)과 민족의 통일을 보장하는 가장 절박한 조건으로 되는 양군(兩軍) 동시철거에 대한 쏘련 정부의 제의를 실천시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것 3)


위의 첫 번째 인용문은 1948년 5월 31일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연설했던 내용의 일부이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남한의 국회가 “전민족을 대표”한 “우리나라에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이며, 이 국회에서 수립될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두 번째 인용문은 북한 정부 수립 다음날인 1948년 9월 10일에 김일성이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 8개조 중 제1조의 일부이다. 그 역시 북한 정부를 “남북조선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수립된 중앙정부”라고 밝히고 있다.

요컨대 남북이 표방했던 ‘중앙정부론’이란 자신이 전민족을 대표·망라하는 전국적 차원의 정부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 남북의 두 정부는 각각 38선 이남과 이북의 인민을 대표하고 그 지역에 한하여 통치권을 갖는 정부였다. 그렇다면 남북은 왜 실제와 달리 중앙정부를 표방하였으며, 그것은 남북 분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948년 여름의 남북 정부 수립은 한국이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뒤에도 3년 동안 지속되던 미소 양국의 통치를 종식하고 독립국가 수립의 일보를 내딛었다는 의미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는 분명 분단을 공고화하는 조치였음에 틀림없다. 당시 한국인들은 남북 정부의 수립을 주권 회복으로 이해할 것인지 여부를 떠나, 대다수가 남북의 정부를 분단정부라는 차원에서 미완 또는 비정상의 상태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남북 두 정부는 스스로를 38선 이남과 이북에 제한되는 ‘지방정부=분단정부’가 아니라 한반도 전역을 통할하는 ‘중앙정부=통일정부’라고 주장함으로써 통일을 열망하는 한국인들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결국 전민족적 대표성을 주장하는 중앙정부론은 분단 상황을 비정상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를 반증하는 논리이자 분단정부라는 자신의 한계를 캄푸라치하기 위한 정치적 주장으로서, 실제와 표방이 일치하지 않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던 셈이다. 더구나 남북 양측이 중앙정부를 자임하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현실적 모순을 초래하는 일방적 주장이었다. 영토·인민·주권의 세 가지 요소에 입각해 성립되는 근대국가는 특정한 지역과 거기에 사는 주민에 대한 배타적 통치권을 주장하기 마련인데, 한반도와 거기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두 개의 국가 또는 정부 아래 놓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 두 정부는 자신이 중앙정부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나름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야 했다.

남측은 대한민국이 유엔의 결정에 따라 실시된 5·10 총선거에 의해 수립되었으며 유엔에 의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전민족적·전국적 대표성을 가진 중앙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북측은 5·10 총선거가 38선 이남에서만 시행되었던 것과 달리 자신들은 제한된 방식으로나마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며, 남측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를 남북 대표자들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중앙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남북 양측은 중앙정부론을 헌법에 반영하였다. 남측이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영토 조항’을 통해 한반도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명시하였다면, 북측은 헌법 제10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府)는 서울시다.”라는 ‘수도 조항’을 통해 이를 에둘러 표현하였다.

이처럼 남북은 서로가 중앙정부임을 주장하였지만, 이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정당화 논리에도 한계가 있었다. 남측 주장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북측의 주장을 간략하게 검토해보자.

북한은 남한에서 5·10 총선거가 시행되자 1948년 6월말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제2차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전조선적 입법기관’인 조선최고인민회의 창설과 남북 대표자들로 구성되는 ‘조선중앙정부’ 수립을 결정하였다.4) 북한은 곧이어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선거를 시행하였는데, 북한 지역에서는 직접선거를 통해 212명의 대의원(남측의 국회의원에 해당)을 선출하였고, 남한 지역에서는 ‘지하선거’를 통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360명의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9월 8일 최고인민회의는 헌법을 채택하고 이를 ‘전조선 지역에 실시한다’고 선언하였고, 다음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가 남북 전역의 선거를 통해 남북의 대표를 망라하였으므로 여기에서 구성한 북한 정부가 ‘유일무이한 통일적 중앙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남한 지역에서 정상적인 선거를 실시할 수 없어서 지하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었음에도 남한 유권자의 77.48%가 투표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남한 지역을 실제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자,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과장된 주장이었다. 사실 지하선거를 통해 남한 대표를 선출한 것은 북한 정부가 38선 이북에만 한정되지 않고 남북을 아우른다는 명분을 얻기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북한이 주장하는 중앙정부론은 현실과 괴리된 강변이자 분단정부라는 한계를 감추기 위한 선전에 불과하였다.


2) 「유일한 민족대표기관 세계 만방에 선포」 �동아일보� 1948.6.1.

3)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연감� 1949년판, 45쪽.

4)이는 1948년 남북협상에서 합의했던 통일을 향한 프로세스(외군 철수→ 전조선정치회의 소집→ 임시정부 수립→ 남북 총선을 통한 전국적 입법기구 구성→ 헌법 제정→ 통일정부 수립)와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조치였다.




3. 한반도 유일합법정부=중앙정부?


남한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자 한반도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갖는 정부로서 유엔에 의해 인정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한반도 유일합법정부’론이며, 이는 최근의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에서 예민한 지점이 되어 왔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한국문제 유엔이관 이후부터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까지 전개 과정을 찬찬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 조짐을 보이던 1947년 9월에 더 이상 미소 간의 협상이 성과를 낼 수 없다며 한국문제를 제 2차 유엔총회의 안건으로 제안하였다. 소련은 이것이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위배되며 유엔은 미국의 거수기에 불과하다며 한국문제 유엔이관에 반대하였다. 미국은 유엔 감시 하에 남북 총선을 통해 통일독립국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밀어붙였고, 소련은 이를 거부하면서 한반도에서 미소 양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한국 문제를 한국인들에게 일임하자고 역제안하였다. 미소의 첨예한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미국의 주장을 수용하여 남북 총선거를 통한 중앙정부 수립과 이를 촉진·감시하기 위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하 ‘위원단’으로 줄임) 파견을 골자로 하는 「한국 독립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B-(2) 한국국민의 자유와 독립의 조속한 달성에 관하여 위원단과 협의할 수 있는 대표자들을 선출하기 위하여 1948년 3월 31일 이내에 (중략) 선거를 시행하고, 이 대표자들로 하여금 국회(National Assembly)를 구성케 하고 한국의 중앙정부(National Government of Korea)를 수립할 것을 권고하며 5)


그러나 한국에 파견된 위원단은 곧이어 소련의 입북 거부에 직면하여 남북 총선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위원단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겼었고, 결국 유엔에서 이 문제를 재론하였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의 선거’를 주장한 미국의 제안을 통과시켜 남한 단독선거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가 시행되었고, 국회 구성, 헌법 제정, 정부 수립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후 위원단은 5·10 총선거와 그에 따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였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전국적 대표성에 관해서는 다시금 심각한 내부 이견을 보였다. 중국·필리핀·엘살바도르 등 ‘친미블럭’은 대한민국 정부가 전국적 대표성을 갖는 중앙정부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호주·캐나다 등 ‘영국블럭’은 남한만의 총선을 통해 수립된 정부는 1947년 유엔총회 결의에서 명시한 ‘중앙정부’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미국은 남한을 견고한 반공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남한 정권의 안정성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대한민국을 중앙정부로 승인받고자 하였지만, 영국블럭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입장을 일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1948년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국 문제와 외군 철퇴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와 협의를 할 수 있었고 한국인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지역에 유효한 통치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대한민국정부)[a lawful government(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가 수립되었다는 것과, 6)

② 또 이 정부는 한국의 이 지역(that part of Korea) 유권자의 자유의사가 정당하게 표현되고 임시위원단이 감시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③ 또한 이 정부가 한국 내의 이와 같은 유일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것을 선언한다. (주 : 번호는 필자)


유엔총회의 이 결의는 3가지를 승인한 것인데, 이를 논리적으로 재정리하면 이렇게 볼 수 있다. 첫째는 위원단의 감시·협의가 가능했고 한국인 대다수가 거주하는 한국지역(that part of Korea), 즉 ‘38선 이남’에서 이루어진 5·10 총선거가 정당성을 갖는다는 것이며(②), 둘째는 그 선거에 의해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38선 이남’에 대한 통치와 관할권을 가진 ‘합법정부’라는 것이고(①), 셋째는 한국에서 ‘이와 같은(such)’, 즉 ‘합법적(lawful)’인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하다는 것이다(③). 유엔은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인정했지만, 유엔 감시 하의 선거와 무관하게 수립된 북한 정부의 합법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에 의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인 전체를 대표·망라하며 한국 전체를 통치·관할하는 정부로 인정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7)

요컨대 1948년의 유엔총회 결정은 대한민국을 38선 이남에 한정되는 합법정부로 승인하면서도, 38선 이북에 대한 합법적인 통치권에 대해서는 공백지대로 남겨둔 조치였다. 따라서 이 결의를 근거로 대한민국이 남북을 아우르는 ‘중앙정부’로서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견강부회인 셈이다.8) 이는 단지 위 조항의 자구 해석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 결의는 앞에서 보았듯이 거의 1년 동안 유엔 내부의 심각한 논쟁을 거쳐서 나온 것이며, 그 핵심은 대한민국 정부를 남한에 한정되는 정부로 볼 것인지 남북을 아우르는 ‘중앙정부’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이견이었다. 또한 위 유엔총회 결의문의 서두에는 “1947년 11월 14일자 결의에 규정된 목적이 완전히 수행되지 않았고, 특히 한국통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을 명시하였다. 유엔은 남북 총선을 통한 중앙정부 수립을 규정했던 1947년의 결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그 결과 남북의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948년 12월 유엔총회의 결정이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38선 이남으로 한정했다는 것은 얼마 뒤 한국전쟁 과정에서 구체적 현실로 나타났다. 1950년 10월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개시하자 이승만은 이북 5도에 지사를 임명하고 북한 점령 지역에 대한 통치를 하고자 하였지만, 유엔군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북한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둘러싼 혼선이 생기자, 1950년 10월 12일 유엔 소총회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재확인하였다(「38도선 이북 유엔군 점령 지역의 임시 행정조치에 관한 결의」).


3.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감시와 협의할 수 있었던 한국지역에 효과적 지배권을 가진 합법정부로 유엔에 의해 승인되었고, 또한 결과적으로 한국의 기타 지역에서 합법적이며 효과적인 지배권을 가졌다고 유엔이 승인한 정부는 없음을 상기할 것 9)

유엔은 38선 이북에 대한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을 조직하여 북한 점령 지역의 행정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그리고 유엔은 전쟁 중에 탈환한 38선 이북 지역, 즉 수복지구에 대한 관할권을 1954년 11월에야 한국 정부에 이양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한민국이 유엔에 의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에 대한 통치 권한을 갖는다는 논리가 얼마나 사상누각인지를 보여준다.



5) 정일형 편, 1954, �한국문제 유엔결의문집�, 국제연합한국협회 출판부, 4~5쪽. 이 결의문이 채택되었던 당시 신문지상에서는 ‘National Assembly’를 ‘국민의회’로, ‘National Government of Korea’를 ‘조선중앙정부’로 번역하였다(「유엔결의안 원문」 �동아일보� 1947.11.21; 「未久에 조치를 지시」 �경향신문� 1947.11.21.). 이후 연구자들은 ‘National Government’를 ‘통일정부’(강성천), ‘전국정부’(신용옥) 등으로도 번역한다.

6) 정일형 편, 앞의 책, 10~11쪽.

7)한국사 교과서 논쟁에서는 유엔의 한국 정부 승인 문제를 ‘38선 이남의 유일 합법정부’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 중에서 무엇으로 표현·해석할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필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전자가 맞다고 보지만, 말 자체로는 후자도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후자로 해석할 경우에는 ‘38선 이남에 한정한 통치권 인정’이라는 전제를 달아야 정확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8) 당시 우익 신문들은 유엔총회의 결정을 대한민국 정부가 한국의 ‘유일한 합법적 중앙정부’로 승인받은 것이라고 보도하였고, 한국민주당 선전부도 이에 감사하는 입장을 밝혔다. 「정위(政委) 결의안 요지」 �동아일보� 1948.12.10.; 「일관 주장의 선물-한민당 정위 승인에 언급」 �동아일보� 1948.12.1.; 「다음의 이정표 남북완전통일」 �경향신문� 1948.12.18.

9)정일형 편, 앞의 책, 161~162쪽.




4. 중앙정부론의 폐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하여


중앙정부론은 단지 논리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으로 남북 간의 대립과 갈등을 격화시키는 부정적 역할을 하였다. 분단 상황에서 남북의 두 정부가 서로 중앙정부를 표방하는 것은 같은 영토와 인민에 대한 통치권을 쌍방이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호 대립과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다. 만약 남북이 각각 38선 이남과 이북을 대표·통치하는 정부였음을 전제한다면, 자신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존재하는 상대방을 하나의 실체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남북은 각기 자신이 ‘유일한’ 민족대표기관임을 자임하였으며, 더 나아가 자신만이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중앙정부론은 남과 북이 상대방을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상대방과의 대화나 타협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극단적인 상호 불인정의 논리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남북은 서로를 ‘괴뢰’라고 칭하며,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를 부인하고 혐오하였다.11) 남북 화해의 기운이 생겨나기 전인 20세기 말까지도 남한은 이북을 ‘북한괴뢰정권’ 또는 ‘북괴’로, 북한은 이남을 ‘남조선괴뢰도당’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처럼 상대방을 극단적으로 부인·증오하는 괴뢰정부론은 이제 다시 무력통일론으로 나아간다. 남북의 집권자들이 당시에 어느 정도 통일에 대한 의지를 가졌는지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당시 한국인 대다수는 분단을 비정상적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의 정부는 어떤 차원에서든 통일에 대한 전망을 제시해야 했다. 그럼에도 두 정부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통일은 상대방과의 협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없애버리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남한 정부는 ‘북진통일’을 공공연히 외쳤으며, 북한 정부 역시 ‘국토완정(國土完整)’ 또는 ‘남조선해방’이라는 표현으로 무력통일 의지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호전적 통일론은 호언장담에 그치지 않고 심각한 ‘38선 분쟁’으로 이어졌으며, 1950년 6월 북한은 이를 실행에 옮기고자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중앙정부론’은 분단정부라는 자신의 한계를 감추고 분단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남북 집권자들의 자기 합리화·정당화 논리였다. 이는 단지 자신이 전민적족·전국적 대표성을 갖는다는 자기만족적 논리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을 부인하고 절멸시키려는 배타적·폭력적 논리로 작동하였다. 1948년의 정치적 분단이 1950년의 파멸적 전쟁으로 비화한 것은 결코 필연이 아니었지만, 중앙정부론은 그러할 가능성을 깊숙이 내장하고 있었다.

냉전의 시대가 물러간 뒤에 중앙정부론은 더 이상 현실적인 정당성이나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 이를 말해준다. 남북에 두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한은 14차례, 북한은 5차례 유엔 가입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12) 그러나 탈냉전 시대를 맞이한 남북은 1991년 9월 유엔 회원국 만장일치로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다. 이로써 남북은 더 이상 자신이 한반도 전역을 관할하는 ‘중앙정부’가 아님을 인정한 셈이고, 국제사회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개의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그 직후 남북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여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또한 2000년 6·15선언에서 남북은 화해와 협력을 통해 통일로 나갈 것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중앙정부론적인 발상이 살아 숨쉰다.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중앙정부론에 입각해 제정된 국가보안법이나 헌법상의 영토 조항이다. 이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의 시대에 걸맞지 않으며 현실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에 깊이 재고할 대목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북한 붕괴’론에 입각한 흡수통일적 사고방식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걸핏하면 ‘북한 붕괴’가 임박했다고 외치며 북한 지역을 대한민국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위기가 나타나곤 한다. 그러나 북한이 붕괴할 가능성이나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를 차치하고라도, 그러한 급변 사태가 온다고 북한이 자동적으로 대한민국에 편입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럴 경우에 유엔이나 주변 강대국에 의한 공동관리가 이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다.

중앙정부론은 냉전의 유산이자 남북 적대의 결과였으며, 지금은 그 어떠한 긍정성도 발휘하지 못하고 심지어 현실성도 떨어지는 시대착오적 논리이다. 남북 사이에 대결과 증오의 시대를 보내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 우리는 중앙정부론적 발상에서 벗어나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고 공생할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9)정일형 편, 앞의 책, 161~162쪽.

10)남북의 중앙정부론은 전민족적·전국적 대표성을 주장하는 논리이지만, 양측 정부는 자신을 단지 민족적 총의에 입각해 수립된 정부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정부로 자임하였다. 남측은 3·1운동의 성과로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임정법통론’ 또는 ‘임정계승론’을 주장하였고, 북측은 남측을 친일파에 의해 수립된 것으로 몰아붙이면서 자신이야말로 항일투쟁의 계승자임을 자임하였다. 이러한 정통론적 역사의식은 중앙정부론의 배타성을 강화하였으며,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도 했다. 남북의 정통론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역사비평� 128호(2019 가을호)의 기획 특집 「국가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을 참조.

11) ‘괴뢰(傀儡)’란 꼭두각시를 말한다. 남북은 상대방이 미소 양국에 종속된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괴뢰’라는 표현을 썼으며, 때로는 상대방을 ‘소련의 주구(走狗)’, ‘미제의 앞잡이’라고 비난하였다.

12)신용옥, 2016,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건국절’ 논란-헌법 전문과 중앙정부론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65, 고려사학회, 518~519쪽.




<참고문헌>

강성천, 1996, 「1947~1948년 유엔조선임시위원단과 ‘통일정부’ 논쟁」, �한국사론� 35,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김성보, 2011, �북한의 역사� 1, 역사비평사.

김정배, 2017, 「미국과 유엔의 대한민국 ‘정부(government)’ 승인의 역사적 함의」, �서양 역사와 문화 연구� 44, 한국세계문화사학회.

박태균, 2015,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창비.

서중석, 1996,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신용옥, 2016,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건국절’ 논란-헌법 전문과 중앙정부론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65, 고려사학회.


12)신용옥, 2016,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건국절’ 논란-헌법 전문과 중앙정부론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 65, 고려사학회, 518~5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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