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모의선거와 민주시민교육 : 2.기고
≫ 전대원(경기 위례한빛고)
전대원 선생님은 일반사회 교사로서 고등학교에서 사회문화, 법과 정치, 경제 등의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교원단체 ‘실천교육교사모임’의 대변인을 맡아 교육 현장에서의 의제에 대해 교사들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역사교육>에서는 사회 교사인 전 선생님에게 청소년 참정권 확대와 모의 선거 활동 등 정치교육에 대한 원고를 부탁하였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선거권 확대의 역사이다.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수립을 위한 정초 선거에서부터 보통선거 제도가 일거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서구 선진국이 겪은 차티스트 운동의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성별, 계급별로 선거권을 제한한다는 생각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이다. 다만 유독 연령에 대한 제한 만큼은 다른 선거권 제한 요인들에 비하여 유독 도드라졌다. 우리 역사에서 언제부터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는 장유유서의 전통이 현대 정치 체제에서도 아주 강하게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선거 연령을 18세로 쉽게(?) 낮출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6월 항쟁의 결과물로 현행 헌법을 탄생시킬 때, 정치적 대립으로 선거 연령을 쉽게 합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안은 빨리 마련해야 하는데, 여야가 선거 연령을 두고 합의 도출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법률로서 유보하는 조항으로 합의안을 마련했다. 의도하지 않게 이때의 결정이 이후 선거 연력을 2005년에 만 20세에서 19세로 낮추고, 이번에 18세로 낮출 수 있게 되는 제도적 배경이 되었다. 만일 이때 선거 연령을 헌법 조문으로 결정했다면 우리나라의 선거권 확대 문제는 헌법 개정 사항이 되어 문제 해결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별로 주목을 하고 있지 않지만 선거와 관련하여 헌법에 나이가 직접 규정된 피선거권이 있다.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만 40세가 넘어야 한다고 헌법 67조 4항에 구체적으로 명시가 되어 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30대 정치인이 대통령 후보로 부상한 적이 없기에 별다른 쟁점이 되지는 않고 있지만, 연령과 선거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면 언젠가는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만 18세로 선거 연령 하향이 확정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선 자격 시비가 계속되고 있다. 만 18세에게 선거권을 줄 정도로 역량을 갖추고 있냐는 자격 시비이다. 고3인 학생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정치에 참여하게 할 수 있냐는 반응인 것이다. 이는 아르바이트라는 노동을 통해서 사회적 생산이 보편화 되어 있는 연령대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차티스트 운동을 반대하며 등장했던 논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매우 전형적이고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가 되어왔던 논리들이다. 주권자의 자격에 시비를 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의 선거 교육에 대한 논란 역시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킨다는 대 전제 아래서 모의 선거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 행위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행위가 파생시킬 가능성이 있는 문제점에 대하여 교육 당국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란 불신감이 모의 선거 교육을 금지하는 논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교육을 실행하는 주체에 대한 불신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불신의 주체가 선거관리위원회라는 것이다. 교육의 내용을 선거관리위원회가 판단하고 금지시키는 상황이 우리나라 정치교육, 선거 교육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일 교실 수업을 통해 선거 국면에서 특정 정당이나 인물에 대한 투표나 지지를 유도한다면 이는 마땅히 금지해야 하고, 그런 행위가 있다면 처벌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는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근데 이번 모의 선거 교육 금지는 그러한 형식이 정치적 중립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만으로 행위 자체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과잉금지에 해당한다. 정치란 태생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권력의 문제이지만, 그걸 사유로 정치를 금지시킬 때 정치는 오히려 퇴보하게 된다. 애초에 문제 삼아야 할 불법과 거리가 먼 교육 형식에 대하여 비교육 정부기관이 교육의 내용을 제한하고 나섰다는 것이 선관위 결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다.
정치가 교육에 대하여 과도하게 개입한 사례는 매우 많다. 가깝게는 역사를 정치의 도구로 인식하여 교과서를 국정화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결국 좌초되기는 하였으나 이 과정을 둘러싸고 우리 교육과 사회가 겪지 않아도 될 홍역을 앓아야만 했었다.
예기사회화 단계에 있는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어떻게 실재성을 넣어주느냐에 교육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은 영어가 일상에서 필요하지 않고, 더하기 빼기를 넘어선 수학 공부가 왜 필요한지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이기에 이런 과목들을 어려워한다. 교사들도 이런 과목의 교육에 힘들어 하는 것이 필요성과 체감 사이에 있는 넓은 공간을 좁히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비단 영어나 수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 교육에서도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실들을 생생한 삶 속으로 재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추체험은 비슷한 삶의 경험이 응축되어 있을 때는 쉽지만, 상상만으로 접근하기는 많이 어려운 일이다. 아직 반장 선거 정도밖에 안 해본 학생들이 고도의 권력 투쟁의 생리를 이해하는 건 수학 미적분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난해하다.
정치 교육은 현실의 삶을 교육과 연결하기에 쉬운 편에 속한다. 어린 학생들이라 하지만, 사회의 공기를 같이 마시고 분위기를 함께 느끼며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등학생 정도 되면 성인들 못지않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고, 우리 사회를 진지하게 알아가고자 노력하는 학생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때로는 촛불 혁명처럼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되면 참여도가 어른들보다 훨씬 더 높아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60년 전에 4.19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직접 경험하기까지 하였다.
이제 자신이 스스로 이 나라의 지도를 뽑아야 하는 선거를 앞둔 청소년들과 그들이 생활하는 교실은 유리된 공간이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사회적 단계에 진입하였다. 필자는 1987년 6월 항쟁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일거에 열려진 정치 공간. 그리고 대선 국면. 1노3김으로 표현되는 대통령 후보를 두고 교실에서는 모의 대선이 한참 진행되었다. 선거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다는 열기가 교실도 비켜가지 못한 것이다. 정부 당국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학교 선생님들은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조・종례 시간을 통해 모의 선거 금지 방침을 내렸지만, 예나 제나 어디 학생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그런 존재이던가?
선거권이 주어진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누구를 뽑을 것인가 의견을 나누게 될 것이고, 자신들의 생활과 밀착된 지방자치 선거를 맞게 되면 이런 경향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자기가 아는 지인의 범위 내에 정치인이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육자치 선거까지 감안하면 학생들에게 정치는 예기사회화가 아니라 지금 당장 선택을 해야 하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다른 교과목은 실제성을 높이는 쪽으로 교육이 발전해왔는데, 유독 정치 과목만은 실제성을 모호하게 하는 방향으로 교육이 진행되어 왔다. 실제로 존재하는 정당의 이름을 가려야 했고, 분명 이익집단으로 존재하는 조직임에도 이익집단이라 명명하지 못하였다. 정치 교육에서 이익집단은 부정적 개념이 아님에도 각종 전문 직역들은 자신들을 이익집단이라 칭했다고 교육 내용을 변경하라는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기까지 하였다.
사회교육, 특히 정치 교육은 이해관계 분석을 적나라하게 하고, 사회의 실재를 보여주는 작업이어야 한다. 교육 현실은 그런 실재성을 높이는 것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여 왔고, 실재의 사회를 이야기하려는 교사를 철저하게 옭아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 중립, 공정의 신화가 존재한다. 이것이 관철되는 공간이 교육이다. 교육은 그 어느 분야보다 정치적이고, 그 어떤 분야와 비교할 수도 없게 공정하다. 현실은 그런 비교우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에 어긋나는 현상이 나타나면 극도의 비난을 가하는 역설로 나타난다. 마치 성처녀의 신화가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화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해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를 수면 아래 놓고 교육을 하게 되면 정치 이해도가 골고루 떨어지게 될까? 그렇지 않다. 은근한 정치 개입이 가능한 집단은 더 많은 이익을 얻고, 사회적 약자는 정치 중립이라는 미명 하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은폐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든다. 정치를 비롯한 사회 교육은 은폐되어 있는 불합리를 드러내고 이를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데, 현실은 정 반대로 나가도록 만들고 있다.
수학과 영어가 문제해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유리된 고난도 문제풀이로 나갈 때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우리는 체감하고 있다. 정치 교육의 은폐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정치를 사각형의 교실과 시험지라는 종이 공간에서만 유효한 걸로 만들게 되면, 그 피해는 정치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할 필요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가게 되어 있다. 어쩌면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의 신화는 그게 신화화될 때 최대한 이익을 보는 계층이 창조해낸 것일 수 있다.
언론에서는 외국의 사례가 많이 나오는데, 이미 청소년 투표권이 보장된 지 오래이고 교육에 대한 존중이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역사가 깊다. 정치 중립성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에서든 용납하기 힘들 것이고, 단순한 교육 방법에 대하여 관이 일일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례 역시 찾아보기 어렵다. 선거 교육은 주권자로서 살아가야 할 학생들의 예기사회화이자, 바로 선거를 해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삶의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행위가 된다.
삶이 교육이고, 교육이 삶이 되는 체험 교육은 교육자들이 늘 꿈꾸는 교육 중 하나이다. 선거 연령 인하로 교육이 생생하게 이뤄질 수 있는 절호의 공간이 열렸음에도 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처사를 찬성해주기는 어렵다.
다만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게 출발선이라 생각한다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선거 연령 인하만 해도 인권운동 차원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일이고, 이제 그 결실을 본 것이다. 조금씩이지만 선거 연령은 낮춰져 왔다.
언젠가 먼 훗날이 되면 학교에서 모의 선거 자체를 금지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날도 올 것이다. 모의 선거는 어린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삶을 놀이로서 체험하고 교육으로 깨닫는 주요 정치 교육의 방법으로서 머잖아 자리 잡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