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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유랑경음악단 Sep 02. 2019

6회 바이칼의 비극

미옹

1. 이 곳


“어디가 가장 좋았어?”

“뭐가 그렇게 좋았어?”


주변의 지인들보다 조금 더 자주 여행을 다니는 내가 많이 받는 질문이다.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에 대한 답은 매번 달라지기도 하고, 취향이나 방문 시기에 따라 소극적이 되거나 부가설명이 붙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에 대한 답은 늘 같았다.


“거긴 아무것도 할 게 없고 그래서 좋았어.”


아무것도 안 하는 곳,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만나면 나는 그곳에서 여러 날을 머무른다.

“이곳이다”라는 결심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목적지에 도착해 숙소를 찾아 짐을 푸는 사이, 1시간이 넘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는 내가 마주하는 풍경이 나를 빨아들인다. 눈을 뜨고 있지만, 이것이 정말 꿈이 아닌 현실일까에 대해 의심이 들 정도로.


“거긴 아무것도 할 게 없고 그래서 좋았어.”


“아무것도 안 하는 곳”을 만나면 온종일 숙소 밖을 나가지 않는 날도 여러 번 있다.

숙소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하루가 짧을 정도로 시간이 멈춘 듯 평온해 보이는 풍경은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그 색과 모양을 바꾼다.


알혼섬에 도착한 날.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여러 날을 머무르기로 했다.


2. 생명의 호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 가장 넓은 민물 호수, 가장 깊은 호수, 가장 다양한 생물과 고유종이 사는 호수.

이러한 표현만으로도 충분히 벅차지만, 바이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비밀을 갖고 있다.


모든 오래된 호수들은 빙하기를 거치면서 퇴적물이 쌓이고 사라지는데 오로지 바이칼만이 그렇지 않다. 바이칼의 깊은 곳에서는 이상고온 현상과 내부 지진 활동이 활발하다.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지진에 지각판이 흔들리면서 호변이 해마다 조금씩 팽창하고 있어 가장 오래된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양 형태로 생성 단계에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밑으로는 이러한 비밀의 움직임을 품은 채 위로는 지구 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투명한 물을 간직하고 있으니 바이칼은 성스러움 그 자체다.


불을 토하며 무너진 산이 물로 변하여 커다란 바다가 만들어지고, 아직도 그 불은 식지 않는다는 바이칼의 기원
설화를 믿는 부랴트족에게 바이칼은 신이고 생명이고 경이로움이고 두려움이다. 그들은 바이칼 호수에 돌 하나도 함부로 던지지 않고 바라보는 것조차 조심한다. 샤머니즘의 종교적인 의식으로서가 아니더라도 나 역시 바이칼을 바라보고 있을수록 머리를 점점 숙이게 된다. 대자연 앞에 서면 누구라도 겸손해지니까. 우리는 모두 작은 먼지 같은 존재라는 걸 넌지시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3. 죽음의 호수


“정거장 앞 조그마한 아라사 사람의 여관에다가 짐을 맡겨버리고 나는 단장을 끌고 철도 선로를 뛰어 건너서 호수의 은빛 나는 곳을 찾아서 지향없이 걸었소. 한 호수를 가서 보면 또 저편 호수가 더 아름다워 보이고. 원컨대 저 지는 해가 다 지기 전에 이 광야에 있는 호수를 다 돌아보고 싶소.

내가 호숫가에 섰을 때에 그 거울같이 잔잔한 호수면에 비치는 내 그림자의 외로움이여 그러나 아름다움이여! 그 호수는 영원한 우주의 신비를 품고 하늘이 오면 하늘을, 새가 오면 새를, 구름이 오면 구름을 그리고 내가 오면 나를 비추지 아니하고. 나는 호수가 되고 싶소. “


-이광수, 『유정』, 푸른생각, 2013


바이칼이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이광수(1892~1950)의 『유정』이다.
『유정』의 주인공 최석이 자식처럼 키운, 죽은 친구의 딸 정임과의 떠들썩한 소문을 피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품은 채, 죽음을 결심하며 홀로 떠나는 목적지가 바로 바이칼이다. 석양의 아름다움과 수은같이 빛나는 호수의 빛을 보고 홀린 듯이 기차에서 뛰어내리지만 가을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최석의 시선 속 바이칼은 외롭고 황망하고 메마른 곳이다.



"호숫 가의 나불나불한 풀들은 벌써 누렇게 생명을 잃었고 그 속에 울던 벌레, 웃던 가을 꽃까지도 이제는 다 죽어 버려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오직 성내어 날뛰는 바이칼 호의 물과 광막한 메마른 풀판뿐이오. 아니 어떻게나 쓸쓸한 광경인고."



"꿈을 깨어서 창 밖을 바라보니 얼음과 눈에 덮인 바이칼호 위에는 새벽의 겨울 달이 비치어 있었소. 저 멀리 검푸르게 보이는 것이 채 얼어붙지 아니한 물이겠지요. 오늘 밤에 바람이 없고 기온이 내리면 그것마저 얼어붙을는지 모르지요. 벌써 살얼음이 잡혔는지도 모르지요. 아아, 그 속은 얼마나 깊을까. 나는 바이칼의 물 속이 관심이 되어서 못 견디겠소."


-이광수, 『유정』, 푸른생각, 2013


생명을 잃은 꽃과 벌레, 메마른 풀 판, 검푸르게 보이는 물… 이러한 호수의 모습은 최석의 죽음에 대한 고찰과 닮아있다. 최석은 끝내 사랑하는 정임을 만나지 못한 채 시베리아의 삼림 속 집에서 죽음을 맞는다.


4. 바이칼의 비극


바이칼을 배경으로 한 죽음은 소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이칼은 “시베리아 얼음 행군”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을 품고 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자,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 부활을 목표로 한 백군과 혁명 정부군인 적군이 벌이는 내전에 휩싸였다. 1919년 11월, 패배한 백군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적군의 추격이 닿지 않는 시베리아로 도망치기로 한다. 이 행군은 참여 군민 125만 명 중 25만 명 이상이 여자와 아이들인 데다, 500t의 금괴 군자금도 운반해야 하는 극한의 장정이었다.

극심한 추위로 동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도 이 죽음의 행진은 계속되어 3개월 후 이르쿠츠크에 도착할 즈음엔 25만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이칼 호라는 거대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얼어붙은 호수를 횡단하던 백군은 영하 70도까지 떨어진 혹독한 날씨로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봄이 와 얼음이 녹자 동사자 25만 명의 시체는 그대로 바이칼 호수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져 버렸다.


바이칼이 녹아있는 시간은 1년 중 3~4달 뿐이다


40m 깊이까지 보일 만큼 투명한 바이칼의 더 멀고 깊은 곳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많은 이야기와 영혼들이 있다. 바이칼은 많은 생명체가 만들어지며 사는 동시에 수십만 명의 생명이 가라앉은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다.


5. 석양과 별


평온하게 움직이던 하늘을 담은 호수 수면 위로 해가 천천히 내려가는 동안 석양의 빛은 호수, 하늘, 구름, 산을 담아 계속해서 다른 그림을 만들어 낸다.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색채를 뿜어내면서.



호수 뒤로 완전히 해가 사라지고 나면 어두워진 하늘 위로 별이 가깝게 자리를 잡는다. 알혼섬은 사계절의 별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별이 쏟아질 듯 많아진 밤하늘 아래에서 바이칼의 명물인 훈제 오물과 보드카 한 병을 앞에 놓고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좋은 곳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좋은 날이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 며칠 더 이렇게 보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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