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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오후 Jun 27. 2019

기억하니?  이렇게 팔딱거렸던 너를...

얼마 전, 방 정리를 하다가 20대 때 주고받았던 편지 꾸러미를 들춰보게 되었다.

이사 때마다 버려야 하나 갈등하다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달고 다녔던 편지 꾸러미였다.

중학교 일기장과 함께 집안 어딘가에 처박혀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 있었다.

대충 훑어보려다 대학 때 나를 무척 좋아했던 녀석의 편지를 발견.


'맞아, 얘가 있었지...'


A4 앞뒤면에 빽빽하게 적혀있던 편지는 연애감정보다는 대학과 사회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설렘과 불안, 청춘의 뜨겁고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느낀 자신의 갈등과 고민이 오롯이 날것의 언어로 들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나를 떠올리며 혼자의 환상을 키워갔다.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다른 여대생과 다른 맑고 치열하고 당찬 아이였고 그는 내 앞에 서는 게 늘 부끄럽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그런 그의 환상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객관적인 나와는 별개로 그는 자신의 환상을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는 한결같이 빽빽한 편지를 수도 없이 보냈었다. 나는 그의 편지를 기다리지도, 그렇게 꼼꼼히 읽지도 않았었다. 사실은 배설하듯 써놓은 그의 고민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 대해 흥미가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발 다가오면 두발 도망을 갔고, 힘들었을 고백이 담겨있는 편지에는 못 받은 척을 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었기에 잔인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그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니, 그때의 감정보다는 녀석의 깊이가 더 크게 다가왔다. 이렇게 치열한 놈이었구나, 이렇게 순수한 놈이었구나. 그 녀석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중년의 아재로 살고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녀석에게 이 뜨거운 편지들을 다시 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나느냐고, 그때의 너는 이렇게 푸르고 팔딱거렸다고...


그렇다면 나는...


20대의 난 상상하고 꿈꾸는 일은 많았지만,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 좁았고, 주어진 재능과 재화는 부족했다. 더 많이 배우고 경험을 쌓은 후, 언젠가 때가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키우는 데 30대의 거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다. 40대 초반,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숨을 돌리고 보니, 어느새 폭삭 늙어버렸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무언가를 시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육아를 하면서도 일을 쉰 적은 없었지만, 성취나 배움보다는 생계의 의미였고, 다른 워킹맘처럼 가정과 일 사이에서의 힘겨운 줄타기를 이어오고 있었으니까.


“앞으로 나는 어떤 큰 변화 없이 이렇게 그냥 늙어가겠구나”

나는 생각보다 일찍 노년을 받아들였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나의 일로 받아들이기엔 실천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일상 속에서 도전해야 할 절박한 이유도 없었다. 혹 가끔 무언가 끌어당기는 것이 나타나도 현재의 처지에서 가능하리라 욕심내지도 않았다.


20대, 30대 독종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치열함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도 된다는 나름의 보상심리도 있었고, 나를 가두는 지겨운 성실함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그 뒤에 숨었다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JUST TRY!


너무 오랫동안 나를 내버려두어서일까, 내 마음이 조금씩 꿈틀댔다.

나에게도 꿈꾸던 날개가 있었을 텐데...

노후까지 든든하게 곳간이 여유롭지도 않고, 늙어서까지 할 수 있는 별다른 생산수단이 있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번 생은 틀렸어'로 숨기에는 아직 새털같이 많은 날들이 남아 있었다.


작은 것부터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송두리째 시간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 나의 생각을 나의 언어로 다시 정의하기 위해서,

꼰대로 늙지 않기 위해서, 희미해진 감성을 되찾기 위해서, 잊혀진 꿈을 꾸기 위해서...


하지만 몸은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게으르게 놓아둔 시간, 두려움으로 숨어버렸던 시간, 오래도록 애쓰지 않았던 마음이 순간순간 나를 다시 주저앉힌다. 오랜동안 길들여진 생각과 행동의 패턴들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쉽게 바꾸려고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지금까지 안 바뀌는 것들은 그냥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으로 하루하루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매일의 소소한 도전이 모여  조금 더 큰 꿈을 꿀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


JUST TRY!

진짜 나를 가두는 것은 무엇인가

진짜 내가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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