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알혼섬, 후쥐르 마을의 숙소에 도착하니 그림자가 길어지는 저녁이 되어 있었다. 미니밴은 12시에 출발했지만 아침부터 움직였으니 이르쿠츠크에서 여기에 오는데 거의 하루가 걸린 셈이다. 네 시간쯤 달려 사휴르따 선착장에 도착하니 관광객과 차량들이 제법 붐비고 있었다. 7월과 8월은 바이칼 호의 성수기다. 한 시간 이상 기다려 겨우 아담한 페리에 올랐다. 싱겁게 15분이면 건너간다. 이게 끝이 아니다. 다시 한 시간 반 정도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창밖 풍경은 황량하고 기묘하게 아름답다. 차가 너무 흔들려 이런 감상에 계속 젖을 여유는 없었지만.
알혼 섬은 바이칼 호에 있는 30여 개의 섬 중 가장 큰 섬이다. 바이칼 호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섬의 후쥐르 마을에 묵는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과 정감 있는 목조 건물의 후쥐르는 제일 높은 게 전신주인 전형적인 오지의 촌마을이다. 원주민은 천삼백 명 정도밖에 안되고 슈퍼마켓. 약국, 병원 정도가 편의시설의 전부다. 그렇지만 관광객이 늘어나며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가 묵는 니키타 하우스는 바이칼 호의 명소, 부르한 곶과 멀지 않다. 샤먼 바위가 가깝게 보인다. 그렇지만 오늘은 늦었으니 여장을 풀고 느긋하게 쉬기로 한다. 서울에서 가져간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선집 <처음 가는 마을>을 뒤적여 본다. 오늘의 기분에 꼭 맞는 시가 툭하고 나온다.
인간에게는
행방불명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속삭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멍하니 혼자
외따로 떨어져
선잠을 자든
몽상에 빠지든
발칙한 짓을 하든
전설 속 사무토 할머니처럼
너무 긴 행방불명은 곤란하겠지만
문득 자기 존재를 감쪽같이 지우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행방불명의 시간”
시베리아에서도 오지에 위치한 바이칼의 면적은 31.494㎢로, 크기로 치자면 세계에서 일곱 번째,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다. 감이 오지 않는다면 남한의 면적은 대략 십만㎢이며, 경상남북도를 합치면 32,266㎢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남한의 3/1 크기에 해당하며 경상도와 비슷한 셈이다. 바이칼의 남북 길이는 636km, 둘레는 2,200km에 이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가 325km이니, 이 사이를 여섯 번 하고도 반쯤 더 가야 이 호수의 둘레와 비슷하다. 알혼 섬만 해도 면적이 730㎢로 605㎢인 서울보다 크다.
그런데 크기가 문제가 아니다. 바이칼은 지구 상에서 가장 깊은 호수로 최고 수심이 1,742m에 달한다. 덕분에 전세계 민물의 20퍼센트를 품고 있다. 330여 개의 강이 이곳에 흘러들지만 오직 앙가라 강을 통해서만 물을 내보낸다. 이 깊은 물은 40미터 아래까지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깨끗하다. 이쯤 되면 이곳을 호수라 부르기 무색하다.
아침을 먹고 천천히 걸어 부르한 곶으로 갔다. 언덕 위에는 오색의 천조각이 묶인 13개의 세르게(신목)가 열 지어 서 있다. 여기에 관광객들이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저쪽으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그리고 부리야트의 건국/민족 신화와 관련이 있고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성지인 샤먼 바위가 보인다. 흰 대리석과 화강암이 섞인 30미터가 넘는 큰 바위다. 원래 이 바위는 샤먼 외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사막을 연상시키는 자갈 언덕과 기암절벽, 작은 산 같은 바위, 그리고 짙푸른 호수가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치 다른 행성의 풍광 같다. 조심조심 해변, 아니 호수변으로 내려가 본다. 저 멀리 바닥까지 들여다 보인다. 도저히 호수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수평선이 끝없다. 한없이 투명한 호수에 손을 담가봤다. 머리가 잠깐 쨍하다. 손바닥으로 물을 떠서 마셔 본다. 바다의 비릿하고 찝찔한 맛이 아니다. 부드럽고 상쾌하다. 이렇게 광활한 물에서 짠 내음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이 비현실적이다. 아니 초현실적이다.
바이칼 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이기도 하다. 이 호수는 무려 2500만 년 전에 생성됐다. 현생 인류가 20만 년 전에야 겨우 출현했으니 얼마나 오래됐는지 어렴풋이 감이 올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바이칼 호는 독자적인 생물군과 자연환경을 발전시켰다. 사방이 고립된 지형도 큰 몫을 했다. 서식하는 동식물 2500여 종 중 80퍼센트가 고유종이라니 ‘러시아의 갈라파고스’라 할 만하다. 이 중에 세계 유일의 민물 표범인 네르빠은 바이칼 호를 대표하는 종이다. 바다표범보다 작고 외모도 강아지를 연상시킬 만큼 귀엽다. 작고 귀여운 이 표범이 어쩌다 호수에서 살게 됐는지를 생각하면, 이제 이곳은 호수라 부르기 무색할 정도가 아니라 경이롭기까지 하다. 바이칼 호에 서니 시간과 공간에 미세하게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 건 그래서일까? 인간의 시간을 넘어 지구의 시간에 떨어진 것 같다. 어제 읽던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선집을 다시 펼쳐 본다. 이곳은 그녀가 말한 “세상 곳곳에” 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회전문”인 걸까?
…
세상 곳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회전문이 있습니다
으스스하기도 멋있기도 한 회전문
무심코 밀고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별안간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한번 돌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쪽 세계를 방황하게 되는 구조
그리 되면
이미 완전한 행방불명
제게 남겨진 단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그때에는
온갖 약속의 말들도 모조리 없었던 일이 됩니다
“행방불명의 시간”
바이칼 호는 청정한 수질로 유명하다. 용존산소율과 천연 미네랄 함량이 높아 지구 상의 그 어떤 물보다 깨끗하다고 한다. 또한 바이칼 호의 바닥에 서식하는 “에피슈”라는 새우와 비슷한 동물플랑크톤이 오염물질을 먹어치워 정화한단다. 기특하고 고마운 플랑크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바이칼 호의 심층수를 담은 레전드 오브 바이칼 생수를 시음해보았다. 깔끔하다. 극소량이라도 2500만 년 된 무언가가 함유됐다고 생각하니 마법의 약물을 마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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