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도 사랑해보길

적을 만들지 않는 인간관계

by 시 쓰는 소년
photo by 시 쓰는 소년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과연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하물며 가족 사이에서도 갈등은 생긴다. 흔히 “일보다 사람이 더 힘들다”는 말을 한다. 싫어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때가 있다. 더 나아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대상이 생기기도 한다.


원수란 단순한 미움이나 불편함을 넘어, 극도의 악감정을 품게 되는 대상이다. 원수와 마주한다는 것은 때로는 모든 것을 걸고 맞설 각오까지 포함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원수처럼 느껴졌던 사람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이유 없는 갈등, 오해, 충분하지 못한 대화, 소통의 간극이 쌓이면서 상대에 대한 인식이 틀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한 영상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음료를 지나가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가져가 마시는 몰래카메라였다. 당연히 언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실랑이가 이어지는 사이, 다른 스태프가 같은 음료를 몰래 제자리에 가져다 둔다. 잠시 뒤 자신의 음료가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태도를 바꾼다.

“죄송합니다. 분명히 가져가신 걸 봤는데, 제가 잘못 본 것 같네요.”


확신했던 분노가 상황 하나로 누그러진 것이다. 물론 실제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나 폭력으로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맺는 많은 ‘척진 관계’는 혹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말로 경멸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최소한 서로에게 창을 겨누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절제가 필요하다. 약간의 아량과 의도적인 거리두기 말이다. 때로는 가식처럼 느껴질지라도, 미움을 노출하지 않는 태도가 관계를 더 악화시키지 않는 안전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가능한 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 또한 성숙한 선택일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미움을 키우지 않겠다는 선택, 적어도 증오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겠다는 결심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젊은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