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
다시 이르쿠츠크 역이다. 제법 묵직한 배낭을 메고 사람과 차량으로 북적이는 역전에 도착하니 오후 1시(모스크바 표준시 오전 8시) 조금 전이었다. 언뜻 보면 인형의 집처럼 화사한 파스텔 톤의 역사는 다시 보면 고풍스럽고 근엄하기까지 하다. 온통 키릴 알파벳으로 도배된 표지판과 전광판은 무뚝뚝하고 불통한 어르신 같다. 여행 온 나라의 글자도 다 외우지 못한 여행자도 바람직하다 할 순 없지만, 러시아의 표지판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우리는 장거리 매표소가 있는 역사 1구역에서 실물 승차권을 발권했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터라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이 작은 종이 조각은 이제는 좀처럼 손에 쥘 일이 없는 사진만큼 소중하게 낡아갈 추억이 될 것이다. 나는 관람한 영화나 공연의 티켓을 일부러 아무 책에나 끼워놓곤 하는데, 어느 날 무심코 펼친 책에서 떨어지는 그날의 기억처럼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열차표를 마주할 훗날의 나는 오늘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목까지 지퍼를 올렸던 점퍼를 벗어 어깨에 걸쳤다. 시베리아의 9월은 아침저녁으로 꽤 쌀쌀하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니기에 낮은 아직 더웠다. 간단한 요기를 하러 역 바깥으로 나오니 음식점들 몇 개가 눈에 띈다. 우리 동네에도 있는 서브웨이도 있다.내심 서브웨이에 가고 싶었지만 웬만하면 현지 식당에 도전해보자는 동행자의 옳은 의견을 따라 너무 붐비지 않는 패스트푸드점 풍의 식당 문을 밀었다. 러시아식 팬케이크인 블린(блины)을 시켜 쌉쌀한 홍차와 곁들여 먹었다. 맛있다! 이 정도면 이거 먹으러 다시 오고 싶을 정돈데?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인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는 7시간의 시차가 있다. 모스크바가 낮 12시라면 이르쿠츠크는 오후 5시,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는 저녁 7시라는 말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7번의 표준시간대를 지나 시간을 달리는 열차인 셈이다.
낭만적으로 들리는 이 내용은 기차를 타기 전에 재차 확인해야 할 중요 사항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매하고 발권한 티켓에 표시된 날짜는 모두 모스크바 표준시가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 역의 모든 전광판에 표시된 시간 또한 모스크바 기준이다. 10시 54분에 출발하는 열차는 이르쿠츠크 기준 오후 3시 54분발로, 시간을 달리는 열차를 타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두 개의 시간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스마트폰에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를 추가해 계속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지켜야 할 약속이 없다면 배꼽시계에 맞춰 행동하는 편인 나에겐 꽤 피곤한 일이었다.
날짜변경선 또는 시간변경선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통해서였다. 이 소설에서 어린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 포그의 살짝 괴팍한 습관과 시간이 지역마다 다르다는 개념이었다.
주인공 포그는 매일 같은 곳만 다니고 면도물의 온도와 외출 시 걷는 발걸음 수까지 지킬 정도로 꼭 맞춰진 일과를 사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그가 어느 날 신문 기사를 보고 충동적으로 거액의 내기돈을 건 세계일주를 떠난다. 오직 80일 내에 세계를 돌 수 있는지 여부에만 방점을 둔 포그와 그의 하인 파스파르투의 여정을 일반적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주마간산일지라도 여행은 여행. 포그와 파스파르투는 통과하는 곳마다 그곳의 풍토와 문화에 걸맞은 사건을 겪고 사고를 친다. 인도에서는 아직 공사 중인 대륙횡단 열차 구간을 기지를 발휘해 코끼리를 타고 건너며, 산 채로 화장당할 뻔한 인도인 여성을 구하는 선행도 하고, 홍콩에서는 함정에 빠져 아편에 잔뜩 취하며, 미국에서는 기차에서 인디언과 총격전도 벌인다. 전속력으로 세계를 돈 주인공 일행은 마침내 시간 맞춰 영국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지만, 포그를 은행강도범으로 오해한 형사 때문에 마지막 하루를 구치소에서 지체하게 된다. 이렇게 내기에도 지고, 전 재산도 다 잃는가 싶었지만 포그도 파스파르투도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경도에 따른 시간차 덕분에 이야기는 대반전을 이룬다.
지구는 24시간을 기준으로 360도 돌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시간 차이가 생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경도 180도 부근에 가상의 선을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에서 날짜가 하루 달라지게 한 것이 날짜경계선이다. 동쪽으로 갈수록 경도 15도마다 1시간씩 시간이 빨라진다.
따라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세계를 일주한 포그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하루를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집 밖에서 걷는 걸음수까지 계산하는 포그가 왜 이것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80간의 세계일주>가 출간된 1873년에는 포그뿐 아니라 누구도 날짜변경선을 고려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날짜변경선은 1884년에야 합의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관념이 철저한 포그조차 경도에 따라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어 하루가 단축되어 버린 것을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날짜변경선, 그리고 표준시는 흥미롭게도 기차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캐나다 철도회사에 근무하던 엔지니어 샌포드 플레밍(Sandford Fleming)은 1876년 아일랜드를 방문했다가 오후와 오전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시간표 덕에 기차를 놓치게 된다. 당시에는 모든 국가가 12시간제를 사용한데다 지역마다 시간이 다르고 이를 아우를 표준시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기차 승객들은 출발지와 도착지의 시간을 매번 계산해야만 했다. 실제로 1870년대 미국이나 인도에서 대륙 횡단열차를 타는 이들은 역마다 시간을 새로 맞췄다. 제도 보완의 필요성을 체감한 플레밍은 기차 시스템에 24시간제 도입을 제안했고, 전 세계적으로 시간을 통일해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도대체 어느 곳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1884년에야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가 세계 시간의 표준인 ‘본초자오선’으로 합의됐다. 그리고 이곳과 정반대인 서경 180도(동경 180도 지점이기도 한)는 날짜변경선이 됐다.
한국과 하와이를 예로 들어보자.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동경 135도 구간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세계표준시보다 9시간 빠르다. 반면에 하와이는 날짜 변경선을 지나 서경 155쯤에 위치하기 때문에 세계표준시보다 11시간 느리다. 즉 우리나라는 하와이보다 무려 19시간이나 빠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를 결정한 것은 당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의 나라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모든 표준의 뒤에는 당대의 권력이 서 있다. 그러니, 가끔은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것의 처음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일상에서 여유를 찾고자 떠난 여행에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시간 계산에 열중하고, 시간 맞추려 계속 신경을 쓰게 되는 게 참 묘하다.
모스크바 표준시 10:54분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일찌감치 올라탄 게 이르쿠츠크 시간 오후 3시쯤이었다. 이르쿠츠크 시간 오후 3시 54분에 정확하게 출발한 기차는 이제 밤의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군데군데 스마트폰 화면이 희미하게 빛나지만 3등칸 플라츠카르타는 낮의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어둡고 조용하다. 창밖은 더 캄캄하다. 규칙적인 기차의 덜컹임이 짧은 딜레이 루핑 같다. 이제 내가 자는 동안도 이 열차는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가겠지, 그러는 동안 나는 조금씩 내 시간을 흘려 보내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자니 눈이 감겨온다.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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