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화단의 꽃을 보니 저 꽃들은 자신의 짧은 목숨을 이미 알면서도 저렇게 온 에너지를 다해서 자신을 펼쳐내는구나 싶다. 외려 목숨이 긴 인간은 가치의 무게, 효율과 이익을 따지는데 말이다. 주어진 시간이 짧든 길든 그 가치는 동일하다. 아무 개의(介意) 없이 최선으로 종의 번식에 기여하는 저 꽃들처럼 주어진 가치에 예민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값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듯*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눈치 없이 자신을 책임지려는 '오지라퍼'가 될 수 있다.
가치에 예민해지는 연습의 하나는 타인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독단은 내 개인사에서 알아낸 개인적 깨달음을 절대적 기준으로 착각하는 것이기에 결국 타인의 존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며 그 대가는 스스로 번뇌함이다
예술에는 수줍음의 기미가 있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무어든 직접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가치에 예민해지는 연습의 둘은 세계가 가진 수줍음을 귀히 보는 것이다. 용기의 결핍에 철학이 있음을 익히 안다면 그들이 내게 과감히 보이지 않고 시나브로 흘리어주는 은근한 노래에 귀 기울이자. 너희들이 감춘 웅장한 맥박들로 세계라는 곡을 지어냈구나! 하고 놀라워해주자!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1568. 템페라. 86x156cm. 카포디몬테 미술관, 이탈리아 나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