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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유랑경음악단 Aug 05. 2019

4회 파리 시베리아

미옹

1. 3박 4일의 마무리


기차에서 보내는 3박 4일은 매우 길게 느껴지면서도 적응할만하고, 적응할 만하면서도 또다시 지루해지는 순간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다. 불편하기만 할 것 같았던 시간에 조금씩 적응하다 보면 또 그런대로 장점으로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고, 낮에도 밤에도 끊임없이 잘 수 있는 내 모습에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든다.

컵라면 먹고 차 마시고 책 보다 졸고, 빵 먹고 차 마시고 창밖을 보다가 졸고, 초콜릿과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졸고. 이렇게 보내는 기차에서의 시간이 참으로 낭만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런대로 시간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다음번에도 기차를 탈 수 있겠구나 하는 여유가 조금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적응했다 한들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은 바로 나흘이 돼가도록 샤워를 못 했다는 것이 아닐까? 몇 년 전 지리산을 종주했을 때가 그랬다. 2박 3일 동안의 여정을 마쳤을 때, 나는 지리산 종주를 끝냈다는 뿌듯함보다 드디어 머리를 감을 수 있다는 기쁨이 몇 배로 더 컸다.


이제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했으니 샤워를 할 수 있다. 일단 트램을 타고 시내의 숙소로 가야 하는데 이르쿠츠크 역내에 위치한 샤워 시설을 보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이르쿠츠크 역 Image: ©wikipedia common


2. 시베리아의 파리


숙소에 도착해서 씻고, 침대에 대자로 누워 충분히 휴식의 시간을 만끽한다. 그런데 씻고 누우니까 다시 잠이 온다. 기차에서 그렇게 잤는데 왜 또…


자, 정신을 차리고 이제 우리는 나흘 만에 가장 깔끔한 모습으로 씩씩하게 숙소를 나선다.


이르쿠츠크.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는 곳.

러시아와 유럽의 양식이 혼합된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고 35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시베리아의 외로운 지역이었던 이곳에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명이 붙은 건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꾀한 데카브리스트들의 역할이 크다.


3. 데카브리스트의 꿈과 혁명


12월이라는 러시아어 ‘데카브리’에서 유래한 데카브리스트는 “12월의 혁명당원”을 의미한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을 추격해 파리까지 원정하며 전투를 벌였는데 이때 전투에 참여한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은 유럽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황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군주제와 전근대적인 농노제 폐지라는 혁명을 꿈꾸었지만 실패했다. 이것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니콜라이 1세는 600여 명의 반란 관여자들을 심문한 후 5명은 교수형에 처하고 120명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낸다. 시베리아로 보내진 데카브리스트들은 오랜 시간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강제 노역이 끝난 후에도 이들은 유배지를 떠나지 못한 채 이르쿠츠크에 정착하여 살았다. 귀족 신분을 포기한 채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온 11명의 부인들의 이야기 역시 유명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시베리아로 왔다는 순애보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봉사하였고 병원과 학교를 지었으며 그들의 집에서 음악회를 열고 시를 낭송하는 등 시베리아를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 놓은 활동가들이었다.


데카브리스트의 부인들 11명의 초상화


데카브리스트와 그들의 가족이 묻혀있는 즈나멘스키 수도원, 지금은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된 볼콘스키의 집과 트루베츠코이의 집까지 이르쿠츠크의 관광 명소 중에는 이 데카브리스트와 관련된 곳이 많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을 주도한 세르게이 볼콘스키는 톨스토이의 친척으로 『전쟁과 평화』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처음에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이야기를 쓰려했지만 그들이 어떻게 혁명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 연구를 하다 그 부모님 세대로 배경을 바꾸고 6년의 세월을 쏟아 『전쟁과 평화』를 완성하였다.


세르게이 볼콘스키의 초상화 By George Dawe - Winter Palace War Gallery, St. Petersburg


나는 여행할 때 평상시에는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챙기는 편인데,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절대 완독 하지 못할 것 같던 책이 마지막 장까지 넘어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행을 할 때는 금방 읽고 또 다른 책을 찾아야 하는 것보다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책이 더 좋다. 그런 면에서 지금이 바로 『전쟁과 평화』를 제대로 읽어볼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지만 총 4권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에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그냥 1권만 가져갈까? 아니면 책 대신 영화를 볼까?


4. 방구석 여행 팁 - 영화 『전쟁과 평화


킹 비더 감독

오드리 헵번, 헨리폰다, 멜 페러 주연

3시간 28분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니만큼 긴 러닝타 임에도 사건은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부각되는 주인공이나 사건이 없는 대신 다양한 등장인물과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3시간 28분이라는 시간은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전쟁에 참전하는 안드레이, 프랑스혁명 정신을 숭배하는 피에르, 로스토프가의 장남 니콜라이를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들, 러시아 국민들의 생활과 사랑, 당시 러시아군이 겪은 두 번의 전투가 그려진다.(특히 영화에는 오드리 헵번이 연기하는 니콜라이의 여동생 나타샤가 더욱 매력적이고 존재감 있는 인물로 나온다)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군인들에게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니콜라이의 차남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전쟁에서 졌는데 왜 다들 환호하는 거죠?"

"전쟁에서 싸웠으니까. 죽지 않고 돌아왔으니까"


"전쟁에서 싸웠으니까. 죽지 않고 돌아왔으니까"


이 작품의 원어 제목은 ‘Война и мир’로 [vɐjˈna i ˈmʲir] 여기서 “ 평화”에 해당하는 мир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고 한다. 다음 러시아어 사전에서만도 평화, 강화, 세계, 나라, 세상, 화평, 공안 등등 59건의 뜻이 나오니 다양한 해석이 나올 법도 하다.

영화는 매력적인 장면과 대사들이 많지만 산만한 느낌이 들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다.

아무래도 소설로 읽었어야 했나?


5. 톨스토이와 소피아


『전쟁과 평화』의 저자 톨스토이(1828~1910)는 러시아의 문학과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세계적인 문호 중 한 명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인 그의 대표작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꼽을 수 있는데 이 두 작품은 모두 그의 아내 소피아(1844~1919)의 필사와 교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18세의 나이에 톨스토이와 결혼한 소피아는 13명의 아이를 낳아 길렀고 (그중 여섯은 어려서 죽었다) 톨스토이의 악필 원고를 필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50세를 전후로 소설가가 아닌 사상가로서 “인생의 교사”가 된 톨스토이에게 추종자들이 모여들자, 소피아의 동료 역할은 없어진다. 재산 문제로 말년에 부부 사이의 불화가 깊어졌는데 결국 "아내가 나와 집안을 망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가출한 82세의 톨스토이는 열흘 뒤 폐렴으로 기차역에서 숨을 거둔다.


이상과 현실, 자기모순과 반성으로 끝없이 투쟁하는 삶을 산 톨스토이의 전기 속에서 소피아는 사악한 아내였지만, 뒤늦게 알려진 소피아의 일기 속에서 그녀는 자기 시간이 없는, 자동인형처럼 살고 있는 우울하고 지친 희생하는 아내였다.


1910년 톨스토이와 소피아 톨스타야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있는 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행하는 것이지요."

                                                                         -레프 톨스토이, 『세 가지 질문』



6. 그린라인 도보 산책


데카브리스트에서 톨스토이와 소피아까지 왔으니 차를 한잔하고 천천히 도보 산책을 해도 좋겠다.

우리는 기차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다.

앙가라 강변에 있는 알렉산드로 3세의 동상에서 시작하는 그린라인의 도보 코스가 있는데 바닥에 표시된 녹색 선을 따라 걸으면 된다. 시내의 역사적 건물들을 대부분 둘러볼 수 있고, 길을 잃을 염려가 없으니 이보다 친절할 수가 없다.


도보 산책을 하다 앙가라강 산책로나 130지구에서 실력 있는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코디언으로 러시아 민요를 연주하는 악사를 만나고 싶다. 단순한 발상이지만 여긴 시베리아의 파리니까.


산책을 하다 실력 있는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좋은 음질로 들으세요.

브런치에 연재된 글은 낭독 버전으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운드클라우드, 네이버 오디오캐스트, 유튜브)


유튜브 낭독 https://youtu.be/8lCp-gAuY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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