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를 쓰는가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더 많을까, 불행한 사람이 더 많을까. 희망에 찬 사람이 많을까, 좌절 속에 있는 사람이 더 많을까.
다소 엉뚱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같은 얼굴로 같은 길을 오가며 비슷한 하루를 사는 듯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루를 견디는 데에도 적지 않은 에너지가 든다. 삶은 늘 선택과 고민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상처받고 넘어지며, 때로는 찢기고 빼앗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빛을 잃는 날도 있고, 고뇌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 희망과 좌절의 비중을 수치로 가를 수는 없지만, 그것들이 늘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고 말했다. 양적인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가 더 가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풍요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문학과 예술의 역할을 떠올리게 된다. 문학과 예술은 메마른 삶에 내리는 단비와 같다. 잘 그려진 그림 한 점, 잘 쓰인 문장 하나가 마음의 결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물론 모두가 문학과 예술을 통해 위로와 회복의 에너지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럴 마음조차 내기 어려울 만큼 깊은 좌절과 포기의 상태에 놓인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비교적 평온한 날에도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시가 그런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시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감정을 정화하는 언어의 그릇이다. 어둡고 무거운 작품일지라도 사람을 마냥 가라앉게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음속 말을 대신 꺼내 주고 감정을 정확히 짚어 주기에 더 깊은 공감과 연대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글을 쓰고 시를 쓰는 이유가 오직 상처 입은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이 고통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이해의 대상이 타인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해보는가. 고통과 괴로움, 상처와 좌절은 삶의 큰 일부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과 성취의 순간만큼이나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서도 위로받을 언어가 필요하다.
시를 쓰는 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마음을 건너는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문장이 누군가에게 감동과 감화를 전하는 한 편의 작품으로 태어나기를, 그래서 함께 그 길을 오래 걸어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