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유랑경음악단 Jul 22. 2019

3회 자작나무

새봄

1. 블라디보스토크 역 대합실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역 대합실 천장 벽화. Image: ©Andshel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인 두 역—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으로 장식된 높다란 대합실 천장을 올려다보자니 문득 “기차소리 요란해도 아기아기 잘도 잔다”는 동요가 떠오른다. 어디에서나 잘 자는 편인 나에게 기차의 규칙적인 소음은 잠을 부르는 자장가가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이 감기지만 탑승전 마지막 점검을 해야 한다. 생수와 과일, 컵라면, 군것질거리는 이 정도면 충분할까? 더 필요한 것은 없을까? 그런데 3박 4일 동안 기차에서 뭘 하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빠질수 없다는 컵라면 도시락


2. 승강장에서 그동안 잃어버린 물건이 왜 생각나...


나는 어릴 적부터 일관되게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부류였다. 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어도 항상 붕 떠 있는 기분으로 외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짧은 이동 시간에도 들을 노래를 고르거나 들춰 볼 것을 챙기는 것에는 항상 열심이었다. 음악과 책만큼 단번에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음악만 잔뜩 골라 놓고 지갑이나 열쇠는 깜빡하는 일이 많았고, 가방도 돈도 우산도 자주 잃어버렸다. 분실한 챕스틱을 모으면 작은 에코백은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그동안 내가 잃어버린 물건들이 줄줄이 떠오르며 약간 의기소침해진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게 마련이다. 대신 나는 어디에서나 잘 잤다. 무던해서가 아니라 밖도, 남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였다.


이번 기차 여행에도 두툼한 책과 꽤 많은 음악이 함께 한다. 아이패드에 내가 좋아하는 음악뿐 아니라 러시아 음악도 꽉꽉 채워 놨고, 킨들에는 수년 안에는 끝내지 못할 전자책이 담겨 있다. 하지만 역시 책은 종이책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가이드북, 필립 글래스 자서전 『음악 없는 말』, 이번 가상 여행의 중요 가이드북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 『여행하지 않는 곳에 대해 말하는 법』, 그리고 『예세닌 시선』을 챙겨 왔다(고민 끝에 『난문쾌답』은 뺏다).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정신 차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돌아와 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 9,288Km 기념비와 최초로 시베리아를 횡단했던 증기기관차 앞에서 사진을 찍고 열차의 탑승 플랫폼과 객차 번호를 확인한다. 마음의 양식으로 묵직한 배낭을 메고 두 손에는 일용할 식료품 한 꾸러미를 들고 이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탑승하자.  


우리는 이르쿠츠크까지 이동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는 약 69시간, 3박 4일. 조용하고 여유 있는 여정을 위해 2인실 1등석을 이용하기로 했지만 여러 승객을 마주치는 거야 말로 기차여행의 참 매력이 아닐까 잠시 주저하게 된다. 6인 침대실이 문 없이 이어지는 복도식 3등석은 아무래도 많은 승객, 특히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고 가격도 1등석의 5분의 1이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프라이버시와 화장실, 그리고 전원 콘센트가 마음에 걸린다면 4인실 2등석이 대안이 될 것이다. 가격도 1등석의 반이다. 여유를 두고 인터넷으로 예약하면 현대적 시설의 001M, 002M 열차표를 구할 수도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3등석 Image: ©Petar Milošević



4. 자작나무와 예세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연해주를 지나 하바롭스크 대교로 아무르강을 건너면 창밖으로 밀밭과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종이같이 얇고 하얗게 벗겨지는 참나무과의 큰키나무이다. 언뜻 약해 보이는 껍질은 기름기가 많고 켜켜이 나무의 표면을 싸고 있어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견디게 해 준다. 그 덕에 북반구의 추운 지방 어디에서든 자작나무는 무리 지어 큰 숲을 이룬다. 시베리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자작나무. Image: ©Marko Paakkanen


자작나무


내 창문 밑

하얀 자작나무

눈에 완전히 뒤덮여 버렸네.

꼭 은을 뒤집어쓴 듯.


쌓인 눈으로

푹신해진 나뭇가지들 위에

하얀 술 장식처럼

꽃 송이가 피어났다.


그리고 꿈결 같은 정적 속에

자작나무는 서 있다

그리고 황금빛 불 속에서

작은 눈송이들이 빛난다


새벽노을이 느릿느릿

주위를 배회하며

새롭게 은을

어린 가지에 흩뿌린다.


「자작나무」, 세르게이 예세닌,『예세닌 시선』, 김성일 옮김, 지만지, 2014


세르게이 예세닌 Image: ©wikipedia common
이사도라 덩컨과 예세닌(1923). Image: ©wikipedia common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의 「자작나무」란 시를 읽어본다. 고요한 은빛의 시와 달리 시인의 삶은 부침의 연속이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약관의 나이에 러시아의 농촌과 자연을 경이롭게 표현한 “농민 시인”으로 찬사를 받은 예세닌은 30여 년을 겨우 채우고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에 열광했지만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주의에 절망했고 이는 개인적 불행으로까지 이어졌다. 예세닌을 말할 때 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사도라 덩컨(1877-1927)을 빼놓을 수 없다. 맨발의 댄서 덩컨과 천재 시인 예세닌은 서로에게 한눈에 매료되어 17살의 나이 차를 넘어 결혼하지만 2년 후 파경을 맞이하게 된다. 이혼 1년 후 예세닌은 자살했고, 몇 년 후 덩컨도 바람에 날린 숄이 차바퀴에 걸리는 사고로 즉사했다. 두 예술가의 파격적인 삶과 죽음이 벌써 100여 년 전의 일이 됐지만 예세닌이 노래한 자작나무 숲은 여전하다. 개체가 종의 운명에 순응하는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 개개인의 삶은 잎사귀 한 두 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서 더 영속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잎사귀도 나무도 그 전체 종과 자연스레 이어지니까.     


5. 아님 말고 키워드 황당 여행 - 원대리 자작나무 숲


우리는 자작나무 숲을 걸어보기로 했다. 자작나무의 남방한계선은 북한으로 우리가 방문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곳이다. 예세닌의 시처럼 흰 눈에 덮여 있진 않았지만 자작나무 숲은 여름에도 겨울의 고요함과 서늘함을 지니고 있었다. 매끈하고 하얀 나무의 숲을 걷는 것만으로 호젓한 기분이 든다. 좁고 다정한 숲길을 걷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자작나무는 온몸으로 노래를 한다. 시원한 소낙비가 내리는 것 같다. 자작나무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니 이 나무는 아무래도 소리의 나무인 듯하다.



6. 이 순간의 자작나무


여전히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종종 딴생각을 하지만 그러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들어가지 못했던 몇 번의 소동이 기점인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 인가? 요가를 시작한 때부터 던가? 아무튼 얼마나 많은 순간을 그냥 흘려보냈는지가 안타까워지면서부터인 것 같다. 그때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던 것을 애써 뿌리치고 다른 것을 찾으려 했던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 내가 딴청을 피우며 읽었던 책과 음악을 제대로 즐기기나 한 건지? 아마도 내가 진짜 내 모습에 좀 더 관심이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부터 인 것 같다. 후회나 회한이라기보다는 아쉬움 정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3박 4일 동안 나는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으로 자작나무 숲이 이어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즐기는 순간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러다 자작나무 숲의 빗줄기 같이 시원한 바람소리를 떠올리며 『예세닌 시선』을 다시 읽기 시작해도 좋겠다. 그리곤 곧 졸겠지. 난 아무데서나 잘 자니까.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좋은 음질로 들으세요.

브런치에 연재된 글은 낭독 버전으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운드클라우드, 네이버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애플 팟캐스트)


* 유튜브 3회 자작나무 낭독:  https://youtu.be/vv5DYsP8MpE

* 유튜브 3회 자작나무 사운드 트랙: https://youtu.be/vAMNzUO7eb0

* 사운드 클라우드 3회 자작나무 낭독: https://soundcloud.com/bangyurang/03-white-birch-voiceover

* 사운드 클라우드 3회 자작나무 사운드트랙: https://soundcloud.com/bangyurang/3a-1

* 네이버 오디오클립 3회 자작나무 낭독: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6

* 네이버 오디오클립 3회 자작나무 사운드트랙: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7


이전 03화 2회 보스토크, 해양공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