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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티로스 Nov 16. 2023

몹쓸 인간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 치유의 시작이었다

20대 초반에 나는 참 몹쓸 인간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착하긴 했지만,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용수철 같은 20대 청춘이었던 것 같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아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심한 '외사랑'을 겪으면서, 누군가를 가슴 찢어지도록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무시당하고 외면당하고, 그 외면당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충분히 이해받지 못한 상태로, 혼자 어두운 방에서 찢어지는 듯한 가슴을 쓸어 만지면서 기나긴 밤을 지새웠던 날들이 있었다. 그로 인한 방황의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중3 이후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 여파가 갔던 것 같다.


그 지독한 외사랑에 대한 마음을 그 당시에 누군가에게 툴툴 털어놓을 수 있었고, 충분히 이해받고 "그럴 수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힘든 시간들이 있을 거야"라고 위로의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당시의 나는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어차피 지나간 것들. 어떻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 당시 제대로 해소되지 않은 미해결 된 마음의 상태들.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받지 못했고, 외면당했다는 배신의 마음들을 키우면서 10대 후반을 지나온 거 같았다. 그러니 마음이 옳게 자라지 못한 것 같았다. 겉으로는 착한 척했지만, 그 내면에는 아직 미성숙한 자아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너마이트처럼 가슴속에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제 누군가가 그 도화선에 불씨만 튕기면 바로 폭발해 버릴지도 모르는 체 숨을 죽이며 20대 초반을 지내온 것 같았다.


그런 미성숙한 나였으니, 중간중간에 잔 사고들을 쳤었던 것 같다. 20살 성당 교리교사 회의하는데, 선배 교사 누군가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타이밍에 교사회의 중에 기분이 상해서, 회의실을 도망쳐 나온 다던지, 군대 휴가 중에, 다른 초등학교 친구 동창회에 우연히 갔다가, 그 동창들 중 괜찮은 이성에게 이상하게 치근덕거렸다가 몰매를 맞았다던지(물론 심각할 정도의 것은 아니구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가 봐도, 몹쓸 인간이었다.


인간이 순진해 보이고 착하게는 보였으나, 언젠가부터 성격이 이상하게 꼬여서 제대로 풀리지 않을 기세였다. 나도 나 자신이 어떻게 튈지 몰랐다.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로 아무 생각 없는 놈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이 대학은 가야 안 되겠나 하셔서, 2년제에 들어갔다. 아마 그 당시 부모님 심정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래도 초, 중때는 동네에서 공부 꽤나 한다고 동네의 자랑이었는데, 언제가부터 애가 꼬여서, 부모님 마음을 상당히 속상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맏아들이 알아서 커 줘서 4년 제도 들어가고, 대학 졸업해서는 대기업도 들어가고, 제 때 결혼도 하고 제 때 손주들도 낳아주고, 할 꺼라 기대하셨을 건데, 그렇지 못하고, 겨우 2년제 들어가고, 저렇게 빌빌거리고 있는 모양에, 너무 속상하셔서 보이지 않는데서 펑펑 우셨으리라. 짐작된다.


군제대하고 2년제 복학했다. 군에 갔다 왔다고 철이 좀 들긴 했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복학하기 전에 평일 날 오전에 집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데, 문 밖에서 아버지의 한탄 소리가 들렸다. "으이고 저 인간... 제대해도 애가 저 모양이고, 제대했으면 뭐라도 해 볼라꼬 해야 될낀데" 탄식을 하시면서, 혀를 차셨다. 아직까지 그 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고 있다. 그날 이후, 아버지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면서 현실을 직시했는지, 부모님께 더 이상의 실망은 끼쳐드리지 않고 싶어서, 몸을 추스르고 나와서 복학 전 알바라도 해 보려고 이것 저곳 알아봤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의 한 마디가 내 몸을 깨웠다. 정신이 죽었다가 몸이 깨웠졌다 보니, 이것저것 하고 싶었으나,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사춘기와 성인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방황 시기는 있었다.  그러다 있는데, 예전 성당 형들이 성당에 교리교사를 하고 있는데, 복학 전에 같이 해 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내가 뭐 아는 것도 없는데, 뭔 애들을 가르쳐요? 이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형들이, "뭘 가르쳐?! 애들하고 놀아주면 돼"라고 해서, 조금의 부담도 가지지 않고 교리교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역시나 처음엔 어리바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은 내가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는 만큼 그 반응이 바로 왔다. 아이들 마음은 순수해서, 다른 계산이 없고 내가 마음을 주는 대로 좋으면 좋다, 삐지면 삐진대로 바로바로 반응이 오니까, 내 마음이 되게 건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전 사춘기 때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을 표현했지만, 무시당하고 외면당해서 마음의 상처가 깊어서, 그 이후에 사람과의 관계도 삐딱선을 타고 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리 썩 좋진 않았는데, 이제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주면 바로 사랑이 오니까 내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들도 내 사랑을 받고 좋아졌지만, 나 또한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나 자신이 너무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나에 대한 사랑? 나에 대한 존중? 이런 것 따위는 안 중에도 없었는데, 이제는 나 자신이 너무 괜찮아지는 것 같고, 왠지 더 잘하고 싶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뭔가를 해도 좀 더 잘하고 싶었고, 욕심도 내고, 성과도 내고, 인정도 받게 되었다.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때 알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면서도 다시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 되어서 평생 아이들과 마음을 주고받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교대라는 점수가 너무 높아서 현실에 벽에서 교대라는 벽은 넘지 못했지만,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일을 하면서, 너무나 만족하면서 일도 하고 있다. 물론, 돈을 받고 아이들의 성적이라는 결과를 내야지만, 서로 만족하고 계속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조금은 씁쓸한 관계에 있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가 어디야? 아이들과 호흡할 수 있는 이 공간이 너무나 좋다. 그리고 우리 가족 아이들과 같이 커 가는 것도 너무 좋다.


나의 사춘기 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감정을 아이들도 하여금 치유받게 되어서, 지금의 좀 더 나아진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앞으로도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계속 노력할 것 같다.


아이들이 저의 치유의 시작입니다.



#글루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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