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여행을 가본 게 까마득하다. 오래전에 먼 곳으로 꽤 길게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그 후에 여행이라고 부를 만한 떠남은 내 인생에 없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의 짧은 휴가는 종종 있었고, 출장도 있었지만, 그걸 여행이라 부르기엔 뭔가 어색하다. 아니, 도대체 나는 여행을 뭐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애용하는 다음 한국어사전에 여행이란 단어를 입력해보았다.
여행(旅行)
: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님
“두루 돌아다님”.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한 번도 러시아에 가보고 싶었던 적이 없다. 러시아에 대해서 아는 것도 다 단편적인 데다 어딘지 모르게 무시무시한 내용이 많다.
백야,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 공산 혁명, 레닌, 보드카, 라이카, 스푸트닉, 스탈린, 옐친, 푸틴, 북극곰, 러시아 정교, 챠르, 라스푸틴, 아나스탸샤, 이반 뇌제. 볼셰비키, 맨셰비키, 발레, 차이코스프키, 빅토르 최, 아르바뜨 거리, 체르노빌, 예카테리나 여제, 크림전쟁, 아관파천, 톨스토이, 체홉, 고리키, 나보코프, 전함 포템킨, 도스토예프스키, 닥터 지바고의 테마. 특히, 지팡이로 자기 자식을 때려죽였다는 이반 뇌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을 최초의 우주견 라이카, 흑마술사였다는 라스푸틴, 집무 시간에 취해 있기로 유명했던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메틸 알콜로 술을 만들어 마시다 시력을 잃는 사람이 종종 생긴다는 뉴스까지, 나에게 러시아는 문명과 문명 이전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좀 으스스한 나라이다.
문득, 애정하는 SNS인 트위터에 “인생을 바꾸려면 이사를 가라, 같이 사는 사람을 바꿔라, 결심은 무의미하다”로 기억되는 내용에 하트를 찍었던 게 떠올랐다. 궁금해져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오마에 겐이치라는 분의 <난문쾌답> 중에 한 대목이었다.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하다”
여행 준비를 해야 하는데, 왜 이런 게 생각나나 싶었는데 다 관련이 있었다. 저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동하는 건 사실이다. 결심을 반복하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보다, 바뀔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게 나에게 이로운 것 같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시간은 둘째 치고, 뒤의 두 개, 즉 사는 곳을 바꾸는 것과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에 여행은 가장 잘 부합되는 행동이다. 물론 이사가 더 강력한 방법이지만, 최적의 결과를 위해서는 꽤 많은 것이 요구된다. 운이 좋은 편인지 나는 이사를 그리 자주 다닌 편이 아닌데도, 그 과정이 재밌진 않았다. 설렘만큼 제법 스트레스가 많았다. 반면 여행은 그보다 쉽게 공간과 사람의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꽤 무거운 과정인 이사에 비해 여행은 가볍고 재미도 더 있어 보인다.
아무튼 나는 무의식적으로 여행의 의의를 나에게 설득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여행다운 여행이 없었던 건 그만큼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서이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 산책을 좋아한다. “두루 돌아다님”을 아주 작은 스케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딱히 어디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래전에 긴 여행을 갔다 온 후 나는 기타를 치게 됐고, 십여 년이 넘어서는 음악가가 되었다. (어느 한순간에 짠 하고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몰랐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때 그 여행은 일종의 에고 트립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20대 같은 그런 여행은 아니더라도 돌아다니는 곳을 의도적으로 바꿔 보아야 할 시간이 오긴 온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부메랑처럼 원점으로 퇴행할 것이다.
여행을 다녀 온 후 나는 기타를 치게 됐고, 그 후 천천히 음악가가 되었다.
여행 준비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 가이드북과 저 책도 함께 사야겠다. 가져가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읽어야겠다. 책이 무거워 보이는데, 그냥 읽고 갈까?
우리는 이제, 러시아의 극동,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총길이 9.288km를 달릴 것이며, 7개의 시간 변경선을 건널 것이고, 87개 도시와 63개의 기차역을 지나게 될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근무한 적 있다는 선배 애인에게, 그곳에서는 돼지비계를 빵에 끼워 먹고, 겨울에 쿠반카라는 러시아 털모자가 없이 밖에 나가면 머리 핏줄이 얼며, 보드카 한 잔은 원샷을 해야 춥지 않다는 얘기를 건너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십수 년 전 일인데, 사실 그거 말고 아는 건 교과서에서 배운듯한, 자원이 풍부하다, 대부분은 사람이 살지 않으며, 오랫동안 강제 노역과 유배의 땅이었다, 라는 정도의 정보만 있을 뿐이다. 시베리아는 탐험가만이 ‘두루 돌아다닐’ 수 있는 극한의 오지이다. 물론 우리는 기차로 시베리아를 통과할 것이고, 우리가 지나는 지역은 그나마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어쨌든 그 극지를 횡단해 우리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볼 생각이다. 세계 최대의 담수호 바이칼에도 들려볼 것이다. 아무리 가상여행이라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너무 거대한 지역이라 그런 것 같다. 더군다나 나같이 동네 산책이나 주로 다니는 사람에겐 너무 크다.
그나저나 여행에 대한 감상에 젖기 전에 나는 여권부터 발급받아야 한다. 2014년에 5만원이나 주고 발급한 5년짜리 여권이 만료되어 버렸다. 그냥 단기 여권으로 발급받을 걸.
아 비자는? 다행히 러시아와 한국은 상호 비자면제 협정이 체결되어, 단순 관광과 방문이라면 무사증으로 최대 연속 체류 60일이 가능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것도 2014년부터다. 만세!
자 다음으로 항공권을 사볼까? 인천-블라디보스토크는 2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고 항공편도 꽤 많다. 러시아는 생각보다 가깝구나. 가상여행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비싼 티켓을 끊을 수도 있지만, 멀지 않으니 저렴한 좌석도 상관없다. 환전은?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해 조금만 환전하고 나머지는 해외 체크카드를 이용하는 게 좋다고 한다. 여행자 보험, 경비 계산도 더 알아봐야 하고 짐도 꾸려야 할 텐데. 벌써 귀찮다. 데이터 로밍도 잊지 말아야지. 알뜰폰 통신사는 해외로밍이 잘 안된다는 얘기가 있던데, 요새는 상황이 나아진 듯 보인다.
이제 짐을 꾸려본다.
여름의 시베리아라 많은 짐은 필요 없을 것 같지만, 큰 배낭, 작은 가방, 반팔 티셔츠 2개, 긴팔 1개, 레깅스, 반바지, 긴바지, 카디건 1개, 바람막이 점퍼, 운동화, 샌들, 속옷, 비누, 샴푸, 린스, 폼 클렌저 칫솔, 치약, 수건, 작은 헤어드라이기, 내 사랑 휴지… 는 필수겠지. 음, 상트 페테르부르크 같은 곳에서 발레를 볼 수도 있으니 점잖은 옷도 하나 가져가야 할 것 같고. 아이패드랑 킨들도 챙기고, 블루투스 헤드폰이랑 유선 이어폰, 녹음기… 잠깐, 이러다 다 가져가겠다. 이 여행의 동반자가 여행 박사급이니 그가 뭘 준비하는지 보고 조언을 구해야겠다. 그런데 미옹은 준비를 다 끝냈을까?
오래전 여행에서 나는 한 달쯤 지난 뒤에야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을 샀었다. 기차에서 신발을 잃어버려 쪼리를 한참이나 질질 끌고 다녔고, 배낭에 문제가 생겨 현지 시장에서 푸대자루 같은 가방을 사고 티셔츠도 사 입었던 생각도 난다.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없고, 준비성 없기는 마찬가지다. 앗, 공항 가야 할 시간이다. 공항엔 여유 있게 가야 한다. 그런데 비행기를 하도 안 타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오래전 입국신고서에 나는 직업을 학생이라 적었었다. 학생이었으니까. 이번엔 음악가, Musician이라고 적을 것이다. 싱어송라이터라고 적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