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유랑경음악단 Jul 08. 2019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미옹

1. 비행


어젯밤은 잠을 거의 못 잤다.

늘 떠나기 전날은 잠을 못 자는 편인데, 내일은 다른 곳에 있을 거라는 설렘과 긴장 때문이겠지. 여행 첫날과 함께하는 나의 비몽사몽은 이젠 익숙하다.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공항까지는  2시간 20분. 항공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약 3시간 안팎으로 생각해 보아도 부담스럽지 않다. 이 시간이면 나는 눈을 제대로 붙일 수는 없어도 비행기 안에서 제법 알찬 준비들을 할 수 있다.

우선 핸드폰 화면의 재배치. 미리 받아놓은 구글맵과 구글 번역기, 에어비앤비를 첫 화면으로, 러시아 대중교통을 볼 수 있는 2GIS, 러시아 택시 앱 막심(Maxim), 시베리아 횡단 열차 가이드, 데이터를 바로 올릴 수 있는 드라이브를 두 번째 화면에 배치한다. 이어서 곧 도착할 블라디보스토크의 정보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공항에서 시내 가기, 숙소 체크인, 그곳에서의 볼거리와 할 거리, 먹을거리. 여행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기초 러시아어. 안녕하세요?- 즈드라스부이쩨(здравствуйте), 감사합니다-스파씨바 (спасибо), 맥주 주세요-삐버, 빠쫠-뤼스타(Пиво, Пожалуйста)

비행기 안에서 제법 알찬 준비들을 할 수 있다

2. 실제 여행을 하는 것처럼?


"실제 여행을 하는 것처럼” 가상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고민이 생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여행 스타일이 있는데 나의 경우는 여행 첫날의 숙소 예약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거의 준비를 하지 않는 편이다. 자유로움과 즉흥적인 것들을 추구해서라기보다 반복되는 경험들로 깨닫게 된 도무지 진화하지 않는 나의 방향감각과 게으름 덕분이다.


더 넓은 곳으로 나가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겠다 결심한 대망의 첫 배낭여행에서부터 나의 이 특별한 방향감각은 빛을 발했다. 계획한 목적지를 매번 엎어놓았고 밤에도 숙소를 못 찾아 한 시간 이상 원치 않는 산책을 하는 날들이 반복되니 이때부터 나는 내 여행에서 조금씩 계획이란 것을 놓아주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등장한 스마트폰은 냉정하게만 느껴지던 종이지도와 달리 나를 중심으로 지도를 돌려주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하듯 나에게 많은 시간과 체력을 아끼게 해 주었다. 이 달콤함에 빠져 나는 문명의 이기에 완벽 적응한 이 시대의 현대인이 되었고, 지도 외에도 많은 것들을 핸드폰에 의지한 채 더욱 준비를 게을리하는 여행자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나를 중심으로 지도를 돌려주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이 허술한 여행 스타일이 가상여행에서도 가능할까? 시작은 할 수 있을까?

문득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 새봄과 함께 여행하게 된 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니는 나보다 당연히 뛰어난 방향감각을 가졌지만, 여행을 좀 더 많이 다녀본 나에게 속도를 맞춰줄 것 같고 그로 인해 같이 여행을 하다가 우리의 20년 우정이 깨지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 휴우...


3. 도착


여행 첫날은 일단 숙소 체크인을 한 뒤 근교 산책을 하며 편히 쉬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한국의 시차는 1시간이고 면적은 331.2㎢로 서울 면적의 반밖에 안 되는 크기이니 편안히 돌아다니면 될 것 같다. 볼거리들은 시내에 모여있고 한국인도 한국어가 적힌 가게도 많다.


4. 아님 말고 키워드 황당 여행- 보스토크


우리는 연희동에 위치한 카페 보스토크를 방문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검색하다 알게 된 곳인데 둘 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연희동에 있는 카페 보스토크

카페 보스토크의 외관은 2층 양옥집을 개조한 형태로 모던과 전통이 섞인 모습이었는데 여러 가지 문화가 혼합된 러시아와 잘 통하는 느낌이다. 1층은 갤러리, 2층은 음료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카페로 들어서니 수채화로 적힌 메뉴판이 인상적이다. 2층에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 또한 왠지 모르게 이국적이었다.

2층에서 바라보는 카페 보스토크의 창밖 풍경

카페 보스토크의 SNS에서 “라이카”라는 이름의 반려견을 보았는데 내가 이미지로 보았던 우주견 라이카와 많이 닮았다. 라이카는 냉전 시대의 우주 경쟁 도중 인간 대신 우주로 보내진 개다. 원래는 모스크바를 떠돌던 개였다는데, 영리하고 온순한 개들의 슬픈 결말은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

최초의 우주견 라이카 (Image: © NASA)

각자 음료를 주문하고 앉아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랜드마크인 혁명광장, 포크롭스크 성당, 개선문은 일단 인터넷 감상으로 만족하고 율 브리너 생가가 있는데 율 브리너의 영화를 한 편 볼까? 마린스키 극장이 있으니 발레를 볼까? 문화와 예술이 있는 젊음의 아르바트 거리가 있으니 대학로를 가볼까? 독수리 전망대를 가는 것도 필수인데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을 가볼까? 실제로 독수리 전망대는 케이블카를 이용해 오르고 남산에서처럼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자물쇠들이 걸려있다. 이곳에서도 자물쇠를 채우고 헤어진 수많은 연인들이 있겠지.


가상여행이지만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씩만 정해보자. 미리 짜 놓은 여행경로는 자연스럽게 바뀌기도 하겠지. 우리는 카페 보스토크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밤을 맞이했다.


5. 아님 말고 키워드 황당 여행 - 해양공원


블라디보스토크의 둘째 날을 생각하며 가까운 항구도시 인천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항구 도시이고 현지인들이 산책으로 애용하는 해양공원이 있는데 해 질 무렵 특히 많이들 찾는 곳이다. 바다가 있고, 해안 길이 있고, 가까이에 식당과 카페들이 있으니 해양공원에서의 산책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양공원에는 작은 놀이공원도 있는데 무지개색의 알록달록한 대관람차를 보니 월미도 놀이공원이 떠올랐고 그렇게 인천행을 결심했다.

해양광장이 있는 가까운 항구도시 인천으로 향했다

오늘은 러시아 음식도 먹어볼 생각으로 인천 연수구 연수동에 있는 러시아 식당을 찾았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입구 옆쪽으로 탐스러운 보드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두근. 신뢰가 가는 식당이다.


우리는 거창한 식사보다는 가볍게 맛만 볼 수 있는 간식을 원했기 때문에 감자로 속 재료를 사용한 펠미니(만두)를 시켰다. 펠미니는 사워크림과 같이 주었는데, 호불호가 있겠지만 사워크림에 찍어 먹는 뜨끈뜨끈한 감자만두라니. 새롭기도 하고 내게는 맛도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산책하다 들어간 빵집에서 나는 맛있어 보이는 빵을 몇 개 샀는데, 한국어를 못 하시는 주인 분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생긴 것만 보고 고른 빵이었다.

빵 안에는 고기가 가득 들어가 있었는데, 바로 러시아의 전통 빵 삼사였다. 내가 먹고 싶었던 빵은 아니지만, 러시아어로만 적혀있는 포장에 묘한 만족감이 든다.

사워크림에 찍어먹는 뜨끈뜨끈한 감자 만두

그다음 목적지 인천 연안부두로 이동했다.

넓게 펼쳐진 바다와 장난감처럼 세워져 있는 배들, 짙은 색의 하늘과 화려한 구름이 늘 그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있었다는 듯이 평온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평일 낮이라 더욱 인적이 드물었고, 그만큼 조용했기 때문에 그곳의 소리에 집중하기에 좋았다.


연안부두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 있다. 201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시와의 자매결연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광장이다. 꽤나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광장이지만 러시아 양식의 건물과 마트료시카(러시아 전통 목각인형), 순양함호 추모비를 볼 수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곳의 소리를 녹음하고, 포토제닉 포스를 한껏 발휘하는 마트료시카를 모델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여객 터미널과 선착장을 돌아보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살짝 여행의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 입구에 있는 문주
포토제닉 포스를 한껏 발휘하는 마트료시카

인천까지 온 김에 월미도 놀이공원을 가서 대관람차도 타고 싶었지만, 거리가 꽤 멀어 바다를 보며 마시는 커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카페에서는 오래된 가요들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이 음악들이 흐르고 있었을까.

따라 부를 수 있는 익숙한 노랫소리도 좋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변하는 시간을 견디고 많은 사람의 추억과 함께했을 노래라고 생각하니 뭉클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이렇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일정이 끝나간다. 우리는 내일 아침 약 4000km 거리, 76시간 16분이 소요되는 이르쿠츠크행 열차에 오를 예정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텐데...


6. 황당 열차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가상여행을 하면서 나는 실제 여행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찾아보고 알아보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패턴은 이번 여행 내내 계속될 것 같다. 게으른 나의 실제 여행보다 가상여행이 어찌 보면 다른 면에서 깊이가 더 있다.

20대 나의 여행이 무언가를 바꾸거나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다짐하는 여행들이었다면 30대 이후 나의 여행은 복잡한 것들을 버리고, 일상의 반복 속에서 둔해져 버린 나의 감각들을 깨우는 심폐소생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떠나는 것이 우선이었고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폐소생술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일단 떠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가상여행은 내가 잊고 있었던 20대로 나를 돌아가게 한다. 많이 찾아보고, 알아보고, 생각하다 보니 또 다른 알고 싶은 것들이 생기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음악도 많이 듣고,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고, 그림도 많이 보고, 메모도 많이 하고, 일기도 써야지. 그리고 이 여행을 마쳤을 때 즈음에는 나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다. 20대의 여행이 그랬듯이.


“우리가 상상하는 장소들은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여행할 수 있게 해 주며,

  방콕 여행자는 이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에 동원된다”

                                                              -피에르 바야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좋은 음질 들으세요.

브런치에 연재된 글은 낭독 버전으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운드클라우드, 네이버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애플 팟캐스트)


 * 유튜브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낭독:  https://youtu.be/wSG7ZCfAfBo

* 유튜브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사운드트랙: https://youtu.be/QW3QtiYd6dE

* 사운드 클라우드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낭독 : https://m.soundcloud.com/bangyurang/02-ocean-park-voice

* 사운드 클라우드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사운드트트랙: https://m.soundcloud.com/bangyurang/2a-1


* 네이버 오디오클립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낭독: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4

* 네이버 오디오클립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사운드트랙: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5

* [방유랑 경음악단] 애플 팟캐스트 : 추후 업데이트 예정

이전 02화 1회 준비, 출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